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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개

보도자료

[2022. 4. 21.]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한승헌 변호사 활동 관련 사료 공개 2022.04.21

연세대 김대중도서관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한승헌 변호사 활동 관련 사료 공개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한석희)은 4월 20일 별세한 한승헌 변호사 관련 사료를 공개한다한승헌 변호사는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서 사회적으로 존경받았으며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오랜 기간 민주화 투쟁을 함께해 온 민주화운동가이기도 했다특히 한승헌 변호사는 1993년 9월 10일 결성된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의 공동위원장을 맡아 양심적인 일본 측 인사들과 함께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날 공개한 사료는 한승헌 변호사가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 4장이다1993년 9월 15일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 측 진상조사위원회의 덴 히데오 참의원 방한 사진1993년 11월 24일 한승헌 변호사의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소견서’ 발표 사진1993년 12월 3일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과 한·일 양국 정부의 책임을 주제로 열린 한일 공동 심포지엄 사진1994년 3월 7일 김대중 납치사건 해결을 위한 한일 양측 대표들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사회당 당수(1994년 6월 일본 총리가 됨)를 만났을 때의 사진이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한일 관계에도 큰 영향을 줬다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경우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그 결과 양국 정부는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피해 복구 등의 조치를 취하는 대신 소위 정치결착을 통해 이 사건을 봉합해 버렸다이에 대한 반발은 양국 모두에서 이뤄졌다다만한국에서는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이 사건에 대한 공론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그리고 김대중이 야당의 리더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988년부터 1992년까지도 비슷했다이때는 전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사건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이 야당의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그래서 한국에서는 한승헌 변호사가 공동위원장을 맡은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1993년 9월 결성된 이후부터 이 사건에 대한 민간 차원의 조사가 본격화됐다.

 

민간 차원의 조사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근본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매우 중대한 성과를 냈다한일 양국에서 관련 회의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잊혀 가던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 공론화에 성공했고그 결과 추가 자료 수집 등이 가능해졌다이를 통해 1995년 9월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이라는 연구자료집이 발간될 수 있었다이 책에는 그동안 수집한 사건 관련 문헌사진증언 등 각종 자료가 총망라돼 있어 납치사건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이와 같이 한승헌 변호사가 주도한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은 김대중 납치사건의 의미와 역사적 성격을 밝히고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붙임 사진 4.

 

(사료 설명)

사진 1

- 1993년 9월 15

-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 측 진상조사위원회의 덴 히데오 참의원이 방한했을 때의 사진

- 우측 세 번째가 김대중김대중 우측에 이문영 교수김대중 좌측 첫 번째 덴 히데오 참의원김대중 좌측 두 번째 한승헌 변호사

 

사진 2

- 1993년 11월 24

-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소견서’ 발표할 때의 모습

- 서서 발표하는 인물이 한승헌 변호사

 

사진 3

- 1993년 12월 3

- 한일 공동 심포지엄(주제김대중 선생 납치사건과 한·일 양국 정부의 책임때의 사진

- 첫 번째 줄 정중앙에 한승헌 변호사한승헌 변호사 바로 뒤에 이해동 목사좌측에서 두 번째 이문영 교수우측 첫 번째 줄에서 세 번째 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부인), 우측 첫 번째 줄에서 네 번째 이우정 교수우측 첫 번째 줄에서 다섯 번째 여성인권운동가 이태영 변호사

 

사진 4

- 1994년 3월 7

- 김대중 납치사건 해결을 위한 한일 양측 대표들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사회당 당수(1994년 6월에 일본 총리가 됨)를 만났을 때의 사진

- 가운데가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당수좌측에 한승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