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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관 탐방] 천문학을 개척한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8-01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 우남(羽南) 이원철(李源喆, 1869∼1963)은 '원철성(원철별)' 연구 등 천문학 연구를 통해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었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천문학 교육에 힘썼다. 해방이후 중앙관상대 초대 대장으로 16년 동안 재직하면서 기상인력을 키우고 관련된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우리나라 천문학과 기상학 분야를 개척해 과학 발전과 과학교육의 기초를 닦은 한국 과학계의 큰 어른이다.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보여 주는 자랑스러운 존재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선린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연희전문학교 1회 졸업생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그의 스승의 모교인 미국 앨비온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2년 가을학기에 4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모두 A학점을 받으며 1학기만에 졸업을 했다. 그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스승 베커가 재직 중인 미시건 주립 대학의 대학원에 들어간 이원철은 '독수리자리 애타성의 대기운동'이라는 논문으로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된다(1926년). 이원철은 학위를 마치고 모교인 연희전문에서 12년간 교수로 재직한다. 미국유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30세에 연희전문의 교수가 된 '천재' 이원철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민중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보여 주는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제자 양성에 혼혈의 힘을 다 쏟으면서도 서울 YMCA에서 정기적인 강연을 통해 대중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일제강점기였던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에서 진행했던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연구 대신 교육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원철 박사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고등교육 수준에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로서 연희전문학교의 자랑거리였다. 섬김의 리더, 전 재산 사회에 환원하다 해방이 되자 이원철은 관상대(현 기상청의 전신)를 복구하여 운영하는 일에 매진했다. 중앙관상대 초대 대장으로 15년을 넘게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과 관련된 인력을 키우고 제반 제도를 확립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우리나라 기상학과 천문학, 양 분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또 인하공과대학 설립 당시 우리나라 과학 교육의 최고봉으로 초대 학장을 맡게 되어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관상대 관장, 인하공과대학 학장, 우리대학교 재단 이사장 등 지속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맡으면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또한 이원철 박사는 자신의 전 재산(갈월동 가옥 및 금곡리 임야 등 3만6천여 평)을 YMCA에 기부하여 마지막까지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1986년 서울 논현동에 개관한 YMCA 강남지회 건물의 강당은 우남 이원철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우남홀로 명명되었다.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인 이원철 박사의 과학교육에 대한 헌신과 열정은 현재 우리대학교에서 충실히 이어지고 있다. 그가 직접 일구었던 천문학 분야에서 우리대학교는 국내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비 리그의 세계적인 대학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학문적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vol.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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