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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연고전 Ⅰ - 추억의 연보전延普戰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9-16

해마다 이때 쯤이면 무악산 기슭에 단풍을 알리는 함성이 울려 퍼진다. 무악산 단풍은 「아카라카」 함성을 듣고 독수리의 땀 내음을 맡아야 물들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연고전」의 시작, 보다 정확히 「연보전延普戰」의 시원始原에 대해 몇 갈래 이론이 있다. 그러나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가 창립 이래 첫 맞대결이 이루어진 것은 1925년 5월 30일이며 경기종목은 「연식軟式 정구」였다. 연식 정구가 지금의 테니스와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로는 지금의 골프와 같이 좀 귀족적인 스포츠였던 것 같았다. 원래 예정은 5월 29일이였으나 큰 비가 내려 하루 연기한 5월 30일에 정동 경성일보사 코트에서 조선체육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전조선 정구대회」가 열렸다. 그 대회에서 처음으로 연희와 보성의 첫 대결이 이루어진 소식을 동아일보사에서는 이렇게 전해 준다. 먼저 경성 전문학교의 두 영웅인 연희전문학교 대 보성전문학교의 대전이 시작되야 서로 선전한 결과 보성전문에는 우퇴조優退組까지 남을 만치 보전이 쾌승하였으나 특히 연희전문의 대장조大將組 휘위 한맹석韓孟錫군은 과연 입신의 기入神之技가 있었으나 전위의 실책으로 천추의 한을 먹게 되었다.(동아일보, 1925년 5월 31일) 그리고 양교가 「만장의 박수소리 가운데 대회 서막전을 치르는」 광경을 사진으로도 전해 주고 있다. 이로 보면 「연보전」 시발始發이 1925년 5월 30일이 틀림없다 하겠다. 그리고 두 번째 대결은 1927년 축구경기에서였다. 그리고 대개 이때의 축구경기를 연보전의 시원始原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역대 축구경기 종합기록;1921˜1988」(연세축구 70년사, 연세 축구OB회, 1989년)에 나타난 기록에는 1927년 2월 1일 제2회 「조선 전문학교축구 연맹전」 결승전에서 2 대 0으로 격파하고, 이어서 4월 29일 제1회 「전조선 아식式축구대회」 준결승에서 4 대 1로 쾌승하였고, 마지막으로 11월 2일 조선체육회 주최 제8회 「전조선축구대회」 청년부 준결승에서 3 대 0으로 완승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연보전」하면 곧 「축구전」으로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이 축구전이 점점 과열되매 따라서 뜻하지 않게 「연보전」에 불상사가 일어났다. 「연보전」에 첫 불상사는 1931년 11월 「조선전문학교 축구연맹전」에서 일어났다. 이 불상사에 대해 전 연세 체육부장 이성구 동문은 이렇게 증언을 남겨 놓았다. 양교 실력이 거의 백중해진 1931년에 온 시민의 관심 속에 거행된 축구경기에서 급기야는 큰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선수 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보성전문 응원단이 운동장에 뛰어 들어가 싸움을 말리려던 연희전문 선배 동문들까지 무수히 폭행하자 그 기세에 눌린 연희전문 응원단은 그저 스탠드에 앉은 체 한 사람도 꼼짝하지 못하고 맞는 것을 보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경기에 이기면 매를 맞아야 하고 맞지 않으려면 경기에 져야만 하는 것이 어느덧 연희전문의 전통처럼 되고 말았다. 이 사건도 연희전문의 승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성구 「연고전 회고사」, 연세춘추 제702호, 1974년 9월 23일 이쯤 되자 사태가 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연희동문회보」 제1호(1932년 3월) <운동부 소식>란에 동문들의 결연한 의지를 밝힌 글이 실려 있다. 11월 중순 전문학교 축구연맹전 첫날 대 보성전문전에서 불행히 양교 선수 충돌이란 불상사 있어 우리 팀은 단연 「기권」하였다. 당시 상황은 이미 신문 지상에 상보詳報되었고 그 시비에 대하여는 이미 세상에 정평이 있으므로 이제 또 새삼스러이 재론할 필요가 없으나 우리는 스포츠에 그러한 불상사가 아직도 근절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우리 스포츠계에도 그러한 분쟁이 발생할 때 이에 대하여 공정한 심판을 내리고 이에 상응한 제재를 가하는 기관이 속히 일어나기를 간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가불 그와 같은 분쟁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학교나 팀과는 부득이 자위상 경기를 중지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원한경元漢慶 박사도 앞으로 어떠한 경기라도 보성전문과 맞붙는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겠다 선언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도 스포츠 정신을 「페어 플레이」에 두고 있는 그분으로서는 당연한 선언이라 하겠다. 그리고 최초의 연보전 농구경기는 1930년 9월 17일 중앙 기독교청년회(YMCA)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제2회 「전조선 전문학교 농구선수권대회」에서 맞붙게 되었다. 참가 학교는 연전과 보전 두 학교 뿐이었으나 대회에 쏠린 시민의 관심은 대단했다. 결과는 전통 농구 기술을 구사한 연희전문이 36 대 28로 보성전문을 누르고 우승했다.(조동표, 「극일의 횃불-연보전」,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년) 아이스하키의 경우 연희전문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1931년 11월에 창단하여 단장에 원한경, 감독 김영성金永成, 주장 김용구 등으로 진용을 짰으나(동아일보, 1931년 11월 18일) 「연보전」의 첫 대결은 훨씬 후에 이루어졌다. 1940년 1월에 첫 대전을 가져 9 : 0으로 압승하였다 했다.(<연고전 역정 반세기>, 「연세춘추」 제795호 1977년 9월 19일) 이렇듯 일제시대 「연고전」은 경기 종목을 나누어 산발적으로 대결이 이루어졌으나 야구대전은 없는 듯 했다. 연희전문에 야구부가 창단된 것은 1922년 최규남 선수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규남 박사(1926년 3월 수물과 졸업)는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까지 역임한 물리학 석학이기 전에 재학시절 야구선수(포수)로 더 유명했다. 이 최규남 선수에 의해 창단된 야구부는 곧 전성기를 맞이하여 1928년 6월 8일 제1회 경성의전과 정기 야구대전에서 당시 연희전문 축구 농구 야구의 만능 선수로 알려진 이영민 선수(1929년 3월 문과 졸업)가 1회 초, 2사 후 3번 타자로 등장하여 우리나라 최초 제1호 홈런(370Yd)을 날려 장안의 시민이 아니라 전조선의 눈을 의심케 하였다. 그때까지 꿈에서 조차 상상치 못하던 장외 홈런이었다. 이 홈런을 보고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할 생심生心을 낼 수 있으랴, 이로써 연고전 야구경기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일제 때 「연고전」의 백미는 축구전이었다. 그때는 「전조선 축구대회」와 「축구연맹전」 등이 봄 가을로 겨끔 내기로 열리고 연전가 보전이 단골로 오르니 「봄 게임」「가을 씨즌」으로 구별해 불렀다. 그 당시에는 봄가을 두 번밖에(지금은 게임 수가 너무 많다) 대전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준비와 결의가 대단했다. 1936년 연보전에서 4 : 4 동점이 되어 네 차례 연장전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결국 6 : 4로 쾌승하였을 때 원한경 교장을 비롯하여 전교생이 환호작약하던 기억이 새로우며, 또 가을 연보전에서 불의에 패전을 당하고 선수 일동이 삭발하고 일심동체로 분발하여 가을 씨즌에 통쾌하게 설욕한 적이 있다.(나의 학창 회고, 김성간, 「연세춘추」 제113호, 1957년 11월 12일) 「지금은 게임 수가 너무 많다」하는 뜻은 그때는 축구경기 뿐이었는데 지금의 연고전은 축구 외에 럭비 등 서너 가지가 있어 응원과 뒤풀이가 산만하다는 불만의 뜻이다. 그리고 지금은 초등학교 때부터 머리 모양을 자유로 하나 얼마 전까지 대학에 들어가야 비로소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그때부터 주위로부터 성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일제 때는 더 엄격했다. 그러한 때 삭발을 했다 하니 어지간히 속이 상하였던 모양이다. 그때 머리를 깍았던 이유영 동문(1938년 3월 상과 졸업)은 「입학하고 처음으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해서 아침 저녁 반지르르하게 손질하던 머리를 삭발할 때 눈물겨웠다」라고 회고하고 있다.(연희춘추 제48호, 1955년 6월 1일) 이 정도로 당시의 연보전 축구 열기가 대단했다. 그러던 연보전이 일제 말에 이르러 왜정 당국에서 일체 학교 체육을 금지 시키고 총검술로 대신하자 연보전도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첫 시합으로 1945년 12월 4일 두 학교 OB팀끼리 축구전이, 21일에는 농구전을 시작으로 맞대결하는 한편 1946년 1월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럭비전(0 : 0 무승부)을 치렀으나 그때까지도 산발적인 접전만 있었을 뿐 정기전으로 치르지는 못했다. 그러다 1946년 9월에 두 학교가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 승격한 다음 연희대학교 백낙준 총장이 국가 체육발전은 대학 체육발전에 기초한다는 뜻을 제창하여 그 당시 고려대학 현상윤 총장도 이에 동조하여 연희와 고려 그리고 서울대학까지 세 대학으로 연맹 조직을 추진하였으나 서울대학이 미적거리는 바람에 연희와 고려 두 대학의 정기전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생각지 않던 6·25 전쟁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파란과 곡절 끝에 1956년에 이르러서야 두 학교가 정식으로 공동 개최하기로 합의되었다. (「정기 연고전의 시작」은 다음 호에 계속)

 - 글 전 연세기록보존소장 김상기

 

vol.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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