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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윤동주 시비」-1968년 11월 2일 제막식-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11-01

1938년 4월 9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겨우 약관弱冠을 면한 나이로 아직 문단에 이렇다 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열매를 맺기 위한 봉오리 셋 -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들이 기숙사(현 핀슨관) 3층 꼭대기방에서 함께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셋이 하나같이 조고계操觚界에 뜻을 두고 연희동산을 소요逍遙하면서 시론詩論을 나누다가 나중에는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생활을 할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하숙방을 찾아가 문예를 논하면서 해를 지웠다 한다. 늘 친우는 달변인데 비해 윤동주는 언제나 말없이 듣기만 했다 한다. 이렇듯 과묵한 윤동주의 시작詩作활동은 연희 생활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후일 민족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윤동주는 연희에 와서 처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1938년이라면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더욱 예종 隸從의 길로 옭아맬 때로 민중들은 우리말은 고사하고 숨조차 저들의 허락없이 함부로 쉴 수 없을 때였다. 그러한 때에 연희캠퍼스 건물 곳곳에 태극이 새겨져 있고, 연희동산에는 무궁화가 만발한 것을 보게된 것이다. 그리고 첫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용정龍井으로 돌아가서 친아우 못지 않게 사랑하던 고향 후배 장덕순에게 연희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연희전문학교는 그 전통과 교수, 그리고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인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라는 것이다. 당시 만주땅에서는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했고, 도처에 우리 국기의 상징인 태극마크가 새겨져 있고, 일본 말을 쓰지 않고, 강의도 우리 말로 하는 「조선문학」도 있다는 등등 내 구미를 돋우는 유혹적인 이야기를 차분히, 그러나 힘주어서 들려 주었다" - 장덕순 <윤동주와 나>, 「나라사랑」 제23호, 1976년 6월 결국 장덕순도 윤동주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잍해 뒤인 1940년 봄에 고향 선배의 뒤를 따라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연희동산에서 무궁화를 처음 보았다는 이는 윤동주만 아니였다. 윤동주가 가장 존경하며 따르던 스승 이양하교수도 무궁화를 연희에서 처음 보았다 하였다. 우리 고향은 각박한 곳이 되어 원체 화초가 적지만 무궁화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말은 들었으나 실지로 본 것은 처음 서울에 살기 시작한 때였다. 서울 어디에서 첫 무궁화를 보았는가… 역시 연희전문 교정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떤 내 친구는 전라도 태생이 되어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를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나라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서울 와서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순간 감명은 이러했다. 게 무강나무 아닌가, 우리 시골 가면 집 울타리 하는 바루 그게 아닌가 - 이양하 제2수필집 「나무」, 민중서관, 1964년 실은 윤동주가 남달리 태극과 무궁화에 감동을 받은 까닭은 또 다른 데 있었다. 중국 길림성 용정현 명동마을에 있던 윤동주 생가 지붕 수막새 기와가 2002년 6월초에 연세대학교로 보내왔다. 그 생가는 1910년 무렵 지어진 기와집으로 문화혁명이 중국 대륙을 휘몰아칠 때 기와에 새겨진 문양 때문에 홍위병에게 무슨 빌미를 잡힐까 하여 그 흔적을 없앴으나 그나마 더 이상 집을 지탱할 수가 없어 1983년에 헐어버렸다 하였다. 그중에 요행히 몇장의 기와가 남아 있었던 것이 우여곡절 끝에 연변 TV제작진을 통해 기증받게 된 것이다. 기와에는 태극과 건곤감리 乾坤坎離 사괘에 무궁화와 십자가가 양각되어 있다. 그러하니 윤동주는 고향집 지붕을 쳐다보면서 밤마다 별을 헤기보다 날마다 만주땅에 없는 무강나무와 태극을 보면서 시심詩心을 길러 오다가 연희동산에 와서 그 시심을 영글게 하였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윤동주가 자라면서 바라보던 무궁화 문양이 연희에도 새겨져 있다. 언더우드관 뒤쪽 출입문 위 처마 높이 쯤에 열두 송이 무궁화가 새겨져 있는데 고향집 처마에 있던 무궁화와 너무나 흡사했다. 어쩌면 윤동주에게는 연희가 고향집과 같았을 것이다. 윤동주가 공부하던 연희전문 문과 강의시간에 지금도 우리를 숙연케 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보성전문 손진태교수가 동양사 담당 강사로 연희에 출강할 때 일이었다. 그때 같이 배우던 유영교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을 남겨 놓았다. "손진태교수께서 강의중 갑자기 큐리부인 이야기를 꺼내셨다. 큐리가 어렸을 때였다. 학교에서 몰래 폴란드 말을 배우다가 러시아 시학관이 오는 것을 눈치챘다. 학생들은 부랴부랴 교재를 책상 속에 감추고 러시아 교과서를 꺼내 놓았다. 시학관이 들어와서 러시아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보고 적이 만족하였다. 그러나 짓궂게도 시학관이 학생에게 질문을 하였다. 큐리는 제발 자기에게 지적하지 마소서 하고 하나님께 빌었으나 불행히도 큐리에게 지명이 떨어졌다. 너의 황제는 누구냐?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고 물었다. 큐리는 더듬거리는 러시아 말로 쯔아올시다. 러시아 국민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시학관은 무척 기뻐하면서 교실을 떠나자 그만 큐리와 학생과 선생이 모두 함께…하고 말끝을 맺지 못하신 채 손진태교수는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느껴 우셨다. 우리도 그만 모두 함께 흑흑 느껴 울고 말았다. - 유영 <민족 수난사는 연희의 연륜>, 「연세춘추」 제499호, 1968년 4월 29일 조선의 처지와 너무도 흡사한 폴란드 이야기라 듣는 이로 하여금 처연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윤동주의 눈물은 달이 넘도록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가 민족시인으로 우뚝 서게됨은 이런 연유 때문이라 하겠다. 1941년 12월 27일 토요일 오후 2시 40분에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이듬해 3월에 거행되어야 할 졸업식이 전시체제라는 핑계로 학년을 단축하여 이날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윤동주도 졸업하였다. 궂은 날씨 탓으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라고 윤치호 일기에 적혀 있다. 날씨만 암울한 것이 아니라 졸업생의 장래도 암울하기만 했다. 윤동주는 그동안 원고지에 써 두었던 시편을 70부만이라도 내려고 하였으나 끝내 한 줄도 출판하지 못했다. 때가 때인지라 일본 글이 아닌 우리 글로 낸다면 우선 총독부 도서과에서 출판을 허가할 리 만무했다. 마침내 암울하기만 한 조국을 떠나 일본으로 훌쩍 건너갔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스물아홉 되던 1945년 2월 일본국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만 남긴 채 숨졌다. 그리고 고종이자 지우知友였던 송몽규마저 같은 형무소에서 불귀의 혼이 되었다. 오매불망 바라던 시인으로서가 아니고 불령선인不逞鮮人의 굴레를 쓰고 숨이 졌다. 더도 덜도 말고 6개월만 더 견뎠으면 될 일을 … 해방이 되었다. 조국 강산은 다시 찾았으나 먼저 간 젊은 원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옛날 기숙사 같은 방에서 딩굴던 셋중 이제는 강처중 하나만 살아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경향신문사 기자로 있으면서 더욱 다행한 일은 당시 국내 시단의 시백詩伯으로 추앙받던 정지용시인이 주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처중의 주선으로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윤동주를 소개하는 정지용의 글과 함께 쉽게 씌어진 시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그야말로 윤동주가 읊은 시를 종자기種子期가 아닌 강처중만 알아 준 지음知音의 벗이라 하겠다. 그후 1948년 1월에 정음사 최영해 사장에 의해 온전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초간되었다. 최영해 사장은 최현배 교수의 아들로 일찍이 연희전문 재학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어 3·4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음사를 경여하면서 늘 문단의 온갖 일을 도맡아 해 왔다. 그리하여 시집 출판에 대한 윤동주의 소망은 사후 3년만에 최영해 선배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고 존경받는 시인이 되었다. 저항시인이라기 보다 국민적 시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국민적 시인을 배출해 낸 모교 연세에서 마침내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시비를 세우기로 계획했다. 최초의 시비 건립 계획은 1955년 2월 16일 그의 10주기를 맞이한 시우詩友와 동문들이 그의 애국심을 추모하는 한편 그의 시를 더욱 높이 빛내게 하기 위하여 추도식과 아울러 시비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한다. 특히 정음사의 최영해 동문(1939년 문과 졸업)은 시인의 미발표 산문을 종합한 윤동주전집을 출판해 주기로 되었는데 최동문은 출판뿐 아니라 시비 건립까지 사재를 희사하기로 되었다 한다. - 「연희춘추」 제37호, 1955년 2월 2일 그러나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때의 시비 건립계획이 계속 추진되지 못했다. 그러다 1962년에 이르러 연세문학회 주관으로 윤동주 시비 건립기금 모집에 대한 광고가 「연세춘추」(1962년 4월 9일)에 게재되었으나 그후 소식도 또 묘연해 졌다. 아마도 최초의 건립계획 이후 4·19혁명과 이어서 교내 사정이 분분해서 계획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것 같았다. 이후 문과대학 전형국 학장 때 이르러서야 윤동주시비 건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전말을 김윤경 교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학교에서 집에 오니 오늘 저녁 여섯시에 윤동주시비 건립준비위원회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 하였다. 전일에는 6일이라 하였기에 학교에 전화로 물었더니 지금 개회중이라 하기에 곧 갔으나 40분이 늦었다. 전형국 전 학장 때 교수회에서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전교생과 교직원, 동문, 일반 유지에 거두기로 하였다 했다. 학생처장 성내운씨, 전형국 전 학장은 상치되는 일로 못 나오고 조의설 교수, 현 문과대학 학장 손보기, 국문과 박영준 과장, 연세춘추 최기준 주간, 유족 대표로 그 아우 윤일주들이 모였다. 학생회가 주장이 되고 위원회는 지도위원으로 할 것과 학생의 출연은 50만원으로 하여 유족, 교직원, 동문 유지에서 10만원을 거두어 모두 60만원으로 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비석 세울 자리는 학생회관 앞으로 하자는 말이 있었으나 최기준군이 백양로에서 학교 뜰로 오르는 계단 중간 좌우편 장미 꽃밭이 가장 좋다는 의견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총장과 의논하여 정하기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 - 김윤경 일기/1967년 6월 5일 가장 큰 논란거리는 시비를 세울 자리였던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한때는 시비 건립 장소를 학생회관 내부로 잠정 결정되었다고 「연세춘추」 제469호(1967년 6월 12일)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옛날 윤동주 시인이 기거하던 기숙사 앞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시비 설계도는 건축가이자 동국대학 교수인 윤시인의 아우 윤일주씨 작품으로 채택하고 제막식은 학생의 날인 11월 3일로 확정하였다고 발표되었다.(「연세춘추」 제514호, 1968년 9월 23일) 그러나 그때까지 11월 3일이 일요일인지 미쳐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막식이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11월 2일로 고쳤다. 드디어 11월 2일 토요일 오전 11시, 많은 내외 귀빈과 유족 그리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동생 윤일주 교수에 의해 윤동주 시집 판권 기증 의식도 배풀어졌다. "총학생회는 지난 시비건립 모금에서 초과 달성된 95만 5천여 원중 공사비 64만원을 제한 30만 6천여 원을 고 윤동주 장학기금으로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유족측에서도 제막식 때 고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판권을 본 장학기금으로 기증한 바 있다" - 「연세춘추」 제520호, 1968년 11월 11일

글 - 김상기 (전 연세기록보존소장)
자료제공 - 연세기록보존소

 

vol.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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