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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H. G. 언더우드 - 한국 근대 교육과 선교의 초석을 놓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5-02

120년 동안 4대에 걸쳐 언더우드 일가가 한국의 교육·종교·사회 발전에 대한 기여는 한국 근대사에 길이 보존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것들이다. 특히 언더우드 1세인 H.G. 언더우드 박사(H.G. Underwood, 元杜尤; 1859∼1919)가 한국에 건너와 30년 동안 펼친 활동은 정말로 눈부심, 그 자체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개신교 선교사였으며, 교회를 세우고 성서를 번역하는 등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구한말 최고의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뛰어난 교육자였다.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하여 한국 최고의 명문 사학인 오늘날의 우리대학교 초석을 놓은 그의 공적은 단순히 고등교육의 발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세운 연세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은 위기 때마다 민족을 구해 내고 나라의 발전을 선도했다. 평생에 걸친 그의 모든 활동은 한국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더우드 박사가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에는 곳곳에서 '한국의 어둠, 속박, 우울로부터 한국의 빛, 꿈, 소망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기도가 들어있다. 한국에 온 첫 목사 선교사 H. G. 언더우드는 1859년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Elisabeth Grant Mari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다. 언더우드가 12살 되었을 때에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뉴 브런스윅(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83년 10월 언더우드는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미국 신학교 연맹 대회에 참가하였는데, 그때 그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는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만났는데, 그는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온, 그래서 일생동안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된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는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뉴욕대학교에서 문학석사 학위도 받았다. 그 해 11월에는 뉴 브런스윅 노회(The Classis of New Brunswick)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로 와 달라고 청빙하는 교회도 있었지만, 그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터여서 이를 거절하고 선교의 길을 모색하던 중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약혼녀에게 한국 선교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파혼을 선언하고 언더우드는 홀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그때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로 그의 나이 25세일 때였다. 경신학교, 새문안교회, 기독교서회 설립, YMCA 조직, 사전 편찬 언더우드는 한국에 들어온 뒤에 제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고, 이후에는 제중원 의학교에서 한국어로 물리 화학을 강의하였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 사업을 위하여 좋은 조건이 되었다. 그는 1885년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이 고아원은 후에 야소교 학당, 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887년 9월 벽지전도부터 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 교회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으며,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 한국 근대교육의 기초 마련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이룬 많은 사역들 중 교육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한국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았다는 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한다면 언더우드야말로 그가 선교하던 시대로부터 120년 후인 오늘 한국 근대화의 근간을 이룬 공로자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언더우드는 많은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서울에 대학을 설립하겠다고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초대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이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데 개교는 했으나 학교 부지도 마련하지 못했고 총독부로부터 정식 허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병 치료차 미국에 갔던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정식 인가를 보지 못하고 1916년 10월 쓰러져 영면하고 말았다.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한 에비슨은 언더우드가 이루지 못한 일을 맡아 처리했다. 총독부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아낸 것이다. 또한 1917년 9월 언더우드 박사의 형인 존 티 언더우드(John T. Underwood)의 기부금으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일대의 대지를 교지로 매입하게 되니 이 땅이 오늘날 연세대학교 자리가 되었다. 대를 이은 연세 사랑, 한국 사랑 1885년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순간부터 1916년 10월 신병으로 영면할 때까지 언더우드 박사는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 뿐만 아니라 120년 동안 대를 이어 한국과 연세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부친이 생명을 바쳐 일궈놓은 교육기관을 더욱 발전시켜 우리대학교를 한국의 대표적인 고등사학기관으로 발전시킨 2세 원한경 박사(H.H. Underdwood). 그는 일제하 암흑기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국에 폭로했으며 ‘한국의 근대교육’등을 통해 한국학 연구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에 자원입대해 1953년 휴전이 되기까지 판문점 회담에서 통역 팀을 주도한 3세 원일한 박사(H.G. Underwood). 그는 우리대학교가 오늘날의 규모로 발전할 수 있게 기초를 닦았으며, 자신의 몸 속에는 한국의 피가 흐른다며 영원한 한국 사랑을 실천했다. 한미 우호 증진과 연세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최근 주거지를 미국으로 옮겼지만 끝없는 연세 사랑을 약속한 4세 원한광 박사(H.H. Underwood)까지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 사랑과 연세 사랑은 대를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언더우드는 죽어서도 한국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 그 한국 땅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언더우드의 유해는 1999년 미국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고 언더우드 일가의 묘역도 조성돼 있다. 그는 분명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었다. 120년 전 그가 뿌린 씨앗은 이제 수만 배의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결실은 하나님의 기적이라 부를 만하며, 이 기초를 원두우 박사가 놓은 것이다.

 

vol.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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