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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원일한 이사<br> 유일한 소원은 연세의 영원한 발전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3-05-01

1885년 H.G.언더우드(원두우) 박사가 선교사로 이 땅에 도착한 이래로 지금까지 언더우드가는 대를 이어 연세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11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연세의 뜰에는 언더우드 박사의 손자와 증손자가 연세의 발전을 소명으로 열심을 다하고 있다. 최근 학교본부는 과거 언더우드일가가 사택으로 사용하던 건물 및 부지에 '언더우드기념관'을 건립하고 사택을 복원하는 등 우리대학교의 뿌리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육학 교수, 도서관장으로 일했고 해방 후에는 학원 복구에 헌신, 오늘날 연세대의 기틀을 마련한 언더우드 박사의 손자, 원일한 상임이사를 만났다.






* 건강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최근 둔부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당분간 조금 불편하겠지만,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한편입니다.

* 서문쪽에 있는 (구)언더우드 사택지를 학교에 기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약 25여년전에 기증했습니다. 박대선 총장 시절이니까요.

* 사택지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됩니까

대략 1만여평됩니다.

* 그곳에서 박사님께서는 얼마나 생활하셨습니까

미국에 유학한 기간을 제외하고, 1926년부터 현재의 사택으로 옮긴 1981년까지 55여년간 쭉 그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낸 저의 소년시절은 그야말로 행복한 'Golden Age'이었습니다. 토요일마다 넓은 마당에서 동생들과 동네아이들이 어울려 뛰어 놀았고,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이 많습니다.

* 모친께서 그곳에서 피살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교장(총장)으로 계셨을 때, 어머니는 교수 부인회를 조직해서 교양강좌를 통해 계몽운동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교수들에 비해 부인들은 교육을 잘 받지 못했었기 때문에 매월 강좌도 여시고 이를 통해 부인들도 대학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셨습니다.
1948년 모윤숙 여사가 한국대표로 UN총회에 다녀온 직후 부인회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 저희 집에 왔습니다. 그때 5명의 좌익청년들이 집에 침입했고, 이들을 저지하려다가 어머님은 총탄을 맞으셨습니다. 그 청년들은 모윤숙씨를 잡기 위해 테러를 했다고 진술했지만, 제 생각에는 꼭 그 이유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와 비슷한 테러사건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회불안을 조성하기 위해 이러한 테러들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건은 가족들에게 너무도 큰 쇼크였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1년반 후에는 6.25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신 탓에 얼마 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 '언더우드기념관' 건립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 가문의 기념관을 만들어 주신다니 매우 고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1만여평의 그 넓은 공간이 언더우드기념관으로만 쓰인다면 좀 아까울 것 같습니다. 그곳을 연구소, 총장공관 등의 좀 더 많은 용도로 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래라저래라 상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공간은 학교발전을 위해 드린 공간이기 때문에, 무조건 학교당국에서 원하는 용도로 잘 쓰시면 좋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6.25와 2차대전을 겪으면서 귀한 자료가 많이 없어져, 전시관에 둘 자료가 풍부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다만 제 개인의 자료는 모두 그곳에 둘 예정입니다.

* 연세대를 설립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더우드가는 한국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조부이신 H.G.Underwood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할아버님은 제가 태어나기 1년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만, 위대한 분의 손자로서 할아버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부끄럽습니다. 할아버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셨고, 제 아버지도 매우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조차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씨를 뿌리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 이후에 수백수천수만명의 기독교인들이 그 씨앗에 물을 주어 기르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교회와 연세대학교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할아버지가 시작한일을 계속 전진시켜 나간 한국기독교의 공로와 업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 연세대 설립 취지나 이념이 현재의 연세대에서 잘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간이 지나고 인원이 들면서 처음의 열정과 원칙이 약간은 흐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자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와서는 우리의 뿌리를 찾고 기본정신을 회복하려는 분위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 바람직하다고 느낍니다. 1941년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450명 학생에 교목 1명 있었어요. 오늘날에는 연세대에 약4만5천여명의 학생이 있으니 단순히 비율로 하자면 100명의 교목이 있어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행정적으로 약간 무리한 비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의 교목실이 매우 잘하고있지만, 건학의 기본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목이 필요하고 교목실의 활동을 확대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높고 좋은 빌딩이라 하더라도 그 기초가 매우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 소원이 있으시다면

개인적인 소원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생을 축복하셔서 건강하고, 가족관계도 좋고, 연세대와의 관계도 살펴주셔서 개인적인 소원은 없습니다. 제 소원은 오로지 연세대학교의 영원한 발전 그것뿐입니다.
또 하나 원하는 것은 저의 두 나라인 한국과 미국이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 5년동안 양국 사람들에게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소개하려고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계획입니다.

* 항상 마음에 담고 계시는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장 8절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거룩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깨끗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것이 좌우명입니다.

* 캠퍼스에서 있었던 추억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소년 시절에는 겨울이 되면 언더우드관 뒤에 있었던 작은 논에서 스케이트도 타고 하키시합도 했고, 눈이 많이 온 날에는 현재 알렌관 앞길에서 의료원까지의 비탈길에서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기도 했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언더우드관 뒤에 지하터널(하수)이 있어서 친구들과 전등을 손에 들고 그 밑을 돌아다기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캠퍼스 모두가 내 마당이라고 생각했고 정말 많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캠퍼스에 점차 녹지가 없어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학교의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지 맙시다. 물론 현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오늘이 어제보다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마마' 지나갈 때까지는 아이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거죠. 그뿐 아니라 위생, 여성의 지위 등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 아무리 힘이 들어도 오늘이 어제보다는 좋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대학시절은 정말 공부를 해야하는 시기입니다. 그간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대학시기가 배우기보다는 친선의 시기, MT시기, 친구를 사귀는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친목도 중요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의미하는 공부는 단순히 내용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우리 대학교육의 가장 취약한 면은 바로 지식을 사용하는 면과, 학생들의 판단력입니다. 좀더 열린마음으로 다양한 의견을 종합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소신있게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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