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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H. N. 알렌 - 광혜원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5-02

연세소식은 우리대학교 창립 120주년을 맞아 구한말 어둡고 척박했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대학교를 세우고 발전시킨 몇몇 인물들에 대해 다시 살펴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한 알렌 박사와,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한 언더우드 박사를 소개한다. 우리대학교 의료원은 우리나라 근대 의학사의 뿌리이며 큰 줄기이다. 이제 창립 120주년을 맞은 우리 의료원은 세브란스 새병원 개원을 계기로 첨단 유비쿼터스 체계를 갖추고 세계 속에 우뚝 선 동북아 중심병원으로 재도약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1885년의 광혜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광혜원을 설립한 의사이자 선교사, 고종과 명성황후의 좋은 친구이자 미국의 외교관이었던 그리고 조선을 너무나 사랑했던 H. N.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알렌은 우리나라의 근대화, 기독교 선교, 광혜원 설립 등 여러 면에서 초창기 선구자로서 그 길을 외로이 닦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거목이라 할 수 있다. 알렌이 설립한 광혜원은 병원 사역을 조건으로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우리대학교의 창립 기반일 뿐만 아니라 한국 선교사의 출발이 되었다. 알렌은 1884년부터 1905년 미국 공사관의 철수로 우리나라를 떠날 때까지 21년여 간 수많은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알렌 알렌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초,중,고교를 마치고 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1년간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1883년 5월 17일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알렌이 의학공부를 하던 당시 미국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해외 선교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었다. 알렌 역시 졸업하기 직전, 북장로교 해외 선교 본부에 의료 선교사로 지원했다. 선교본부는 알렌이 의사면허를 취득하자마자 그를 중국 선교사로서 임명했다. 그리고 1883년 10월 알렌은 그의 아내 화니(Fannie)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1884년 첫 선교사 알렌 입국 그러나 알렌은 중국에서의 뚜렷한 역할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위 친지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884년 9월 20일 조선의 첫 개신교 선교사로 제물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 시기 대한제국은 선교 활동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알렌은 미국 공사에게 자신을 당시 최고위 외교관이었던 '공사관 의사'로 지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갑신정변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알렌 근대화에 들어서기 시작한 1880년대 중반 조선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어느 정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으나 외국 문물에 대한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러던 중 정치 상황에 새로운 전기가 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은 급진 개화파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개화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수구파 인사를 우정국 개설 축하 연회에서 제거한 사건이다.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알렌에게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했다. 당시 명성황후의 조카로 궁중의 신임을 받고 있던 민영익이 칼에 일곱 군데 이상 찔리는 중상을 당한 것이다. 한의사들이 그를 살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의 의술만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고, 결국 알렌이 민영익을 맡게 된 것이다. 알렌의 수술과 밤낮을 가리지 않은 치료 덕택에 민영익은 3개월 후 완전히 회복되었다. 민영익을 치료하고 난 후 서울에 남아 있는 것은 알렌에게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위험한 상황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알렌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영익의 치료를 맡는 것도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다. 치료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개화파에게 반감을 일으키게 했다. 게다가 만약 치료가 실패하게 된다면 수구파 역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의료 선교를 위해 이 땅에 왔다는 확신을 가진 알렌은 끝까지 서울에 머무르며 민영익을 치료해 완쾌시킴으로 그의 선교 계획을 유리한 조건으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세우다 민영익의 완쾌는 조선 사람들에게 서양 의술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 줬다. 알렌 역시 자신감을 얻고 해외 선교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의술을 전수할 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알렌은 1885년 1월 27일 병원 설립안을 미국 대리공사인 폴크와 민영익의 도움으로 제출했다. 그리고 이의 설립을 위해 조선 정부에서 깨끗한 장소에 커다란 건물을 제공하고 병원 유지에 필요한 경비 연간 300달러 정도만 보조해 준다면 자신을 포함한 의료진들은 무료로 일하겠다고 제안했다. 알렌은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병원 설립은 조선 정부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병원 건물은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처형된 홍영식의 집으로 정해졌다. 이 건물은 600∼1000달러의 경비를 들여 병원으로 개조했다. 병실은 침대 없이 온돌방을 그대로 사용했고 약 4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렇게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현대적 병원인 왕립 광혜원이 문을 열었다. 광혜원은 선교사인 알렌의 신념을 알려 주듯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주 후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이라는 의미가 드러나는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의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원하자마자 전국 방방곡곡의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거지나 나병환자에서 궁중의 양반들까지 가리지 않고 한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이는 당시 신분 차별과 남녀 차별이 존재하던 우리나라의 봉건적 관습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 시행 제중원이 크게 호응을 얻자 알렌은 의학 교육을 시작키로 한다. 알렌은 의학교 개교를 위한 비용을 조선 정부에 요청했다. 고종은 의학교를 세우고자 한 알렌의 요청을 수락하고 젊고 총명한 자들로 선발토록 했다. 1886년 3월 29일 경쟁시험을 통해 16명의 학생이 선발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의학교육 기관이 개교했다. 이 학교는 제중원 의학당으로 불렸다. 제중원 의학당은 강의실과 실습실, 교육에 필요한 기재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교수로는 알렌과 헤론 그리고 언더우드 등이 있었고, 1893년부터는 에비슨(O. R. Avison)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알렌은 미국 공사로 있는 동안에도 제중원의 의료사업을 도왔다. 1900년 에비슨이 세브란스(L.H, Severance)에게 기부받은 기금으로 병원 건립을 위한 부지를 매입할 때도 정부와 교섭하여 현재 서울역 앞 남대문 밖 언덕을 매입하는 것을 도와 제중원 세브란스로 거듭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외교관이며 조선의 친구였던 알렌 제중원의 성공적인 정착으로 알렌에 대한 조선정부의 신뢰는 두터워졌다. 알렌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어의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2품에 상당하는 직위인 계가선대부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1895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을 때도 알렌은 고종의 안전을 염려하여 몇 날 며칠을 고종의 거처를 떠나지 않고 그를 지키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5년 우리나라가 일본과 을사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미국 공관이 철수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알렌 역시 우리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조선에 대한 사랑은 끝나지 않았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을 사랑한 선구자 알렌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자 의료교육의 산실이며 연세의 출발점이 된 광혜원을 설립해 이 땅에 서양 의학이 뿌리내리게 했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대학교는 일제치하 고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과 학문 연구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20년 전 개화기 격랑을 함께 한 이방인 청년 의사 알렌의 열정과 헌신은 연세인과 한국인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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