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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6-30

「백양로」- 1961년 7월 5일 처음 포장 -

  
    ▲1920년대 백양로 - 현재 백양관 앞; 길 오른쪽 백양나무가 가늘게 보임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에 닭 우는 소리 들릴 때 연희 고을에서는 길을 열고 백양나무를 심었다.

  지금 여러 학생이 무심히 바라보는 본관(그 때는 스팀슨관을 본관이라 하였다) 돌벽에 장막을 이룬 「담쟁이」(Ivy)는 우리가 졸업 기념으로 모교를 떠나던 날 심은 것들이다. 그리고 학교 입구에 무성히 자라 연희의 교문을 이룬 백양白楊(Silver Popular)도 밀러 교수의 지도로 우리 농과 학생이 심어 가꾸어 온 것이다(서광진, 나의 학장 회고, 「연희춘추」, 제76호, 1956년 7월 6일)


  ▲1950년대 백양로


  ▲포장공사 중인 백양로 - 길이 굽었음 (1961년)

  이렇게 처음 백양나무를 심고 길을 연 서광진 동문은 1921년 3월에 농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본관으로 쓰여진 「스팀슨관」은 1919년 4월 19일에 정초식을 거행한 후 1920년 9월에 완공하여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런즉 1920년 9월 이후에서 1921년 3월 졸업 이전에 「담쟁이」가 심어 지고 「백양나무」도 심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밀러(Edward Hughes Miller, 한국명 밀의두密義斗) 교수는 1918년 연희전문 농과 화학교수로 부임하여 1942년 왜정 총독부에 의해 선교사 추방령으로 쫓겨날 때까지 연희에 봉직하면서 「담쟁이」와 「백양로」 그리고 「노천극장」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교수였다. 그러나 처음 만들었을 때 백양로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 연세에서 가장 많은 변화와 그리고 변모를 거듭한 것은 백양로일 것이다.

  연희전문학교가 1915년 4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교한 다음 1918년 4월에 이르러서 연희캠퍼스 「치원관」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외진 곳이어서 그때 창내라고 불리던 창천동 일대에는 인가가 너무 없어 학생들이 60명 정도 수용하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는 한 전부 시내에서 통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서울 시내에서 연희전문까지 올 수 있는 길은 둘 뿐이었다. 하나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방법이고 있고, 또 하나는 아예 서대문에서 금화산을 넘어 북아현동 애기능을 거쳐 이화여자전문을 지나 현재 세브란스병원이 있는 산비탈을 지나 백양로로 걸어 들어오는 길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둘 다 백양로를 거쳐야만 했다.
  신촌역에서 내린 학생들은 역 앞마당을 나와 곧장 기차 굴길(터널)을 빠져 나오면 저만치 산 중턱에 교수 사택을 바라보면서 한때는 포도밭이기도 했던 세브란스병원 터를 가로질러 왔다. 또 스스로를 도보당(徒步黨)으로 부르던 통학생은 이화여전 본관 옆을 지나 현 동문회관 자리인 논밭을 거쳐 역시 포도밭을 가로질러 백양로로 들어왔다. 그러니 그때 백양로는 지금처럼 곧게 그리고 길게 뻗은 길로 될 수가 없었다.

  백양로가 지금과 같이 곧게 뻗은 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이 있었다. 신촌역에 내리거나 이화여전 본관 옆을 지나 포도밭을 거쳐 들어오지 않고 처음부터 학교를 향해 곧장 걸어 들어오게 되어야 백양로가 직선이 되게 되었다.
  지금의 연세대학교 바로 맞은 편 굴다리도 백양로만큼 변화가 무상했다. 예전에는 토끼굴만 하게 만들어져 있어 통행이 어려울 뿐더러 바닥에 물이 흐르고 있어 더욱 통행에 불편하였다. 이때 굴다리를 처음 통과해 본 신입생들이 통행로가 아닌 「하수로」라 하였다.
 
  우리들이 연희의 문을 두드린 해는 6?25동란이 휴전되고 학교가 부산에서 서울캠퍼스로 수복한 후인 1955년 4월이었다. 신촌행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아현동 비포장 고갯길을 넘어 신촌로타리에 내린 후, 학교 앞 경의선 철도 둑까지 오면 학교로 통하는 좁은 터널과 같은 「하수로」가 있었다. 퀴퀴한 냄새의 하수가 흐르는 어두침침한 길이라 잠시 실망을 느꼈지만 터널 길을 나서자 아! 눈앞에 나타난 당당한 연희의 모습!(최상선, <연세애?사제애와 우정으로 살아온 청송>, 「법대생이여 대망을 품어라」, 연세 법현장학회 편. 신영사, 2000.)

  노고산동에 로타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분명 「노고산로타리」라 하였다. 그러던 것이 희한하게도 어느새 「신촌로타리」로 바뀌어져 버렸다. 더욱 불가사이한 일은 「신촌」이라는 이름이 「신촌동」을 벗어나 이제는 「서강대 입구」 「이대 입구」 「홍대 입구」등 몇몇 「입구」를 제외하고는 전부 「신촌」이 되었다. 어찌 되었던 비포장일 망정  대현동 고개를 넘어가는 도로에 이어 로타리가 생기고 청량리 신촌 간의 1번 노선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는 기차를 타고 오거나 이화여전을 거쳐 오는 대신 전부 버스를 타고 「노고산로타리」에 내려 백양로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하수로」같은 굴다리가 문제였다.

  본대학교에서는 이번 신촌 구내 가도교架道橋 가설 공사를 착수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1일부터 작업을 시작하였다. … 현재의 턴넬을 대확장 및 개조하여 차량이 직접 다닐 수 있는 차도와 인도로 단장하게 될 것이다. 이 공사는 2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늦어도 7월 말에는 아름다운 연희캠퍼스에 이르는 백양로를 훤히 터 놓고 학생들 통학에 명랑한 기분과 편의를 주게 될 것이다(연세춘추, 제128호, 1958년 5월 5일)


  ▲1차 확장 공사가 끝난 굴길 (1965년)

  그러나 「설계 보강」의 이유로 공사가 지연된다고 11월에 가서 「노고산로타리에서 백양로와 직선으로 연결하는 현재의 도로 확장공사」가 다시 시작하였다고 보도되었다.(연세춘추, 제138호, 1958년 8월 1일/제148호, 1958년 11월 10일) 그리고 언제 완공되었는지 그에 대한 소식은 전해 주지 않고 있으나 그해 년말 쯤에 완공된 듯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굴다리가 토끼굴 같은 「하수로」를 면하고 어엿하게 사람과 자동차가 다닐 수 있어 백양로와 짝을 이룰 수 있었다.  
  예전 한때는 「신촌」을 「진촌」이라 비아냥거렸다. 원래 「창내」라는 동리 이름이 개천동네라는 뜻인데다 포장이 되지 않았으니 비만 오면 질척거린다고 「진촌」, 비가 안오면 먼지가 휘날린다고 티끌 진(塵)자 「진촌」이라 했다. 따라서 백양로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신촌의 황사는 몽고에서 불어 오는 것이 아니라 백양로에서 시작했다. 이것이 학생들간에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1961년 7월 5일 백양로가 말끔히 포장되었다. 시멘트 포장이었다. 이제는 자동차도 다닐 수 있게 차도도 만들어졌다.

  총 공사비 천만환으로 5월 30일 착공하여 진행되어 오던 백양로 시멘트 포장공사가 지난 5일에 완성되었다.
  길이 520m,, 폭 5m인 이번 공사는 연인원 1,300명이 동원되었으며 이번 공사가 완성되므로 백양로가 말끔히 단장되어 17일부터 일반 차량이 통행하리라 한다.
(연세춘추, 제258호, 1961년 7월 16일, 「백양로 포장 완료」)
  그러나 아뿔싸 백양로가 직선으로 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굽어지게 만들었다. 언더우드 동상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서 약간 왼쪽(동쪽)으로 치우쳐서 굴다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정남향으로 뻗어나가던 백양로를 현 학생회관 앞 쯤에서 굴다리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하기 위해 거기서부터 휘어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굽어진 길과 5m 폭이 그 뒤 1968년 와서야 바로잡고 넓히는 공사를 하게 되었다.

  4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은백양나무를 베어 내고 새로이 관목을 심는다고 하여 연세의 상징으로 알려진 백양로가 존속할 날이 그 귀착점에 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 5m 폭으로 현존하고 있는 백양로의 차도를 9m 폭으로 확장하여 급증하는 차량의 통행을 원활히 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보다 4m나 확장될 차도는 아스팔트 포장이 된다고 하며 양쪽 5m 폭의 인도는 보도 불럭으로 포장하므로서 현재 우천시 진흙으로 몹시 불편했던 인도가 말끔하게 단장된다고 한다. 현재 있는 은백양나무를 베어 내는 동시에 새로이 관목을 심는다고 한다. 이러한 백양나무의 폐목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와 전통에 구애받기는 하나 현존하고 있는 은백양은 벌레의 번창으로 수명이 길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어 불가피한 조처인 것으로 알려졌다. … 확장될 도로는 수경원 앞에서 굽어진 곳을 직선으로 뻗게 한다 하였다.(연세춘추, 제494호, 1969년 3월 25일, 「자취 감추게 될 백양로」)

  이쯤 되면 백양로의 보수공사가 아니라 백양로의 「개벽」이였다. 이해 4월에 폐목시켜버린 백양나무를 현 백주년기념관 앞에 여남은 그루, 청송대에 한 그루인가 남겨놓고 전부 은행나무로 대신했다. 일방통행과 같이 된 차도도 왕복 통행으로 만들고, 굽은 길을 곧게 바로잡았다. 그러나 길고 긴 520m의 길이는 그대로였다.
  
  곧 이어서 「연세춘추」(제494호)가 백양나무 대신 은행나무로 대체하는 것에 대한 여론을 조사한 기사가 실려 있다. 백양로 길이가 너무 멀다는 뜻이었다.
  「연세인이 4년간 학창시절 동안 백양로를 걷는 거리가 3천리나 된다」하였다. 그때는 고관대작 아들이 아니면 언감생심 승용차는 생각조차 못할 때이니 그럴만 했다. 그러나 「노고산로타리」에서부터 걸어 들어오는 학생에게는 3천리가 아닌 3만리였다. 3만리를 걸어 다니는 학생 중 운수 좋은 학생은 「당나귀」 엔진이 달린 승용차를 타고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굴다리 위에서 본 백양로
   - 넓게 그리고 직선으로 된 백양로 ;
      그러나 백양나무는 사라짐 (1969년 4월)


  ▲신촌역에서 내리는 이화 여학생과 연희 학생 (1940년)


  ▲연희 학생들이 다니던 길


  ▲걸어 다니는 「도보당」 (1935년)


  ▲거목으로 자란 백양나무 (1943년 6월)


  ▲확장 이전의 굴길 - 사람만 겨우 통행


  ▲「당나귀 엔진」승용차 - 로타리 출발 (1960년)

 

 

vol.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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