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5. 19.]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이 바이든에게 보낸 편지 공개 2022.05.19
-
신촌 홍보팀 첨부파일( 3 ) (20220519)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이 바이든에게 보낸 편지 공개.hwp 공개 사료 페이지_1.jpg 공개 사료 페이지_2.jpg CLOSE TOOLTIP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이 바이든에게 보낸 편지 공개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한석희)은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1987년 8월 28일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대중이 바이든 미국 상원의원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한다.
1987년 8월 25일 바이든 상원의원의 보좌관인 엘리자베스 셔우드(Elizabeth D. Sherwood)가 동교동 김대중 자택을 방문했다. 당시 대화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민주화 과정이 시작된 한국 정세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김대중은 바이든 상원의원에게 셔우드 보좌관 방문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한국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 공개한 사료는 이 편지로, 총 2페이지 분량에 상당히 많은 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지에서 김대중은 바이든 상원의원에게 한국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국에서 군의 정치개입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것이 민주화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미국이 알아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은 한국 민주화가 확고하게 이뤄질 때까지 관심을 갖고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 망명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국익적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화가 미국과 한국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었다.
이번에 공개한 사료는 3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바이든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 김대중을 알게 된 이후 한국 민주화를 위한 의원외교활동을 활발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이든은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1982.12.23.~1985.2.6.) 때부터 친분을 쌓기 시작했으며, 1984년경부터 한국 민주화, 한미관계 등에 관한 상호 이해를 넓혀 나갔다. 바이든이 한국 민주화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김대중이 귀국한 이후 김대중의 대미 창구 역할을 했던 한국인권문제연구소(1983년 김대중이 미국 망명 시기에 설립)는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막냇동생) 상원의원, 바이든 상원의원 등 김대중과 인연이 있는 유력 정치인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그래서 미국 의회가 당시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레이건 행정부를 견제해 한국의 민주화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려고 한 것이다.
김대중의 이러한 구상은 실제 효과를 거뒀으며 바이든 상원의원은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소장 자료에서도 2건(2021년 1월 19일 공개)이 확인된다. 바이든 상원의원은 1986년 2월 20일 동료 상원의원 7명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서명운동에 대한 탄압에 항의했다. 그리고 1987년 11월 20일 동료 상원의원 30명과 함께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양심수 석방 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레이건 행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둘째, 한국 민주화 운동 과정에 있어 민간외교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공개한 편지를 보면 김대중은 바이든 상원의원에게 조지 슐츠 국무장관이 역할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1987년 11월 20일 바이든을 포함한 미국 상원의원들이 조지 슐츠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다. 물론 이 편지 작성 및 발송에 있어 김대중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일정 정도 인과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사료를 통해 김대중이 민주화를 위한 민간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이 편지를 통해 1987년 6.29 선언의 대외적인 효과에 대해 우려한 김대중의 인식을 알 수 있다. 6.29 선언 이후 한국 민주화 진전에 대한 낙관론이 나오고 심지어 한국의 민주화가 6.29 선언을 한 노태우의 결단에 의해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미국에서 이와 같은 견해가 상당히 팽배했었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 정권의 친위 쿠데타를 막아서 대규모 유혈사태 없이 한국 민주화 과정이 진행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이와 같은 점을 우려하면서 6.29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군의 정치개입 문제 등 구조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김대중은 6.29 이후 형성된 낙관론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다.
붙임 1. 공개 사료 사진 2장.
2. 공개 사료 전문 1부(보도자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