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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Academia] 사랑은 다름의 중첩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3-09-20

사랑은 다름의 중첩

독어독문학과 주일선 교수



사랑은 자기 파괴적인가?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만일 그 무엇도 끊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한 결합을 이룬 남녀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독일의 작가 괴테가 1809년에 발표한 소설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의 중심에는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라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에두아르트의 아내인 샤를로테, 그리고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까지 모두 네 명이다. 오틸리에는 샤를로테의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이어서 조카로 불린다. 원래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만 머물던 이들의 장원에 먼저 대위가 합류하고, 얼마 후 오틸리에도 함께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게, 샤를로테는 대위에게 마음이 끌린다.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녀에게 마음이 끌린다. 『친화력』 제1부 4장의 끝부분에서 샤를로테는 에두아르트에게 두 통의 편지를 전해 준다. 오틸리에가 머물고 있는 기숙학교의 여교장과 조교가 오틸리에에 관해 쓴 편지다. 편지를 다 읽은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그녀가 “왼쪽에 두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트는 “오른쪽에 두통”이 있다. 그래서 자신과 오틸리에에게 동시에 두통이 생긴 상태에서 서로 마주 앉아 있으면,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 같다며 흡족해한다. 자신의 거울상을 보는 것과 같아서 오틸리에가 마음에 든다는 말이다. 이처럼 오틸리에가 에두아르트 자신의 거울상과 같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1부 4장에서 화학적 요소들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비유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중 에두아르트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진짜 나르시스야. 인간은 어디에서든 자기 자신을 기꺼이 스스로 비춰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유리종이로 온 세상의 밑에 깔아 놓거든.”


누군가가 온 세상의 밑에 자기 자신을 유리종이처럼 깔아 놓아서 거울로 만든다면, 세상 어디를 보든 그는 항상 자신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어디서든 오직 거울에 비친 자신만을 보게 되는 인간은 진짜 나르시스다. 에두아르트가 바로 이러한 인물이다. 오틸리에가 왼쪽에 두통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에두아르트는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오틸리에에게서 자신의 거울상을 볼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두아르트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 오틸리에가 에두아르트의 장원으로 온 이후, 예상한 대로 오틸리에는 에두아르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이유에 대해 소설의 서술자는 에두아르트의 “자기애”(제1부 7장)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두아르트는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의 중심에는 에두아르트 자신이 있다. ‘자기애’에 가득 찬 시선은 나르시스의 중요한 특징이다. 



에두아르트의 나르시스적 시선에 대해 오틸리에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첫 번째는 제1부 8장에 나오는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합주 장면이다. 에두아르트는 플루트를, 오틸리에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서술자는 이 둘의 합주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아내 샤를로테의 합주와 비교한다. 샤를로테는 “능숙한 솜씨와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때로는 머뭇거리고, 때로는 서두르는 자신의 남편을 위해 여기서는 멈추고 저기서는 함께 맞춰 가기도 하는” 훌륭한 연주 능력을 보여 줬다. 샤를로테의 연주는 에두아르트의 연주에 “잘 맞춘 것”이었다. 


오틸리에의 연주도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그런데 서술자는 그녀의 연주를 “잘 맞춰 연주할 줄 알았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오틸리에가 에두아르트의 연주에 맞춰 반주를 한다. 그런데 서술자에 따르면 “에두아르트가 오틸리에에게 맞춰 반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오틸리에는 이 작품을 “완전히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데, 심지어 “에두아르트의 결함”조차 완벽하게 “자신의 결함으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오틸리에는 (샤를로테처럼) 에두아르트의 결함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에두아르트의 결함을 자신의 결함으로 만든다. 결함까지도 에두아르트의 것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오틸리에의 연주는 곧 에두아르트 연주의 거울상이다. 


제1부 12장에서 오틸리에가 청서한 필사본을 에두아르트 자신의 원본 문서와 비교하는 장면 역시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의 관계를 극적으로 잘 보여 준다.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가 필사한 것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처음 몇 장은 “섬세하고 여성적인 필체로” 쓰여 있다. 그리고 점차 필체가 “보다 가볍고 자유롭게” 바뀌다가, 마침내 마지막의 몇 장을 보았을 때 에두아르트는 놀라서 외친다. “이건 뭐지? 이건 내 필체잖아!” 그리고 그는 “특별히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그가 직접 쓴 것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격정적으로 그녀에게 외친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에두아르트가 자신을 향한 오틸리에의 사랑을 확신하고 확인하는 장면이다. 오틸리에의 필체가 점차 변해서 자신의 필체와 같아졌다는 사실이 바로 사랑의 증거이다.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듯 껴안는다. 이번에도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의 필체에서 자신를 발견한다. 그리고 오틸리에는 에두아르트를 반복한다. 에두아르트는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즉 자신의 거울상을 봄으로써 사랑을 확인한다면, 오틸리에는 거울이 돼 상대방의 모습을 반복함으로써 사랑을 확인한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분명 ‘나르시스와 에코’라는 신화적 원형의 변주이다. 


신화 속의 ‘나르시스와 에코’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거울과 거울인식의 관계는 점점 더 강화돼 간다. 오틸리에와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상황에서 에두아르트가 보여 준 모습이 그러하다. 집을 떠난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때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편지를 쓴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그는 오틸리에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고, 다시 오틸리에의 이름으로 편지를 쓴다. 이러한 시도가 가능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둘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오틸리에의 이름으로 쓴 편지와 그 편지에 대한 에두아르트의 답장은 사실 어느 것이 누구의 편지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외견상으로는 필체가 같기 때문이지만, 내적으로는 모든 편지가 에두아르트의 마음이자 그 마음의 거울상이기 때문이다. 오틸리에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쓴 편지에는 당연히 에두아르트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고, 그 편지를 읽는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의 이름으로 된 편지에서 실제로는 자신을 읽게 된다. 



서로 떨어져 있던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샤를로테가 아들 오토를 낳은 이후다. 그는 소령으로 진급한 친구와 함께 샤를로테에게로 향한다. 그녀를 설득해서 소령과 결혼하도록 하고 자신은 오틸리에와 행복한 관계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제2부 13장의 내용이다. 공원의 숲을 지나 호수로 향한 에두아르트는 “이 호수의 거울 같은 수면을 처음으로 완전무결하게 바라봤다.” 이 장면은 맑은 물에 자신을 비춰 보는 나르시스를 연상시킨다. 오틸리에를 다시 찾아온 에두아르트는 여전히 나르시스이다. 


오틸리에를 만난 에두아르트는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오토를 처음으로 본다. 에두아르트는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란다. 오토를 본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이 아기가 친구 “소령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고, 이 아기의 “커다랗고 검고 또렷한 두 눈”은 오틸리에의 눈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만남에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처음으로 격정적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처음으로 마음껏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서술자는 이 순간을 묘사하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처럼 희망이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고 말하는데, 이로써 이 장면은 마치 ‘희망’의 약속인 것처럼 서술된다. 


하지만 이 격정적인 만남은 실제로는 ‘희망’의 약속이 아닌 비극의 시작이다. 에두아르트와 이렇게 만나고 헤어진 이후 마음이 “산란하고 동요된” 오틸리에는 실수로 오토를 물에 빠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오토의 죽음 이후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다시 만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서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오틸리에가 침묵에 빠졌기 때문이다. 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오틸리에는 먹을 것도 입에 대지 않으면서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에두아르트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큼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없다고 여긴다. 이러한 행복감은 오틸리에도 동일하게 느낀다. 


“그녀도 이러한 행복한 필연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서로를 향해 형용하기 어려운 거의 마법과 같은 끌어당기는 힘을 발산했다.”(제2부 17장)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서로를 향해 발산하는 ‘끌어당기는 힘’은 마법과 같다. 왜냐하면 서로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요구로 이리저리로 옮겨야 하는 경우에도, 이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서로 나란히 함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에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춰 보고, 오틸리에는 지속적으로 에두아르트 되비추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은 이렇게 ‘거의 마법처럼’ 강력하다. 


이 끌어당기는 힘이 ‘마법과 같은’ 또 다른 이유는, 오틸리에가 이미 에두아르트를 ‘체념’하기로 강하게 결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힘은 여전히 작동해 이 두 사람을 함께 존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법같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함께 있게 되는 행복함은 이 두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필연성’이다. 둘이 서로 “단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만”이 그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가까이 있음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떤 눈길도, 어떤 말도, 어떤 몸짓도, 어떤 접촉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하게 함께 있음만 필요했다. 그러고 나면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이고 완전한 편안함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 만족하는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존재했다.”(제2부 17장)



둘이 하나가 되는 것만큼 완벽한 결합이 또 있을까? 그런데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완벽한’ 결합은 왜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까?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마카리아의 서고>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잠언을 인용한다. 


“쉽게 완전히 무당파적으로 다시 묘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울은 이러한 사실의 예외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얼굴을 거울에서 결코 완전히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 정말이지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뒤바꿔 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왼손을 오른손으로 만든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 자신에 대한 모든 관찰[의 본질]을 잘 보여 주는 범례일 것이다.”


보통 거울을 통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되비춰 주는 것이 아니라, 모습의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 놓음으로써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신화 속의 나르시스가 맑은 물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봤을 때도 이러한 차이의 발생은 피할 수 없다. 만일 거울에 비친 모습이 원래 나의 모습이 아니라면, 이 경우의 거울인식은 더욱 문제적이다. 왼쪽에 두통을 갖고 있는 오틸리에, 에두아르트의 결함까지도 자신의 결함으로 만들어낸 오틸리에의 합주, 에두아르트의 필체를 너무도 닮은 오틸리에의 필체, 이 모든 것은 에두아르트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오틸리에가 산출해 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에두아르트는 거울에 비친 자신으로 인식한다. 이때 에두아르트는 자신의 거울인식이 만들어 내는 차이는 전혀 인지하지 않거나 또는 못한다. 거울인식에 담겨 있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괴테에게는 거울인식에서 차이(의 발생)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거울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거울에서 자아 인식에 도달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인식의 과정에서 차이의 발생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오틸리에도 마찬가지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에코는 원래 명랑하고 말하기를 즐겨 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헤라의 저주 이후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아야 했고, 듣는 말의 끝부분만 따라 하는 요정이 된다. 나르시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에코는 나르시스가 하는 말의 끝부분만 따라 한다. 오틸리에가 에두아르트의 거울이 된 것은 에코의 이런 모습의 변주이다. 에코의 반복은 반복되는 것의 동일한 재현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끝말만 따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소리 자체도 나르시스의 목소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지만 오틸리에는 자신이 에두아르트를 반복하고 재현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리고 오틸리에의 반복과 재현은 에두아르트에게는 거울인식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거울과 거울인식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는 이 두 인물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상대방을 통해 거울의 역할과 거울인식이라는 각각의 욕망을 채워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둘이 ‘단 하나의 사람’이 된 것은 거울인식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간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각각의 개인으로서 지닌 자신만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괴테는 1780년 9월 20일 라바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개인에 관해 진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쓴다. 이 말은 개인의 고유성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각각의 고유성을 지닌 개인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 그 개인들을 구분해 주는 경계이다. 경계는 다름의 표현이다. 하지만 경계는 동시에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괴테에게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경계 자체 그리고 그 경계 넘기이다. 이때 경계는 다름의 존중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것이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 나란히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경계이다. 경계 넘기는 다름을 제거해서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자신만의 다름을 지닌 채 중첩되는 것이다. 그런데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하나가 됐다는 말은 경계 넘기를 한 것이 아니라, 경계를 제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경계를 제거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에 경계를 제거하는 것은 파괴적일 수 있다. 진술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성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괴테에 따르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한다.”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그에게 부여한 것만, 즉 자기 자신만을, 그리고 그에 관한 그들 자신의 표상만을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경계를 기준으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이 중첩되는 방식으로 그 경계 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고, 오틸리에는 에두아르트의 거울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사랑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가 지워진다. 다름이 없어지고 ‘단지 한 사람’이 된다. 이 둘 사이에서는 ‘거의 마법과 같은 끌어당기는 힘’이 작동해, 둘을 하나로 결합해 버리기 때문이다. 경계를 지우고 하나가 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함으로 그와 나 사이의 다름이 서로 중첩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이들의 ‘완벽한 결합’은 그래서 파괴적이다. 이 두 사람이 오직 단 한 명의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 직후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오히려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 아닐까?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자기 파괴적 사랑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너’가 지닌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다름 위에 ‘나’라는 또 하나의 다름을 중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글은 『독일어문학』 제102집에 실린 예정인 「사랑: 다름의 중첩 - 『친화력』에서 “흐릿하고 열정적인 필연성”이 지니는 의미」 중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주일선 교수는 우리 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학·석사를 마쳤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독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문학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으며, 괴테를 중심으로 18세기 독일문학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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