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6-07-03

푸른 눈의 순천 촌놈이 들려 주는 한국사랑 이야기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한국에서 태어나 영어보다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를 먼저 배운 한국인?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인? 인요한(John Linton) 국제진료센터 소장, 그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내 정체성은 '전라도 사람'"이란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전남 순천을 '지구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푸른 눈의 전라도 토박이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파란 눈, 갈색 머리칼, 겉모습은 서양인이지만 순정과 의리를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영락없는 전라도 사내다. 인 소장은 최근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웬만한 전라도 사람보다 더 징한 '전라도 사람 인요한'으로 살게 된 사연들과 111년 동안 이어가고 있는 린튼 가의 한국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순천 촌놈이 이렇게 좋은 연세대학교 나와서 의사까지 됐으니 성공했죠"라며 연세인이라는 사실이 큰 기쁨이라는 인요한 소장. 한국사람들에게 또한 모교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인요한 소장을 찾아 그의 진한 한국사랑에 대해 들어 봤다. 111년, 4대를 이은 한국사랑 린튼 가(家) 1895년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 땅을 밟은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 목사가 인요한 소장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22세 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의료 및 교육 선교활동을 한 할아버지 인돈(윌리엄 린튼) 선교사, 그리고 군산서 태어나 전남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다 1984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인휴(휴 린튼). 인요한 박사는 4대를 이은 한국 기독교 선교 가문 린튼 가의 아들이다. 린튼 가와 우리대학교는 너무도 깊은 인연이 있다. 우리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언더우드 박사가 1891년 미국에서 조선에서의 선교에 대해 순회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에 감동을 받은 젊은이들이 조선으로 파송될 선교사직을 자원했고, 1892년 11월 남장로교 출신의 7인의 선발대가 충청도 남부지역과 전라도, 제주도에서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895년 4월 유진 벨 목사 부부를 포함한 선교사들이 추가로 파송된다. 그렇게 111년에 걸쳐 린튼 가와 한국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 인 소장은 책에서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지구의 중심은 순천인 줄 알았고, '우주의 중심' 역시 순천이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순천은 지금도 내 마음의 중심이다"라고 쓰고 있다.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순천의 들에서 참외서리, 수박서리를 하며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배웠고, 순박한 이웃을 통해 한국의 정을 익혔다. 그는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맞은 1980년 5.18 광주항쟁 때는 전남 도청에서 시민군의 외신기자 회견을 통역하며 한국의 아픔을 배웠다. 이 일로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추방 경고를 받기도 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한국의 응급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하고 보급하며 한국사랑을 실천했다. 또한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웃들과 고향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그것도 모자라 북한을 17차례 방문해 결핵으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의 동포를 돕는 일에도 앞장 서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노력이 한국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연세가 세계 선교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인요한 소장은 북한에서 가난하지만 순박한 1960년대 '고향'의 모습을 본다고 한다. 그는 "아직도 사람 사이의 정이 흐르는 북한의 순박함과 끈끈함이 좋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삶의 원형을 찾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북한에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샤워를 마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서울에 돌아와 수도꼭지만 돌리면 온수, 냉수가 콸콸 나오는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해 눈물이 쏟아졌다"며 "남을 돕는 것은 동시에 나를 돕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남을 도우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 속에 꿈틀거리는 열정이 내 몸을 북으로 향하게 하는 이유는 그곳이 낯설고 편치 않으며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가르침인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이 나의 고향인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게는 타향인 바깥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을 의사로 만들어 준 모교에 빚을 갚는 방법도 바깥 세상을 돕는 데서 찾고 있다. "50년 전에는 세브란스병원에서 무상 치료하는 환자의 비율이 절반 가량이나 됐다고 한다. 옛날처럼 하지는 못하더라도 다만 전체 예산의 5%만이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모교를 좀더 설득해서 북한, 몽골, 아프리카 등 세계 선교의 폭을 넓히는 것이 내가 연세에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대학교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교에 나서 주기를 바랐다. 운동권이여, 그대들은 순수한가? 후배 연세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인요한 소장은 운동권 학생들을 향해 조심스레 충고 한마디를 했다. "나 역시 1980년 5월 광주 그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 시대가 달라졌고 민주화됐다. 80년대 당시 운동을 하던 분들은 순수했다. 지금 운동권 학생들이 80년대 그분들처럼 순수한가, 행동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깊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부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기 바란다. 또한 개혁은 좋지만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파괴적이고 소모적으로 해야 하는가, 좀더 건설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가 묻고 싶다"며 따끔한 소리를 했다. 전라도가 가르쳐 준 순정과 의리를 지키리라 인 소장은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그 눈부신 변화 속에 우리는 99%를 얻고 그 대신 1%를 잃었다. 그 1%가 바로 인간성, 공동체 문화, 이웃이 가족이라는 정서, 바로 정(情)이다"라고 아쉬워했다. 훗날 생을 마감할 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주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는 "시골 촌놈처럼 살았고, 촌놈처럼 죽었다. 전라도가 가르쳐준 순정과 의리를 일생 동안 잃지 않고 살았다"라고 기억되길 바란다며 '순정'과 '의리'라는 말로 한국인의 정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마치 연어가 고향을 떠나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고향을 찾아오듯이 한국인도 우리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며 한국인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그에게서 한국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vol. 429
웹진 PDF 다운로드

연세소식 신청방법

아래 신청서를 작성 후 news@yonsei.ac.kr로 보내주세요
신청서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