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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4-16

「언더우드 동상 제막식」
-1928년 4월 28일-

언더우드 동상 건립에 대한 첫 소식은 1926년 7월 29일 처음으로 전조선에 전해졌다. 조선 교육 공로자, 원 박사 동상 건립, 연희전문학교 계획 발표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자세하게 보도되어 있다. 유억겸 교수 외 6십여명의 발기로 건립자금 6천원 모금이 시작되었다 했다. 즉 연희전문학교 우애회 발의로 언더우드 박사 서세 10주기 기념사업으로 시작하였다 했다. 언더우드 박사는 미국 애틀란틱 시에서 1916년 10월 12일 오후 두시 조금 지나서 돌아가셨다. 그러니 10주기 기일이 곧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우애회는 연희전문 초창기에 조선인 교직원만으로 조직된 모임이였다. 이제처럼 상휼(相恤)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매월 일정 금액을 갹출해서 해마다 학교 사업에 기여함을 목적하였다. 그 사업 중 두드러진 것으로 도서관 도서기금 기부였다. 그러던 중 언더우드 박사 서거 10주기 기념사업을 벌이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2천원에 가까운 기금을 내놓았다.

총독부의 기부금 모집 허가령이 또 걸림돌이 된 모양이었다. 동상 건립을 발기한지 꼭 1년만인 1927년 6월 24일에야 총독부로부터 기부금 모집 허가를 받게 되고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지난 십오일에 기부금 모집 허가원을 제출하였던 것이 지난 24일부로 허가령을 받았으므로 구체적 활동에 착수하여 위선 그 동상의 제작을 태평통(太平通) 미술제작소에 의뢰하고 각처로 널리 기부금을 모집하리라 하는데 먼저 황해도로 조병옥(당시 연희전문 교수) 유기준(연희전문 1회 졸업생), 경상도로 장봉조씨를 각각 파송하기로 되어 불일간 출발할 터이요 뒤를 이어 각 도로도 출장하리라는 바 금년 시월 말일까지는 전부 완성되리라더라 하였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30일)

1927년 10월 말일 안으로 동상이 완성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이어서 이튿날 원두우元枓尤씨 동상 건립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사설을 싣고 강호의 유지들에게 동상 건립에 적극 동참하기를 촉구하였다.

같은 나라 사람으로 동족을 위하여 진력한 이도 오히려 그 은공을 크다 할진대 하물며 수륙만리 원방으로부터 월산도해越山渡海의 노勞를 아끼지 않고 수토水土 인정 풍속이 생소한 이역으로 와서 타민족을 위하여 필생의 노력을 다한 이의 공에 이르러서야 거듭 다언多言을 비費할 필요가 있으며, 일단사一單食 일표음一瓢飮의 궤휼에도 오히려 그 은혜가 많다 하거늘 하물며 헤아릴 수 없는 영육의 양식을 베푼 은혜에 이르러서야 다시 다언多言을 비費할 필요가 있으며, 한 사람 한 가족을 위한 이의 은덕도 오히려 칭송할진대 하물며 한 국가 한 민족을 위한 은덕에 이르러서야 새삼 다언多을 비費할 필요가 있으며, 한 세대에 그치는 사업도 크다 하거늘 하물려 그 은택이 만대에 급及할 종교와 교육사업의 은택에 이르러서야 다시 다언多言을 비費할 필요가 있으랴! (동아일보 1927년 7월 1일, 사설)

위당 정인보는 이때 연희전문 교수이면서 한편으로는 동아일보사에서 비상임으로 논설을 집필하는 논설위원이였고, 이때 동아일보 논설반 진용은 위당 선생을 포함하여 당시 연희전문 강사로 나오던 벽초 홍명희가 주필 겸 편집국장이였다. 그 외 이봉수 윤홍열 조동호 셋이 더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아일보사 사주 인촌 김성수는 아직 보성전문에 관계하기 전이였다. 그러한 때문인지 유독 동아일보가 언더우드 동상 건립건 하나로 도합 세 번의 사설을 실었다. 드문 일이였다. 위당 선생이 나중에는 더러 기명으로 논설을 썼으나 처음에는 익명으로 쓴 일이 더 많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설의 집필자가 누구인지 심증이 가게 된다.

뉘 박사의 일생을 오십칠세라 하더뇨. 박사 의연히 여기 계시도다 이렇게 위당 선생께서 동상의 명문을 끝맺어 놓았다. 그리고 날짜를 천구백이십칠년 십월 삼십일이라고 새겨 놓았다. 애초에 계획되기를 언더우드 박사 서세 십주기 기념사업으로 시작된 만큼 년도와 그리고 달 표시까지 언더우드 박사가 돌아가신 10월로 맞추어 놓은 모양이다. 그러나 동상 제막식은 이듬해 연희 창립 기념일로 미루어졌다.

연희 창립 기념일은 연세대학교로 바꾸어지기 전까지는 매년 4월 마지막 금요일로 지켜 왔다. 그러나 제막식은 금요일 다음날인 1928년 4월 28일에 첫 번째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언더우드 박사 동상 제막식은 28일 오후 두 시에서 15분 늦게 구세군 악대 주악으로 열린 바 내외 유지와 씨의 생전 사업인 각 학교 생도와 기타 종교계 인사들로 넓은 소나무숲이 만원을 이룬 가운에 순서가 진행되어 윤치호씨의 제막 식사에 이어 서경조 목사가 원 박사의 피땀 흘린 일생 사업을 말한 후 에비슨 박사의 헌납사가 있은 다음 원 박사의 영손令孫들의 천진난만한 손으로 막이 벗어지자 만장의 박수소리로 이를 축하하여 문득 박사의 생전을 연상케 하였다. (동아일보 1928년 4월 30일)

이때 막을 벗긴 박사의 영손은 곧 열 살의 호러스 그랜트(원일한 박사)와 아홉 살 짜리 쌍둥이 제임스와 존이였다. 그리고 동상의 높이는 16척이라 하며 좌단의 직경이 20척이라 하며 동상을 세우는데 기부한 개인이 343명이고 단체가 25처라 하며 총 금액은 4,978원31전이라고 소상히 밝혀 놓았다. (동아일보 1928년 4월 28일)

고 원두우 박사 기념 동상지에 실린 기부 내역 첫머리에 우애회 1,860원, 연희전문 학생회 100원 그리고 그 외 개인기부로 윤치호 200원을 최고로 박영효 100원, 또 그 다음으로 정인보 50원, 최현배 40원, 김성수 30원, 서경조 30원, 백낙준 20원, 김명선 10원 등등으로 적혀 있다. 당시 장안의 인기였던 「이문식당」 설렁탕 한 그릇에 5전을 받던 시절이였다.

언더우드 동상의 첫 시련은 1942년 여름방학 때 일어났다. 소위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창 미국과 전쟁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1942년 여름방학 동안 수원 서호 호수 확장공사에 근로봉사로 동원되었다가 돌아온 유영(1943년 문과 졸업) 신능순(1943년 상과 졸업)등이 동상이 훼파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일제는 언더우드 동상이 있던 자리에 흥아유신기념탑 興亞維新記念塔을 대신 세워 놓았다. 「미나미南次郞  총독」은 자기가 세워 놓았다고 자랑스레 써 놓았다. 날짜도 「소화 16년 12월 8일」이라 써 놓았다. 1942년 12월 8일 그 날은 하와이 진주만에서 한창 「도라 도라」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탑에다 굳이 그 날짜를 써 놓은 총독의 저의를 짐작케 한다.

(자료제공-연세기록보존소)

 

 

vol.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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