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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6-01

연희 학생이 일으킨 「6·10 독립만세 운동」

-1926년 6월 10일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 운동」에 이어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연희전문 학생대표 김원벽과 보성전문 학생 대표 강기덕 두 선열의 주도로 일으킨 학생 독립운동은 청사에 길이 빛날 쾌거였다. 그리고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 인산일에 일어난 「6·10 독립운동」도 기미년 독립운동 못지 않게 우리 민족 운동사에 길이 남을 독립운동이다. 그러나 「6·10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세인의 머리 속에 그리 크게 각인돼 있지 않은 듯 하다. 더욱이 「6·10 독립운동」이 연희전문학교 학생에 의해 계획되고 주도된 사실에는 더욱 아는 이가 드물다.

  6월 10일 조선을 들끓게 하였던 「독립만세」 열기가 수그러들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사건 개요를 발표하였다.

  6월 10일 인산因山 당일 시내 학생들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조선□□ 만세를 높이 부르며 다수한 격문을 일반 군중에게 살포하여 경찰 당국에 다수한 학생과 그 외 청년들이 검거된 사건에 대하여 지난 11일 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표한 범위 안에서 그 상세를 보도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 8시 30분 종로 3정목丁目(현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 행렬이 통과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 생도 약 3, 4십명이 만세를 고창하면서 격문 약 1천여 장을 살포하였는데 그 격문은 6월 7일 시내 종로 중앙 기독청년학관 학생 박두종朴斗鍾(23세)과 연희전문학교 학생 박하균朴河鈞(23세) 리병립李炳立(23세과) 경성제대 예과 학생 리천진李天鎭(23세)과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리선호李先鎬(19세)의 다섯 학생이 협의하고 격문 6천 장과 태극기 3십여 개를 만들어 가지고 태극기와 격문을 동지들 사이에 나누어준 후 인산 당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를 살포한 것인데 관련자로 체포된 학생은 이 다섯 학생 외에 연희전문 학생 김규봉金圭鳳, 리석훈李錫薰, 중앙고보 학생 리동환李東煥 박선석朴善錫 홍명식洪明植 주공조朱孔祖 등 여섯 사람이 더 있으며 격문 인쇄에 사용한 기계는 명함 박는 것 한 대와 잉크와 활자 등도 압수하였다고 했다.
-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

  그러나 인산 당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보도한 신문마다 기사 내용에 드나듦이 있는 바 그중 가장 공정한 입장에서 정연하게 보도한 1926년 6월 11일자 시대일보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 8시에 돈화문을 떠난 인산 행렬이 8시 30분에 장사동長沙洞 앞을 지날 때 제일 먼저 도로 우편에 도열해 서 있던 세브란스의전 학생이 일제히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격문을 뿌렸고, 9시 경에 행렬이 황금정 3정목丁目(현 을지로 3가)을 통과할 때 연희전문학교 학생 2백여 명이 인쇄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면서 만세를 부르짖자 같이 도열하고 있던 인파들도 호응하여 경계중이던 경관에게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자 신흥청년동맹원인 이병립 이하 2십여 명 학생이 검거되었을 뿐 아니라 황금정 4정목에서 체포된 연희 학생 품속에서는 선언문 외에 태극기도 쏟아져 나왔다 하였다.

  기미년 독립운동 사건으로 한번 혼쭐이 난 왜경인지라 이번에도 무슨 변고가 있을까 하여 전전긍긍하던 차에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노총계 거사계획이 생각지 않던 빌미로 6월 6일에 사전 발각되어 7천여 경찰력을 전국적으로 대거 동원하여 그야말로 물샐 틈 없는 경계를 폈건만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6·10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사직동계」 「통동通洞계」 그리고 「노총勞總계」 이 세 그룹이 주도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이였다. 그리고 이중 「사직동계」가 곧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그 당시 상황을 「통동계」 중심 인물이였던 박용규朴龍圭의 증언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사직동계」는 연희전문 문과 2학년 이병립李炳立과 박하균朴河鈞, 경성제대 예과 1학년 이천진李天鎭, 중앙고보 5학년 이선호李先鎬와 4학년 유면희柳冕熙 그리고 중앙 기독청년학관 중등 영어과 박두종朴斗鍾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준비하였는데 그 시작은 4월 26일 8십여 명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이 춘계 야유회 도중에 순종 황제 붕어 소식을 신문호외를 보고나서 계획하였던 것이다.
  5월 20일 죽첨정竹添町(현 충정로) 박하균 하숙집에 이병립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4십여 명 회원이 모여 6월 10일 인산因山을 기해 거사하기로 합의하고 준비 책임자로 이병립으로, 자금조달은 박하균 등에 일임하였다.
  그후 몇 차례 모여 거사를 모의하는 한편 북아현동 뒤 애기능 숲속에서 태극기 2백여 장과 「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 3십여 개를 만들고, 6월 6일에는 이병립이 초안한 「2천만 동포들이여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 대한독립 만세」라는 격문을 수정없이 채택하였다.
  그리고 박두종의 주선으로 명함 인쇄기를 한 대 빌려 와서 사직동 이석훈李錫薰(연희전문 문과 2년) 하숙집에서 이병립 박두종 등이 격문 1만여 장을 인쇄하는 한편 이병립은 다시 8일 연희전문 뒷산 송림 속에서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 3십여 개를 만들어 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박용규, ‘인산因山에 모여든 민족의 통분’, 신동아, 1969년 9월호」

  이렇게 준비해서 일으킨 「6·10 독립만세 운동」이 끝나고 6월 14일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으로 들어간 47명 중 박하균 이병립 이석훈 권오상 유경상 등 연희전문학교 학생이 37명이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공판이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가 11월 2일에 열렸다. 그 재판 광경을 알려주는 신문기사를 보면 모골이 처연한 비감 보다 쓴 웃음이 먼저 나온다.
  먼저 판사가 이병립에게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였나”묻자 “그 까닭은 묻지 않아도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조선이 □□하여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일이지요”했다. 신문조차도 「독립」을 바로 쓰지 못하고 □□라 썼다. 그리고 박하균은 처음부다 일본인 판사에게 일본말을 모르니 조선말로 하겠다라고 시작하였다. 그리고 판사가 「불온문서」에 대해 추궁하자 박하균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온문서요? 그게 무엇이지요”하니 재판장이 “불온문서란 불온한 문구를 종이에 인쇄한 것 말이야!”하매 “그게 어디 불온문서입니까? 그건 □□□□□□□지요! □□□를 불온문서라 하니까 못 알아 들었지요” - 「1928년 11월 3일자,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이번에도 신문이 「조선독립선언서」와 「선언서」를 감히 바로 쓰지 못하고 괄호로 대신했다. 이쯤 되면 어느 쪽이 고양이이고, 어느 쪽이 쥐인지 구별이 안간다.

(자료제공-연세기록보존소)

 

vol.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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