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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기타 소식] [이달의연세역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01-02

1957년 1월 5일 연희대학교, 세브란스의과대학 합동


「연세 합동」 - 1925년부터 시작된 30년 인고의 합동 -

1957년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태어나기까지는 30년이 넘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그 태동은 벌써 1925년에 시작되었다.

  「조선인의 교육을 위하여 일생의 사업으로 하는 몇몇 선교사 노력의 결과로 이미 세브란쓰 의학전문과 연희전문의 양교가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두 전문학교에 협성신학교까지 합하여 명실상부하는 종합대학을 세우려고 분투를 계속하여 오던 바 그 자금 주선을 위하여 그 본국인 미국에 갔던 「에비슨」씨와 「언더우드」씨가 각 방면으로 활동한 결과 기부금이 이미 백4십만원에 달하였다고 한다」고 하였다.(동아일보, 1925년 12월 3일, 사설)

 에비슨과 언더우드 뜻을 받든 두 학교 교수들 사이에 합동에 대하여 진지한 논의를 진행시켰던 바 1929년 6월 12일 저녁 여덟시 에비슨교장 댁에 Hardie, Avison, Found, Martin, Clerk, Underwood, Becker, Owens 외에 유억겸 조병옥 양주삼 홍승국들이 모여 두 학교 합동에 따른 제반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933년 10월 5일 남대문예배당에서 회합을 가진 자리에서 연희측에서 세브란쓰측에 연희 기지 안에 건물을 세울 대지의 제공과 의예과 신입생에 대한 기초과목 교육을 대신할 것을 승인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브란쓰의전에는 병원수입이라는 연희에 없는 가외수입이 있어 합동에 걸림돌이 되자 학교 운영을 영국의 런던대학을 본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까지 개진하게 되었다. 그러하나 합동에 대한 진전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시국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치닫게 되고 합동은 물밑으로 잠류하게 되었다.
 
  그러다 광복이 되고 난 다음인 1948년 5월에 두 학교 교수 일동이 다시 합동문제를 재론하여 그해 12월에 마침내 합동건의서를 양교 이사회에 제출하므로서 합동의 기운이 되살아 나게되어 그야말로 합동이 목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오랫동안 진행되어 오던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쓰 의과대학의 합동문제는 드디어 최종적인 결정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금년도 세의대 예과 신입생은 다음달 21일부터 신촌에 있는 연희대학교에서 모집하게 되었으며 오는 9월에는 정식으로 새로운 종합대학교로 발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명칭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총장에는 원한경박사가 유력시되고 있다」(동아일보, 1949년 5월 20일)

  이번에는 걸림돌이 학교 교명이 되었다. 그러나 「연세」가 태어나기에는 아직 하늘의 때가 익지 않음인지 진짜 걸림돌은 이듬해 6월 25일에 일어났다.

  전쟁의 포성이 멎자 민족의 시련도 끝이 났다. 모두가 폐허 위에 새롭게 다시 일으켜 세울 때 합동문제도 다시 일어났다. 연희와 세브란쓰만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를 거듭한 결과 1955년 4월에는 완전 합동이 이루어지기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처음 연희가 합동후의 교명을 「연희대학교 세브란쓰 의과대학」으로 제안한 것에서 일의 사단이 벌어졌다. 세브란쓰측에서 이 이름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이러니 교명이 정해지지 못하여 법적 수속을 진행시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오전에 교무위원회가 있었다. 총장으로부터 쉬이 이사회가 열리겠는데 연희, 세브란쓰 두 기관의 합병은 사실로는 시행해 가면서 법적으로는 이름 문제로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또 이름 문제가 나올 것 같으니 이름을 고치겠는가, 아니면 합병을 못 하드라도 거부하자는가에 대한 의견을 물으므로 "이름 때문에 못 합친다면 고치자"고 의견이 일치되어 고치면 무엇이라 할까 함에 대하여 「한경」「한벌」「태백」「영화」들의 제의가 있었다」(김윤경일기, 1955년 12월 30일)

  이제는 모두가 작명가로 나선 듯 하였다. 그런데 합동이사회에서는 「신민대학교」 7표(연희 6표, 세브란쓰 1표), 「기독교대학교」 17표(세브란쓰 9표, 연희 8표)여서 「기독교대학교」로 결정이 나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연희 교수들의 반대가 일어났다.
  이리하여 연희에서는 1956년 10월 11일 오후 네시에 전체 교수회로 모여 「기독교대학교」는 보통 이름이요 특별 이름이 아니라고 반대 의견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나흘 뒤인 15일에 연희동문회 임원들이 두 학교 이름의 첫 자만 따서 「연세」로 하자는 건의서를 채택하고 그 이튿날 16일의 합동이사회에서 이 건의가 채택되어 드디어 「연세대학교」라 이름 짓고 12월 26일에는 정식으로 문교부에 교명 개정을 신청하게 되니 합동이라는 대단원의 막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1957년 1월 5일 문교부로부터 「연세대학교」로 변경 인가가 나고, 1월 19일자로 서울지방법원에 등기까지 마쳤다. 그러나 이것으로 매듭이 다 지워지지 못했다. 「연희춘추」가 「연세춘추」로 바뀌고, 학생들이 달고 다니던 배지도 「연세」로 바꿔지고, 졸업증 서식도 바꾸었으나 졸업식 때 교가가 「한강을 반 낮에 안고…」로 불려져 또 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교기 교가 개정은 한참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교기

 세브란스 교기

연희대학교 교기
 

 연세대학교 교기(1957년 당시)

 


배지

    6.25 이전 배지  

연세 합동전 배지
연세 합동 후 배지

 

 

vol.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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