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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세브란스 Louis H. Severance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5-18

- 세브란스병원 건립을 지원한 진정한 자선가 (Louis Henry Severance ; 1838~1913) 세브란스라는 이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루이스 H. 세브란스 씨가 미지의 나라 한국에 의료선교를 위해 엄청난 금액을 기부함으로써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의 기반이 놓였고, 병원의 이름 역시 기부자를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세브란스라는 인물이건 세브란스라는 병원이건 우리나라에서 세브란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브란스 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미지의 나라 한국에 거금을 쾌척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대학교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여 2005년 5월 4일 세브란스 새병원이 개원했다. 병원 역사의 신기원이 열린 이 때 숨은 독지가 세브란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봄으로써 진정한 기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국을 통해 남긴 불멸의 이름 세브란스 우리에게 세브란스라고만 알려진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는 1800년대 후반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의 거부(巨富)였다. 그는 젊은 시절 현재 석유왕으로 유명한 록펠러(John D. Rockfeller)와 함께 펜실베이니아 주의 티투스빌에서 상업적 목적으로는 세계 최초로 석유채취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870년 1월 스탠다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를 설립하였다. 그 이후 자신이 쌓은 부를 하나님의 소명대로 기독교 교육과 해외선교를 위해 사용했다. 현재 뉴욕 한 복판에 록펠러 센터를 세우고 그 명성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록펠러 재단에 비해 세브란스의 기부는 많이 알려지고 있지 않다. 클리브랜드에 세브란스 홀이 있기는 하나 이는 우리가 아는 세브란스가 아닌 그의 아들 존 롱 세브란스를 위한 것이며, 세브란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흔적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은 우리대학교 의료원이 유일하다. 그나마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지은 세브란스병원도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의 기부를 기념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남몰래 기부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듯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사랑을 전했을까? 의사 가계의 일원이었던 세브란스 세브란스의 의료선교에 대한 열정은 1900년의 뉴욕대회에서 에비슨을 만나 조선에서의 의료선교를 위해 거액을 기부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그의 의료선교에 대한 애정은 가족적 배경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세브란스의 부계와 모계는 거의 모두 대대로 의사였으며 자선가였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역시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롱(David Long)은 클리블랜드 최초의 의사였다. 의사 집안의 일원으로서 세브란스 역시 병자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고 이것이 그의 의료선교에 대한 관심의 뿌리가 되었다. 일례로 뉴욕 장로교 선교본부의 서기인 스탠리 화이트 목사(Rev. Stanley White)로부터 어려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세브란스는 "제발 그것을 나에게 말하지 마시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 그와 똑같은 괴로움에 밤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 루이스 세브란스의 의료선교를 이해하는 또 다른 요소로는 그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들 수 있다. 클리브랜드에서 남쪽으로 50마일 떨어진 곳에 장로교 소속의 우스터 대학이 있다. 1899년 이 대학의 총장으로 당시 36세였던 젊은 루이스 에드워드 홀덴(Louis Edward Holden)이 취임했다. 그는 취임 후 거부인 세브란스에게 우스터 대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했고, 1902년 12월 우스터 대학에서 화재가 났을 때에 세브란스가 우스터 대학을 도운 일화는 세브란스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한없는 열정을 보여 준 좋은 예이다. 세브란스는 홀덴 총장에게 "걱정 마시오. 아마도 그 화재는 우스터 대학으로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 모르오. 당신이 새 계획을 준비하면 나를 곧장 찾아오시오"라고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세브란스는 우스터 대학을 위해 홀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99년 세브란스와 홀덴의 첫 번째 만남 이후로 두 사람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좋은 친구가 되었다. 홀덴 총장은 1900년 한국에 병원을 짓고 싶어하는 에비슨이 뉴욕 만국선교대회에서 '선교의 우의'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할 때 62세의 세브란스와 함께 자리를 같이한 사람이다. 강연이 끝난 후 세브란스는 홀덴 총장에게 내가 아래층에 내려가 저 젊은이에게 병원을 지을 돈을 주면 어떨까 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세브란스가 미지의 나라 한국에 병원 설립을 돕게 된 것이다. 종교적 헌신과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 세브란스는 해외선교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해외선교의 바탕은 깊은 기독교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브란스는 클리브랜드 장로교회의 장로였으며 죽을 때까지 봉사하였다. 세브란스는 1884년부터 클리블랜드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직했으며, 1897년에는 클리블랜드 두 곳에 교회 건물을 세우는 자금을 기부하는 등 죽을 때까지 교회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이 같은 종교적 헌신이 없었다면 그의 뉴욕 대회 참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브란스에게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어 준 인물은 그가 석유를 채취하던 시절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낸 사무엘 허칭스 목사(Rev. Samuel Hutchings)와 사라 아담스(Sarah Adams) 부인이다. 허칭스 목사는 세일론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1831년 귀국하여 클리블랜드 제일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며 해외선교를 돕는 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아담스 부인은 아프리카 줄루(Zulu) 선교에 1834년부터 15년간 봉사하다가 귀국하여 세브란스의 어머니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해외선교 경험이 세브란스의 신념과 맞닿아서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더 깊게 했으며 이로 인해 세브란스 의학교를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도움을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내 기쁨이 더 큽니다" - 1900년 5월 루이스 H. 세브란스가 O. R. 에비슨에게 잊을 수 없는 공헌, 세브란스병원 건립기금 기부 에비슨에게 1만 달러 지원을 약속한 세브란스는 1902년에 먼저 1만5천 달러를 서울에 보내왔다. 이 돈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다. 세브란스의 지원으로 에비슨은 현재의 서울역 앞 도동에 1904년 9월 신축 병원을 준공하고 이 병원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기념병원'이라 명명했다. 현재 서울역 앞 우리대학교 재단빌딩이 있는 자리가 세브란스 기념병원이 있던 자리다. 병원은 당시 최고의 수준으로 지어졌다. 일본 관헌이 최종적으로 준공검사하러 왔을 때 일본에도 이만한 병원이 없다고 했다고 미국 공사는 본국에 보고했다. 이 병원은 세브란스의 돈으로 지어졌지만 그는 1907년 한 번 다녀갔을 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회에 맡겼다. 기부를 기쁨으로 여기고 과시하지 않으려 했던 그의 스타일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만5천 달러를 기부한 이후에도 세브란스는 계속해서 돈을 보내왔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딸이 아버지를 이어 죽을 때까지 돈을 보내왔다. 1913년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아들로 하여금 병원을 계속 돕도록 유언을 남긴 것이다. 대를 잇는 세브란스의 휴머니티 세브란스는 두 번 결혼했으나 모두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네 자녀 중 2명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나머지 자녀인 존 롱과 엘리자베스에게도 자녀가 없기에 그의 직계 후손이 남아있지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직계 후손이 끊긴 후에도 세브란스가는 세브란스병원에 후원금을 보내오고 있다는 것이다. 1955년부터 2000년까지 80여만 달러에 이르는 후원금이 세브란스병원에 들어왔다. 미국 북장로교회 명의로 입금되었기에 그저 '미국 교회에서 좋은 일 하는가 보다'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이 익명의 후원자는 'J. L. 세브란스 기금'임이 최근에서야 밝혀졌다. 이 기금을 만든 주인공은 루이스 H. 세브란스의 아들인 존이었다. 존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유지를 받들었다. 1934년 자신이 죽기 전까지 12만4천5백 달러를 세브란스병원에 보냈다. 존은 또 유언을 남겼다. 세브란스 기금을 만들어 매년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하라고…… 한국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세브란스 일가의 100년이 넘게 지속된 후원은 우리 사회에 참다운 기부문화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잔잔한 교훈을 들려준다. 루이스 H. 세브란스의 기부로 설립된 세브란스병원은 2005년 5월 4일 지하 3층, 지상 21층에 연면적 5만1570평, 1004개 병상을 갖춘 초현대식 세브란스 새병원을 개원하고 동북아 중심 병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 자선가의 우리 민족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믿음이 세브란스라는 이름으로 꽃피어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받은 사랑을 그늘진 또 다른 곳에 나누어주는 세브란스의 사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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