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4-01

「연세 교기 제정」
- 1960년 4월 2일 -


 1960년 4월 새로운 교기가 제정되기 이전에는 교기의 중앙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대학교는 교기 뿐 아니라 일제의 폭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건축을 하면서도 건축물 곳곳에 태극문양을 새겨 넣어 민족 정신을 더하기도 했다.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합동으로 인하여 새로운 교기를 제정하면서, 방패 중앙에 있던 태극문양은 사라지고, 위아래로는 「ㅇ」, 「ㅅ」가, 「ㅇ」 좌우에는 책과 횃불이 자리잡게됐다.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합동으로 인하여 종래 사용되어 오던 이들 두 대학의 교기를 단일화하여 하나의 연세대학교를 상징하는 새로운 교기의 모양을 구상하여 오던 바 지난 2일 전체 교수회에서 본 대학교의 새로운 교기 도안이 최종적으로 통과됨으로써 연세의 새 교기가 만들어졌다.
  교기의 모양은 본 대학교 마크형인 방패 속게 「연세」의 두 글자를 의미하는 「ㅇ」, 「ㅅ」이 위 아래로 그려져 있고, 「ㅇ」의 좌우에는 본 대학교의 교훈인 진리를 뜻하는 책과, 자유를 뜻하는 봉화가 그려져 있다. 「ㅇ」의 밑에 「ㅅ」이 그려진 부분에는 여섯 개의 단과대학을 상징하는 선이 여섯 개가 수직으로 그어져 있으며, 교기의 전체 바탕 색깔은 감색이다. 편의상 교표로 사용될 때에는 책과 봉화의 그림을 빼게 될 것이다.
  한편 이 교기의 도안은 지난 해 전체 교수회에서 선정한 6명의 교기 심사위원(최현배 부총장, 의대 학장, 학생처장, 의대 학생과장, 양주동 교수, 박두진 조교수)의 합의 구상인 바, 지난 해 연세춘추를 통하여 모집하였던 교기 도안 현상모집의 응모작품 가운데는 적당한 작품이 없었던 것이다.(연세춘추 제200호 1960년 4월 18일)

  그러나 연세 교기가 그렇게 선뜻 정해지지는 않았다. 「연희」와 「세브란스」가 합동하기 전에는 그 이름짓는 일로 오래도록 산고를 겪었고, 합동이 되고 나서는 교기, 교가까지 합동이 되지 못해 또 오래도록 진통을 겪었다.
  일의 사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8년 3월 3일(월) 오후 두시 노천극장에서 연희와 세브란스가 합친 뒤 처음으로 연세대학교 첫회 졸업식을 거행할 때 교가 제창 순서에 그만 연희 교가를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교가를 못 부르게 된 세브란스 측 항의에 비로소 교가와 교기를 새로 제정하자는 의논이 나와 마침내 최현배 부총장을 위원장으로 한 여섯 명의 제정위원회가 뽑히고 한편으로는 「교기 도안 현상모집」 광고가(연세춘추 제157호, 1959년 3월 10일)부터 매주 실리게 되었다.
  결국 「합동」이 되고 3년 넘도록, 「말썽」이 나고 2년 넘어서야 「연세」 교기가 제정된 것이다.

  「연희」와 「세브란스」가 합동하여 「연세」로 되기 전의 연희대학교 교기의 탄생은 이러하였다. 해방이 된 뒤 전문학교 시대의 구각을 벗고 1946년 9월 대학교로 승격됨에 따라 모든 것을 일신하는 중에 제복과 표지(마크)도 갱신하여야 되겠기에 돼 1946년 9월 4일(수) 교수회에서 이 문제가 제의되어 10월 16일 임시 교수회를 소집하고 이환신 고형곤 염은현 교수들이 제정위원으로 선임하여 연희 마크, 교표, 배지 도안 제정에 관한 사항을 위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연희대학교·Chosun Christian University」라는 마크로 된 교기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마크 중앙에 「태극」이 들어 있고 전체 모양은 방패 문장(紋章, Coat of Arms)이여서 연희전문학교 흔적을 묵수했던 것이다.

  연희전문학교는 교문이 없는 것으로 오히려 이름이 나 있었다. 숲길을 지나 캠퍼스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야 그제야 연희에 다다른 것으로 생각되던 때다. 그러한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오면 사방 높이 우러러 보이는 것은 방패 속에 새겨진 「태극」이었다. 모두 일곱이다. 먼저 딛고 선 돌계단에 뉴욕 겨레가 붙여 준 태극, 언더우드 관과 아펜젤라 관 정면 이마에, 그리고 스팀슨 관 동향과 남향 이마와 출입문 양쪽에 새겨져 있다. 이렇게 모두 일곱이다. 일제 때 세운 건물마다 용케도 다 새겨 넣었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입학한 후 고향 후배 장덕순에게 이렇게 편지를 띄웠다. "태극 마크가 도처에 새겨져 있어 감격했소, 연희 캠퍼스는 동양에서도 제일이라 하는가 보오"(장덕순, '인간 동주의 이모저모'「문우」 7호, 1969년 2월) 그뿐 아니라 나중 장덕순도 연희에 입학하자 그를 본관으로 끌고가서 손으로 가르킨 것이 바로 태극마크였다고 하는 증언도 남아있다(김용직 「뿌리의 문화」, 국학자료원, 1999.). 시인의 눈에는 태극이 보여도 오늘의 이생(異生)들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였다.
  그러하니 연희 학생들이 입으로는 「와레 와레와 고고꾸진민나리」라고 황국신민서사를 읊조려도 눈은 의연히 태극을 향해 있었다. 별만큼은 아니어도 하늘 아래에는 태극이 촘촘히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59년 10월 1일(목) 교무위원회에서 교기 응모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상세한 도안은 짐작할 길은 없으나 「푸른 바탕, 흰 십자가 중앙에 촛불, 책을 심장형 안에 놓음」이라고만 적혀 있어 이로 볼 때 이미 이때 태극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처음 제정할 당시 문과대학, 상경대학, 이공대학, 신과대학, 정법대학 그리고 의과대학의 여섯 단과대학을 뜻하던 세로 줄 친 금은 그후 열 몇 단과대학으로 늘어나자 그 줄마저도 없어지고 또 윤곽도 약간씩 변해져서 지금의 교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변해질지는 태극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자료제공 - 연세기록보존소 )

 

vol. 385
웹진 PDF 다운로드

연세소식 신청방법

아래 신청서를 작성 후 news@yonsei.ac.kr로 보내주세요
신청서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