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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에비슨 O. R. Avison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5-18

- 세브란스 의학전문과 연희전문의 설립, 발전 선도 (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 채플시간의 애비슨 우리대학교의 모태가 된 광혜원(제중원)과 경신학교 대학부(조선기독교대학)를 세운 선교사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알렌과 언더우드라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닦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캐나다의 선교사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이다. 에비슨은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 연희전문의 건설과 발전에 혼신을 다해 오늘날의 우리대학교가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캐나다에서 의과대학 및 약학대학의 교수이자 성공한 개업의라는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오로지 소명의식만으로 미지의 선교지 한국에 왔다. 구한말 34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와서 76세의 노인이 될 때까지 42년여를 우리나라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진정한 한국의 친구이며 영원한 연세인이다. 그가 있었기에 또 그의 열정을 다한 헌신이 있었기에 역사적으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도 이 민족에 희망의 등불로서 연세를 반석 위에 세우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가난한 직공의 아들, 의사로 성장하다 에비슨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의 웨스트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6세가 되던 1866년, 이민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온타리오의 브래드포드로 이주했고, 9살이 되던 해에는 토론토 동쪽 알몬트 지방으로 이사했다. 알몬트에서 공립학교에 다니던 에비슨은 학업에 싫증이 나서 잠시 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젊은이들 중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어 에비슨은 이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했다. 2년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복교한 그는 학교에서 계속 공부하던 급우들보다도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고 1등으로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알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에비슨은 인접 사범학교에 들어가 초등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자격을 얻었다. 그리고는 스미스 폴스 근처 학교에서 1878년부터 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가 약학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스미스 폴스의 약방에서 3년 정도를 수련한 에비슨은 24세가 되던 1884년 봄, 토론토 약학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채 일년이 되지 않아서 약사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여 약사면허를 가지게 되었다. 또 실력을 인정받아 약학대학의 식물학 교수로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약학대학의 교장이었던 셔틀워드(E. B. Shuttleworth)의 추천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한 지 3년 만인 1887년에 의학박사가 되어 약학대학과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는 한편, 병원을 개업하고 시장 가족의 주치의가 될 만큼 의사로서의 실력을 쌓아갔다. 에비슨은 강의와 진료로 바쁜 와중에도 기독청년회와 관계를 유지했고, 중앙 기독청년회의 의료담당자가 되었다. 또 감리교회 평의회의원이었으며, 동부지역의 도시 선교부에 속한 소년 금주단의 지도자로 일하면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언더우드 목사와 운명적 만남 - 한국 선교 결심 에비슨이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있던 1892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언더우드 (H. G. Underwood)가 뉴욕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에비슨은 언더우드를 토론토로 초청했고 이는 의과대학생들에게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언더우드 목사의 방문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에비슨 부부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고, 에비슨이 한국행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언더우드 박사는 에비슨에게 한국에서의 선교를 제안했다. 에비슨에게는 좋은 기회였으므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가 다니던 감리교회에서는 해외 선교 사업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적을 장로교로 바꾸면서까지 한국행을 추진하였다. 당시 에비슨은 세 자녀가 있었으며 부인 제니(Jenie)는 임신 중이었다. 특히 셋째 고든(Gorden Wilberforce)은 귓병과 폐렴의 합병증으로 몹시 허약해져 있어서 한국행이 무리라고 주변 친지들이 만류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든이 죽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뜻이라며 가족과 함께 1893년 봄 캐나다를 떠났다. 에비슨은 뱅쿠버에서 배를 타고 요코하마에 도착해 한국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6주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에비슨은 부인의 출산이 걱정되어 부산행 배 위에 몸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넌다. 에비슨 가족은 1893년 7월말 부산항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1주일 후 넷째 더글러스(Douglas Bray)가 태어났다. 이들 가족은 8월말이 되어서야 서울에 갈 수 있었다. 제중원 운영권 인수 에비슨은 1893년 11월 1일부터 제중원의 의사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중원의 상황, 또 의사 활동의 제반 조건은 여러 가지로 열악했다. 환자를 위한 진찰실, 약방, 병실, 치료실 등이 부족했고 환자들도 많이 오지 않았다. 에비슨은 환자의 신뢰를 다시 얻고자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여 열심히 진료에 임하였다. 에비슨이 치료한 백정 박성춘은 왕진을 마다하지 않은 에비슨에게 감복하여 착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훗날 그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에게 의학을 배워 1908년 세브란스가 배출한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개혁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정부에서는 제중원을 관리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에 에비슨은 강하게 대처하였다. 뉴욕 선교본부에 제중원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했고 이는 알렌을 통해 '제중원 의사 자퇴의 건'이라는 공문으로 외무대신 서리 김학진에게 전해졌다. 에비슨은 이 문서에서 "필요한 외국인 조수를 확보할 것과 전적으로 위탁받은 상황에서 병원을 운영함에 있어 그의 시간과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이다"라는 운영방침을 건의했다. 1894년 정부는 에비슨의 의견을 수용했고 미북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제중원을 운영하게 됐다. 이로써 에비슨은 실질적으로 제중원의 운영권 일체를 인수하게 됐으며 선교 활동을 본격화 할 수 있었다. 세브란스 병원 설립 1899년 3월 에비슨은 안식년으로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는 이 기간에도 한국에 현대식 병원을 지을 궁리를 했다. 그는 먼저 그의 건축가 친구 고든(H. B. Gordon)을 찾아가 병원 설계를 부탁하고 40병상 규모의 병원 설계도면을 기증받았다. 고든의 호의를 시작으로 에비슨은 본격적으로 병원 설립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다. 1900년 4월말 카네기홀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한 에비슨은 '선교의 우의'를 주제로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은 한국에서의 병원 설립을 현실화 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에비슨의 연설에 감동을 받은 클리브랜드의 강철회사 사장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가 건축비로 1만 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에비슨은 이후 세브란스가 증액해서 보내 준 5천 달러를 병원 건립기금에 더하여 1902년 8월 초에 본격적으로 병원 건물을 짓기 시작해 1904년 9월 23일 완공, 같은 해 11월 16일 성대한 개원식을 거행했다. 이 때 거액을 기부한 세브란스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병원의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명명했다. 현대식 의학 교육의 기틀 마련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설립 새로 지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에비슨은 유망한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과서나 용어는 자신이 만든 것을 사용했다. 꾸준히 의학 교육의 토대를 마련해 가던 그는 7년제 의학교육 과정과 3년제 약학교육 교과과정을 마련하여 체계적인 의학 교육을 할 수 있는 틀을 갖추어 갔다. 마침내 1908년, 에비슨은 세브란스에서 7명의 젊은 의사를 배출하게 됐다. 1회 졸업생을 낸 뒤 1909년 7월에는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로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고, 1911년에는 2회 졸업생을 내보냈다. 그리고 1913년에는 3회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한국의 형편 때문에 발목이 잡힌 학교의 발전을 위해 의료 선교를 하고 있는 각파 선교부에서 의학 교육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 연합체제로 인해 학교명도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를 거쳐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됐다. 세브란스 의학전문과 연희전문 교장 겸직 경신학교 대학부 교장 언더우드가 1916년 세상을 떠나자 부교장이었던 에비슨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장과 의학교의 교장, 경신학교 대학부의 교장이라는 삼중의 중책을 맡게 됐다. 언더우드 박사의 유업을 계승한 에비슨은 1917년 총독부로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정식인가를 받고, 연희전문이 대학의 면모를 갖춰 가는 일에 전념했다. 언더우드의 형(John T. Underwood)에게 받은 기부금으로 현재의 신촌 지역에 대지를 마련하고 교사를 건축하는 한편, 교육 과정 체제를 갖추고 유능한 인물들을 발탁해 연희전문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에비슨은 항상 한국 사람들의 교육은 한국인이 해야 한다는 교육 방침을 세우고 있었고, 1913년 이미 오긍선 박사를 초빙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 교수를 양성하고 있었다. 또 1921년에는 오긍선 박사에게 대외적인 업무를 일임했고 1932년에는 부교장으로 임명했다. 그 당시 미국인 교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선교부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에비슨의 조치는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에비슨은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유억겸을 1920년 교수로 초빙하고, 1922년에는 학감으로 임명하는 등 계속해서 유능한 한국인 교수를 초빙하고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교수를 양성했다. 명의, 훌륭한 교육자, 헌신적인 선교사, 영원한 연세인 1893년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건립하고 근대 의학 체계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42년간,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의 건설과 발전을 위하여 20년 동안 헌신한 에비슨은 1934년 오긍선에게 세브란스의학교의 교장 자리를 물려 주고 193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6년 플로리다 세인트피터서버그에서 별세했다. 에비슨은 철저히 한국인을 위하고, 한국인들에게 맞춘 교육 철학으로 일관하여 현재 우리대학교의 틀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훌륭한 의사였으며, 헌신적인 선교사였다. 또한 한국을 사랑한 위대한 교육자였다. 1966년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세운 그의 동상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동상은 1893년부터 1935년에 걸쳐 선교의사로서, 긴 안목을 지닌 지도자로서, 한국인의 친구로서, 또한 하느님의 종으로서 한국 국민에게 바쳐진 그 기념비적인 봉사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뜻으로 그의 제자들과 한국인 친구들에 의해 건립된 것임." 방사선 촬영실과 애비슨 선생 애비슨 동상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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