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백영중 동문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3-04-01

정직과 성실로 미국 경량철강업계를 점령한 철강왕 백영중 동문


미국 전체 경량철골 시공물량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 패코스틸(Paco Steel & Engineering)의 회장이 제11회 KBS 해외동포상 특별상 수상을 위해 입국했다. 외국인이 발붙이기 힘든 미국의 정통산업분야인 철강업계에서 맨주먹으로 정직과 성실을 통해 패코스틸이라는 회사를 성공시킨 자랑스런 연세의 동문이다.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도전정신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국 철강왕 백영중 동문을 만났다.



KBS 해외동포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소감은
감개무량합니다. 맨손으로 미국에 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상을 받기 위해 모국에 돌아오게 되고, KBS 해외동포상이라는 큰상까지 받았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감격적입니다.

어떻게 연희대에 입학하게 되셨습니까
6.25전쟁이 일어난 후 나는 아버지가 공산당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하셨고 그 때문에 신변에 위험을 느껴 1950년 11월 중순 홀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평안남도 성천에서부터 남으로 남으로 피난한 끝에 다다른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노숙을 하다가 군밤장사를 시작해 그나마 생활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마음과 생활에 여유가 생기다보나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연희대 분교가 부산 영도에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물리학과에 지원했습니다.

연희대 재학 당시 학습여건이 어떠했습니까
휴전이 되던 1953년 학교가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저도 서울로 왔지만 부산과는 달리 서울에서는 하루하루 잠자리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생활비와 학비 마련 때문에 정작 공부는 거의 못했습니다. 공부를 너무 안해서 당시 물리학과 학장이던 장기원 선생에게서 꾸지람을 지독하게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직도 연희대 재학시절 학생구실을 못했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미국에 유학가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시다면
연희대 재학 시절 인생의 결정적 전환점인 흥사단과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흥사단 생활은 저에게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내 인생행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56년 흥사단장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미국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유학시절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식당에서 일할 때 Mop(대걸레)를 못 알아들어 모든 청소도구를 다가지고 나왔고, 햄버거를 앞에 두고 어떻게 먹어야할지를 몰랐습니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영어라는 난제를 극복하면서 대학을 마쳤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수민족 특히 동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동양인은 취직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실성을 인정한 지도교수가 추천해주어서 오하이오주 밴워트 카운티 최초의 동양인 공무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철강업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교수님의 조언으로 인디애나 공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것이 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62년도에 슐레 스틸이라는 철강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Paik's Knee'라는 볼트 공법을 처음 개발하면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크 크레스트 철강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백인들의 영역이었던 영업에도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창업을 한 이유는
마크 크레스트 철강에서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아 부사장의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4년에 패코스틸을 창업한 것입니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제 아내가 "사업에 실패하면 내가 핫도그장사라도 하겠다"라며 제 결정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창업후 같은 두께의 철판이라도 주름을 잡으면 강도가 높아지고 무게가 가벼워지는 이치를 활용한 주름잡이빔을 개발해 세계적인 업체로 급부상 할 수있었고, 그 결과 1999년도에는 미국 Ernst&Young사가 주관하고 CNN, USA TODAY지 등이 후원하는 '올해의 최우수기업인상'까지 수상할 수 있었습니다. 내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도 큰회사의 월급쟁이 전무가 되어 수동적으로 일하기보다는 작은 회사의 사장이 되어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세상에 기여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의 성공요인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저의 성공요인은 "고객 전부주의"와 "정직, 성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인들에게 신뢰를 주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그 신뢰를 얻기까지 정시, 정량, 성실 공급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이를 위해 심지어는 경쟁사의 제품을 구입해서 물품 배송일을 맞추기까지 했고, 무상으로 물품을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객을 만날 때에는 고객이 원하는 것들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제 고객들이 저를 거짓말하지 않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미주 흥사단 단원들이 사들였던 "독립공채"를 상환받는 등 흥사단 사업에 적극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흥사단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도미의 기회를 얻었을 뿐 아니라, 미국 유학당시 도산 선생의 부인이신 이(안)혜련 여사를 비롯한 도산 선생의 가족들에게 참으로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또한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하라', '부지런하라', '사랑하라'라는 도산의 정신이 제 인생의 좌표가 되어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생을 흥사단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도산 선생께서 흥사단의 씨앗을 심으셨다면 저는 그 심은 것을 거두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1999년 제가 걸어 온 길을 정리하여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를 펴냈습니다.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저의 경험을 알려주고, 기업을 하기 위해서는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신용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좌절을 직접 부딪히면서 의지와 신념으로 헤쳐나가는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젊은 청년들 특히 연대 후배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배양해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모교를 위한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연세대에 다니지 않았다면 미국에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록 졸업을 못했었지만 미국에 가서도 늘 연세대를 모교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연세대의 미국진출을 위한 기초기지를 마련하는데 적극 협조하고 연세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싶습니다.


 

vol. 366
웹진 PDF 다운로드

연세소식 신청방법

아래 신청서를 작성 후 news@yonsei.ac.kr로 보내주세요
신청서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