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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14.]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카터 방북카드를 제안한 김대중의 동영상 자료 최초 공개 2021.06.14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카터 방북카드를 제안한 김대중의 동영상 자료 최초 공개

- 6.15 남북공동선언 21주년 기념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한석희)은 6.15 남북공동선언 21주년을 맞이해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카터 방북카드를 제안해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해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대중의 동영상 자료를 최초로 공개한다.

 

공개 자료는 3가지 주제의 5분 35초 분량으로, 1994년 5월 12(현지시간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 및 질의응답 영상이다당시 한반도 전쟁을 막은 카터의 방북이 1994년 6월 15일에 이뤄졌다는 점도 6.15 남북공동선언과의 연관성 속에서 흥미로운 지점이다이 사료는 북핵문제 해법 구상에 중요한 의미가 있어 현시점에서도 현실적인 함의가 크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1차 북핵위기가 발생했다그 뒤 북한국제원자력기구(IAEA), 미국 사이의 협상이 이어졌지만 근본적인 타결에 이르지 못하고 1994년 봄부터 전쟁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94년 3월 북한의 서울불바다 발언 및 북핵문제의 유엔 안보리 회부, 4월 북한의 핵 활동 재개 선언, 5월 북한의 핵 연료봉 교체 시작 등 강대강 대결이 이어지면서 한반도 전쟁위기가 급속도로 고조됐다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의 협상을 통한 해결을 원했지만 까다로운 상대인 북한에 대한 외교적 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상황이 악화되자 결국 영변 핵시설을 정밀타격해 제거하는 군사적 조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그러면서 당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가 조성됐다.

 

1992년 12월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아태평화재단을 창설해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김대중은 1993년 1차 북핵위기가 발생하자 북한의 의도는 미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해 체제를 보장받고 경제난을 해소하는 데 있다고 진단하며 두 가지 방향의 해법을 제시했다먼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상호 신뢰가 없기 때문에 양측의 관심사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합의할 것그다음으로 1인 독재국가인 북한 체제의 성격을 고려할 때 실무적인 협상을 진행함과 동시에 최고지도자 사이의 협상이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제시했다김대중은 당시 이러한 입장을 국내외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한반도 전쟁위기가 심화되자 1994년 5월 12(미국 시간미국의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카드를 제안했다당시 카터 방북카드에 대해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추진했고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4년 6월 15일 방북한 카터는 6월 16일 김일성과 회담해 김대중이 제안한 일괄타결 방식의 해법을 제시했고 김일성의 동의를 이끌어내면서 전쟁위기가 해소될 수 있었다그리고 카터-김일성 회담으로 협상의 계기를 마련한 북한과 미국은 1994년 10월 합의문에 서명(제네바 합의)해 전쟁위기로까지 비화된 1차 북핵위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됐다.


제네바 합의의 틀 속에서 북핵문제가 관리되던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면서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2000년 하반기에는 최초의 북미정상회담과 북미관계 정상화 직전에까지 이르게 됐다네오콘의 지지를 받은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200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2002년 말 소위 고농축우라늄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제네바 합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이번에 공개한 자료는 동영상을 통해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조성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해결에 있어 김대중의 역할과 기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도 현실적인 함의가 있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김대중은 북한체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북한 최고지도자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실무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최고지도자와의 톱다운 방식을 병행할 것과 북한을 개혁 개방의 길로 이끄는 것이 북핵문제 해결의 근본적 방안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이 같은 방식은 1994년 전쟁위기 해소와 1998~2000년 남북관계 개선북미관계 진전 등에서 유효한 해법이었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200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부시 행정부로 교체되면서 다시 좌절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접근전략이라는 점에서 현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부시 행정부는 네오콘의 영향으로 북한에 대한 강압적인 대응으로 일관했고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무관심 전략으로 대응했으며 트럼프 행정부는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 2차 북핵위기가 악화되는 것을 막았지만 외교적 수사와 제스처가 화려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갖춘 진지한 협상을 진행하지 않아 결국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현 상태에 이르게 됐다.

 

이런 점을 볼 때 김대중-클린턴 시기의 대북 접근이 가장 현실적으로 성공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이것은 김대중이 집권하기 전인 1994년에도 확인된다북한이 사실상 핵 무장을 했다는 점에서 김대중-클린턴 시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지적이 제기되지만 실무협상과 톱다운 방식의 병행과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이끄는 것’ 등의 2가지 접근 전략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접근 기조와 전략이라는 점에서 1994년 당시 김대중의 제안은 현시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붙임 1. 동영상 자료 3.

2. 녹취문 1(보도자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