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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9-01

58년만에 세워진 연세대학교 교문
- 1973년 9월 13일 정문 봉헌식 -

정문 봉헌식 및 도로포장 개통식이 지난 13일 오후 2시 박대선 총장과 홍윤명 부총장, 이천환 이사장 등 교내외 인사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양로 입구에서 크게 열렸다.
지난 해 7월 25일에 착공한 정문은 총공사비 2천8백3십만원을 들여 같은 해 12월 10일 준공을 보았고, 문과대학(현 본관 언더우드관)에서 총장 공관에 이르는 도로포장 공사는 6백8십만원의 예산으로 지난 7월 10일에 착공하여 8월 15일에 준공을 보아 이날 봉헌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계준 교목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 봉헌식에서 이천환 이사장은 봉헌사를 통해 “이 학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참된 진리와 자유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문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말하고, 김찬국 신과대학장은 축도에서 정문이 “자유를 지키는 수호문이요, 진리를 키워 나가는 개척문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기도했다.
(연세춘추 제671호, 1973년 9월 17일)
너무 간략했다. 그 교문이 서게 까지 60여 성상이 흐른 것에 비해 너무나 짧았다.



1957년 1월에 연희와 세브란스가 합동이 되고 그해 첫 창립 기념일에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 취임식이 끝난 뒤, 이어서 「연세대학교」 현판식을 거행하고 첫 현판을 스팀슨관 입구 왼쪽에 거는 사진이 남아 있다. 연희와 세브란스의 합동이라기 보다 가히 창업에 이은 즉조卽祚를 선포하는 듯한 「연세대학교 현판식」 장소가 「스팀슨관」 입구여서 좀 엉뚱한 듯 했다.

그러던 중 서너 해 전 천만 뜻밖이라 할 행운을 얻게 되었다. 한 서포書鋪에서 사진 한 장을 구할 수 있었다. 엽서 크기만한 옛날 사진이었다.
1928년경 사진으로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장 에비슨 박사 부처가 스팀슨관 입구 앞에 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오른 쪽, 그러니 스팀슨관 왼쪽 설주에 「연희전문학교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제야 연세대학교를 창설하면서 그 현판을 스팀슨관 설주에 걸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알게 하였다. 아직까지 교문이 없었던 소이로 「연희전문학교」와 「연세대학교」 현액을 학교 안 깊숙한 자리에 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상만사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는 모양이다. 사연 많던 「백양로」가 철로 굴길을 통해 「노고산로타리」와 직선으로 틀을 잡자 1968년에 이르러서야 연세대학교에서 「창립 개교이래 처음으로」 교문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연세춘추」 제496호(1968년 4월 8일)에 「교문 건립 추진」이라는 제목으로 저간의 사정을 전해 주고 있다.

총무처는 지난 1일 백양로 확장에 따른 공사 일환으로 금년내로 완성할 정문 건립에 있어 정문 설계도를 현상모집키로 결정 발표하였다.
창립 개교이래 처음 시도하게 되는 정문 건립이니 만큼 많은 연세인의 참여로 훌륭한 연세의 상징을 모색하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교문을 건립할 위치는 현재의 수위실이며 작성 요령은 투시도, 입면, 평면도 등이라 하였다. 총무처 관계자는 오는 20일로 마감일을 정했다고 밝히면서 학생과 동문 그리고 교직원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세인만을 대상으로 한 정문 설계도 현상모집이 지지부진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사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연세대학교를 상징하는 교문을 건립하여 영구 시설로 보존하는 취지」로 당선작에 10만원 시상 조건으로 10월 20일 기한으로 현상모집하였다.(연세춘추 제515호, 1968년 10월 7일) 그해 입학금이 4만원 남짓 할 때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응모가 신통치 못하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정문 설계도 선정은 총무처에서 이사회로 넘어갔다 하였다.(연세춘추 제519호, 1968년 11월 4일) 그러나 또 무엇이 마뜩치 않았던지 세 번째로 현상모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뒤 정문 건립에 대한 소식은 몇해 동안 물밑으로 잠류해 버렸다. 학교의 사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깥 사정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내 여론이 편치 못했다. 그 여론을 「연세춘추」「애드바룬」(1969년 12월 15일)에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한창 떠들던 교문 설계도가 어찌 된 일인지 소식궁금. 우수작을 고른다기에 설명은 되지만 그렇게도 오래 걸리는지 궁금한 일. 수색 도로가 완공되어야 시작한다지만 학생들에게는 하여간 기대가 큰 것.이라 하였다.

문제는 서울시에서 수색행 도로 공사를 언제 결정짓고 어떻게 끝내는가에 교문 공사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색행 도로가 뚫리면서 연세대학교 터를 범하게 될 경우 교문을 세우는 위치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교문에서 모래내 쪽으로 담을 세우는 공사도 결정지울 수 없어 정문 건립문제가 잠류하게 된 것이다.

그후 박대선 총장이 1972년 구상을 밝히는 연세춘추 기자와 대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밝혔다.
오래 전부터 바라던 대학 정문이 오는 13일 창립 기념일을 기하여 기공식을 갖게 된다. 현재 설계 중인 정문은 백양로와 통하게 되는 정문과 의료원으로 통하는 대문, 스포츠센터에 이르는 대문으로 될 것이며 경영대학원이 1천3백만원을, 연세 의료원이 1천만원을 부담하여 총 2천3백만원 규모로 세워질 것이다.(연세춘추 제632호, 1972년 5월 8일) 이리하여 갖은 우여곡절 끝에 1972년 5월 13일 창립 기념일에 정문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때의 구상은 교문이 세 개의 대문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다. 백양로를 통해 언더우드관으로 직선이 되게 대학의 정문을 세우고, 오른쪽에 의료원으로 통하는 대문, 그리고 그때의 구상으로는 현재 체육관과 연세과학원 쯤에 스포츠센터를 건립하여 그리로 통하게 하는 대문으로 구상하였던 것이다.

「기공」과 「착공」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정문 착공식이 1972년 7월 25일에 거행되었다. 당초 설계에 아취형으로 된 것은 많은 난관 때문에 수정하여 착공하였다 했다. 그리고 공사를 1차와 2차로 나누어 하기로 하고 먼저 정문(메인 게이트)를 세우고 의료원 문과 스포츠센터의 문은 뒤로 미루었다.(연세춘추 제640호, 1972년 8월 21일) 그 까닭으로 지금까지 교문이라는 호칭 대신 정문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북문과 동문과 구별하기 위해 정문이라 한 것이 아니였다.

마침내 1973년 9월 13일에 이르러서야 연세대학교도 창립 58년만에 대망의 교문이 있게 되었다. 창립은 가장 이르나 교문만은 가장 늦은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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