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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연세 창립 120주년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5-01-01

연세가 세 번째 맞이한 을유년 동녘 하늘에 샛별이 빛나고 둥우리에 닭이 세 번째 홰를 치면서 새날을 부르면 을유년 새해가 밝아온다. 그리고 연세는 세 번째 을유년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의 기념법은 60년 주기 고종 21년 그러니까 1895년에 이르러 이제까지 써 오던 시헌력을 버리고 대신 그레고리역인 서양역법을 채택하여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고치고 연호도 건양建陽으로 고쳤다. 그리고 함께 실시한 단발령은 당장에 전국을 들끓게 했다. 단발령에 반대하는 무장세력까지 일어날 정도였으나 오늘에 보면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 단발령은 정착된 것 같다. 그러나 역법에 있어서만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아직도 책력에는 태음의 삭망주기에 따른 날의 차례가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설날’과 ‘한가위’가 민족 최대 명절로 지켜지고 있다. 아무래도 단발斷髮보다 개력改曆이 더 어려운 모양이다. 그리고 기년紀年하는 방식도 옛날 전통을 그대로 묵수하고 있어 ‘갑자 을축 병인 정묘’하는 식으로 생년生年을 적고 있는 이가 많다. 더욱이 주기週期를 셈하는 방식도 육십화갑자六十花甲子에 따라 계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을유년에 태어난 사람은 다시 을유년이 되는 예순 돌이 되면 ‘회갑’ ‘주갑’ 또는 ‘환갑’이라 하여 성대하게 잔치상을 차린다. 다시 태어나 생生을 새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색동옷에 돌상을 차린다. 그뿐 아니라 혼인한지 만 60년이 되면 ‘회혼’ 또는 ‘회근回巹’이라 하여 새로 초례청을 차리고 다시 혼례식을 올린다. 또 과거에 급제한지 예순 돌이 되면 같이 입격入格한 동방同榜들이 모여 금방金榜에 이름이 나붙던 날을 기념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다. 이로 보면 우리나라는 서양과 다르게 60주년을 새로 시작하는 것으로 크게 기념해 왔다. 아마도 태음의 삭망주기에 근거한 태음력과 태양이 한번 회귀하는 주기에 근거한 태양력이 서로 어긋나지만 만 60년이 되면 두 날짜가 서로 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어 2005년 5월 14일이 음력 4월 초이레이면 2065년 5월 17일에도 음력 4월 초이레가 된다. 그리고 1885년에도 그러했다. 첫 60주기 2005년 5월 14일이면 두 번째 맞는 주갑周甲, 즉 창립 120주년이 된다. 곧 두 번째 새롭게 시작하는 원년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주갑周甲이 되던 해는 1945년이었으나 그해는 단군이래 가장 다사다난하던 해였다. 그해 5월에는 일본제국이 오끼나와를 빼앗기고 본토까지 미군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되던 때였다. 그리고 학교는 이름마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뀌어진 채 일본인 손아귀 안에 있을 때이니 첫 번째 주갑周甲을 맞이한들 무슨 변통으로 주갑연周甲宴을 차릴 것이며, 학교의 운명이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처한 때라 무슨 겨를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식전을 거행하리오. 다만 그해는 일본인 손아귀에서 학교를 되찾는 것으로 자족할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연희’와 ‘세브란스’가 합동하기 전이라 60주년 기념식전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연희가 창립된 지 이제 30년이 되던 해였다. 연희 창립기념일; 4월 넷째 금요일 지금은 ‘연세 창립 기념일’을 매년 5월 둘째 토요일로 지켜 가고 있으나 원래 ‘연희 창립 기념일’은 해마다 4월 넷째 금요일로 정해서 1924년부터 기념하여 왔다. 왜 연희 창립일을 4월 넷째 금요일로 정했는지 그 까닭을 알 길이 없으나 연희가 종로 YMCA회관 2층의 방 여덟 개를 빌려 수업을 시작하기는 1915년 4월 13일에 개교식(opening exercises)을 거행하고, 1917년 4월 7일자로 당시 호소가와 총독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설치 인가서를 받았다. 그리고 1918년 4월말인 4월 27일에 신축이 끝난 치원관으로 옮겨 왔다. 지금은 공항으로 나가는 길섶 되어 연세의 앞길이 이제는 뉴욕과 파리로 통하는 길목이 되었다. 그러나 연희가 옮겨 올 무렵에는 서대문까지 겨우 길이 나있을 뿐 애오개에서 큰고개를 지나 창내까지 간신히 우마차가 다닐 정도였다. 그러하니 학교를 옮길 적에 학생들이 수레를 끌고, 깨어지기 쉬운 실험기구는 들고 오느라 무진 고생을 했다 하였다. 그래서인지 4월 말을 개교기념일로 정한 것 같다. 온갖 고생을 견뎌 가면서 ‘서대문 밖 고양군 연희면 창내’에 치원관을 시작으로 스팀슨관, 언더우드관, 아펜젤러관을 차례로 세우고 나자 어느 정도 학교의 틀이 잡혀 졌다. 그리고 1924년부터 ‘연희 창립일’을 4월 넷째 금요일로 제정하고 해마다 지켜왔다. 연희 창립 25주년 대개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새 날의 약진과 도약을 그려 보는 때가 새해 원단元旦이나 또는 태어난 날인 쉬신晬辰을 기해 웅비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항사恒事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연희도 쉬신晬辰인 ‘창립 기념일’을 기해 비상飛翔할 미래의 꿈을 그려본 적이 몇 번 있다. 연희에서 처음으로 지난날을 반추하면서 미래를 설계하기는 1940년, 즉 ‘창립 25주년’ 때였다. 지난날의 연희의 발자취를 정리하여 「모교창립 25주년기념」과 영문으로 「Twenty-Five Years of the Chosen Christian College;1915~1940」을 펴내는 한편 그때까지 아쉽게 여기던 도서관 독립 건물을 아펜젤러관 남쪽에, 제2 기숙사 건물은 스팀슨관 서북쪽 산기슭에 세우는 것에 이어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의 도약을 다짐하였다. 그중 특히 동문회가 주축이 되어 ‘4반세기 기념건물’로 ‘체육관’의 신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천여 동문들이 건립비 20만원을 목표로 모금에 들어가 상당한 액수까지 다다르게 되었으나 곧 총독부에서 연희전문이 ‘적산’이라고 빼앗아가는 통에 ‘25주년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꿈은 세월이 훨씬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연희 창립 40주년 그뒤 1955년에 ‘연희창립 4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좀더 알차게 기념식전을 지키기 위해 진작 몇 해 전부터 「연희대학교 연혁」 곧 ‘연희 40년사’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끝내 출판되지 못하고 그저 유시무종有始無終으로 끝나고 말았다. 완성된 원고와 관련 사진자료까지 첨부하여 총장실에 바쳤으나 지금은 종적이 묘연하다. 다만 초고 프린트본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1955년 4월 22일 넷째 금요일 오후 2시에 노천극장에서 연희창립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연희로서는 처음으로 유형기 한경직 엘리제후 유진오 최현배 김윤경 등 여섯 분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이어서 세 번째 건립하는 언더우드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그 다음 자리를 옮겨 새로 짓는 과학관(현 연희관) 정초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좀 맥 빠진 듯한 40주년이었다. 연세 창립 80주년 드디어 오래도록 숙원하던 ‘연희’와 ‘세브란스’가 한 학교로 합동이 되었다. 그리고 1965년이 오자 ‘연세’는 창립 8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창립 기념일도 4월 넷째주 금요일에서 5월 둘째주 토요일로 바뀌어 졌다. 그리하여 1965년 5월 8일 둘째 토요일에 ‘전진과 발전과 비약’을 다짐하는 창립 8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창립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기로 한 학생회관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로 보면 ‘학생회관’이 ‘연세 80주년 기념관’이라 하여도 큰 망발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4·19혁명 뒤부터 학교행정 책임자가 자주 체임되는 탓에 ‘연세 80주년’을 올곧게 준비하지 못한 듯 하다. 기념식이 지난 뒤에야 학교의 전 역량을 들여 연세대학교 역사를 정리하여 마침내 「연세대학교 80년사」를 완간하게 되었다. 연세의 역사가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 하겠다. 그러고 나서 조급히 치룬 ‘연세창립 80주년’ 기념을 후회나 하는 듯이 백주년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경관과 핀슨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도서관을 짓고, 용재관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겠다는 계획, 빌링스관 옆 산정에 정자를 짓겠다는 등등 지금으로 보면 빗나가 버린 꿈을 담았으나 언더우드관에 있는 문과대학을 옮기고 학교 행정기관을 모으겠다한 꿈만은 적중하였다. 연세 창립 백주년 마침내 ‘연세대학교 창립 백주년’이 도래했다. 1985년 5월 11일 “이 땅에 진리와 자유를 심어 온지 1백년”이 된 기념행사가 요란하게 펼쳐졌다. 박두진 작사, 박재열 작곡으로 “1백주년 기념가”도 지어지고, “백주년 상징마크”도 제정되고,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우표”도 발행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백주년기념관”도 높이 솟았다. 또 「연세대학교 백년사」도 4권으로 출간했다. 너무 현란타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연세 창립 120주년 이제 을유년 태양이 붉게 떠오르면 연세는 두 번째 주갑周甲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을유년으로는 세 번째 맞이하는 것이나 제대로 된 수연壽宴을 차리기는 처음이다. 그러한즉 하석상대下石上臺에 급급하지 말고 만세토록 후세에 드리울 전범典範은 만들지 못하더라도 과거의 성패成敗를 거울삼아 앞날에 나아갈 목표를 제대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야 네 번째 을유년을 맞이하는 후인들이 선인의 공적에 경복할 것이다.

글 - 김상기 (전 연세기록보존소장)
자료제공 - 연세기록보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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