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영화 그리고 연세, 잠자는 꿈을 깨운 열린 문에 대해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3-09-18

영화 그리고 연세, 잠자는 꿈을 깨운 열린 문에 대해

봉준호 감독의 극찬을 받은 신인, 유재선 영화감독(언더우드국제대학 경제학 08)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칸 국제 영화제에서는 프랑스 비평가협회가 주관하며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데 중점을 둔 섹션인 ‘비평가 주간’이 열린다. 전 세계 작품들 중 감독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작품만을 대상으로 선정하는데, 지난 5월 열린 제76회 칸 국제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유재선 동문의 첫 장편 영화 ‘잠’이 초청을 받았다. 5월 21일 에스파스 미라마르 극장에서 선보인 영화 ‘잠’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시작된 박수갈채는 수 분간 이어졌다. 비평가 주간 에이바 카헨(Ava Cahen) 집행위원장은 “유재선 감독의 첫 장편 ‘잠’은 졸릴 새가 없다. 고군분투하는 젊은 커플이 아이를 낳기 전과 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고 초청작 선정 이유를 밝혔으며, 봉준호 감독은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 영화이자 스마트한 데뷔 영화이다. 새로운 괴물 신인 감독이 탄생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9월 초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영화 ‘잠’은 개봉과 함께 유수의 영화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영화에 문외한이었던 유재선 동문은 우리 대학교에서 영화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대학 시절 그가 영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공부했다는 남다른 추억의 공간, 연세·삼성학술정보관 3층 미디어 커먼스(Media Commons)에서 그를 만났다. 



경제학도, 뜻밖에 영화에 빠지다

 

“제가 재학할 당시 이곳은 연세 캠퍼스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영화에 대한 갈증을 풀던 아지트였습니다. 각종 DVD와 특히 블루레이(Blu-ray)를 체계적이고 방대하게 갖추고 있는 공간이어서 여기로 오면 영화 동아리 친구들을 항상 볼 수 있었어요. 각자 영화 블루레이를 하나씩 재생해 보면서 집중했던 모습이 기억나요. ‘저 친구는 뭘 보나?’ 궁금해하면서 힐끗거리기도 하고요. 특히 저는 블루레이에 수록된 감독 코멘터리와 제작기들을 보면서 영화 제작에 대해 배웠어요. 아무래도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영화 제작에 대해 배우려고 했죠. ‘잠’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때 흡수했던 지식을 많이 활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유재선 동문은 우리 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 경제학과 08학번이다. 그는 자신이 연세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연세가 자신을 선택해 준 것이라고 말한다. ‘연세를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연대생이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고교 시절에 우리 대학교, 특히 당시에 신설된 언더우드국제대학이라는 곳에 꼭 들어가고 싶었어요. 국제적인 대학 수업들도 개설이 되면서 우리 대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을 받음과 동시에 뭔가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경제학은 직관적이면서도 수학적이어서 뭔가 세상의 퀴즈를 푸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 선택했어요.” 


경제학도 청년에게 영화는 기대치 않게 다가왔다. 유재선 동문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영화에 대해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가끔 극장에 가서 주위에서 재미있다고 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정도였는데 우연치 않게 들은 교양 수업이 그를 영화에 빠져들게 했다. 단편 소설을 쓰는 문예 창작 수업이었다. 당시 게이브 허드슨(Gabe Hudson) 교수의 단편 소설 쓰기 수업들은 매 학기마다 한두 개씩 꼭 들었고 로렌 굿맨(Loren Goodman) 교수의 각종 글쓰기 수업들도 무척 즐겁게 들었다. 퓰리처상 후보 작가였던 이창래 작가가 초빙교수로서 진행한 단편 소설 관련 수업들도 인상적이었다. 


“교수님들이 소설책들도 많이 추천해 주셨지만 영화도 참 다양하게 권해 주셨습니다. 저는 후자에 더 끌렸었죠. 아무래도 전공이 아닌 교양 수업인지라 많은 학생들이 소설 읽고 영화 보는 것을 숙제처럼 여겼는데 저는 여기에 완전히 빠져 버렸어요. 교수님께서 영화를 과제로 내주시면 저는 다 소비하고 영화 과제를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영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몰입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웃음).”



영화 제작의 즐거움을 가르쳐 준 ‘몽상가들’, 그리고 ‘봉테일’


단편 소설 쓰기 수업을 들으며 영화의 매력에 깊이 빠졌던 청년 유재선은 시나리오를 쓰는 실력을 키웠다. 영화 ‘잠’의 시나리오도 그가 썼다. 영화의 꿈을 키워 준 우리 대학교라는 요람에는 또 다른 스승들이 있었다. 그에게 영화 제작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려 준 동아리 ‘몽상가들’이었다. 


“‘몽상가들’은 우리 대학교 영화 제작 동아리입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연세인들이 매 학기마다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데 이 동아리에서 영화 만들기를 처음 배웠어요. 동아리 친구들이 제 영화 제작의 첫 스승이었던 거고요. 돌이켜 보면 그때 배웠던 게 사실 가장 핵심적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친구들이 참 체계적으로 가르쳐 줬죠. 전문 장비도, 인력도 부족했지만 저희들끼리 치열하게 그리고 낄낄거리면서 재미있게 만들었어요. 가족이 배우로 참여하기도 하고. ‘영화 만들기가 이렇게 즐거운 거구나’라는 생각을 일깨워 준 동아리죠. 그 즐거움은 지금도 영화를 만들 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유재선 동문은 2014년 재학 중 ‘몽상가들’에서 제작한 단편 영화 ‘영상편지’를 연출했고 이 작품은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와 제20회 인디포럼에서 상영됐다. 영화 ‘잠’이 칸 국제 영화제에 초청됐을 때 ‘몽상가들’에서 유재선 동문을 초빙해 특별 강연을 진행했다. 동아리 구성원들을 포함해 관심을 갖고 참석한 70여 명의 학우들 앞에서 영화 ‘잠’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비롯해 자신의 동아리 생활 등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몽상가들’이 예전보다 더 체계적이고 훌륭한 동아리로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많은 후배님들이 이 글을 보실 테니 지면을 빌어 그날 얘기한 것을 여기서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영화에 어떤 관심이나 취미만 있어도 ‘몽상가들’을 한번 경험해 보라고 꼭 얘기해 주고 싶어요. 정말 어디서도 해 볼 수 없는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유 동문은 지금도 동아리 ‘몽상가들’과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한다. 대학 시절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한 친구들 중에는 제작사, 배급사 등 영화 업계 종사자들도 제법 된다. 그는 시나리오를 쓰면 ‘몽상가들’ 출신의 친구들에게 많이 보여 준다. 친구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보며 가차 없이 비판을 받기도 하고 완성된 편집본을 보며 뜨겁게 의견을 나누다 보면 상처를 받기보다 ‘피와 살이 되는 이야기’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스스로 상처를 잘 받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동아리 친구들이 쏟아 내는 날것 그대로의 비판은 고맙게 느껴진다고 하니 믿음의 토대 위에 쌓은 우정의 힘이 발휘된 까닭이겠다. 



대학 졸업 후 유재선 동문은 봉준호 감독(사회학 88)의 영화 ‘옥자’ 연출팀에 참여하며 이른바 ‘봉테일(봉준호의 디테일)’이라 불릴 만큼 완성도 높은 봉 감독의 연출력을 배우기도 했다. 


“영화 ‘옥자’ 연출팀에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봉 감독님으로부터 뭔가를 배운다는 생각을 전혀 못할 만큼 긴장하며 일했어요. 제가 이 영화의 발목을 잡아서 망치는 일을 없게 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만 나는데 막상 영화 ‘잠’이 투자를 받고 제작 진행이 이뤄지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때 어깨너머로 배웠던 감독님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묘사하려는 제 자신을 발견을 했어요. 저는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를 무척 사랑합니다. 거의 모든 영화들을 1년에 한 번씩은 봅니다. 반복해서 봐도 너무 재밌잖아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언제나 들고요.” 


유재선 동문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그는 ‘관객으로서 영화는 거의 유일한, 그리고 최고의 취미이며 영화인으로서는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이자, 둘도 없는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일’이라고 했다. 영화 ‘잠’이 칸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신인 감독으로서 제작 현장에서 느낀 즐거움과 행복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신인 감독으로서 대단한 경력을 지닌 베테랑 배우와 스태프들과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는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배우와 스태프를 만날 때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하거든요. 한 부류는 이 프로젝트에 별다른 열정이 없어서 계속 연료를 주입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너무 아이디어가 많고 신이 나서 오히려 물을 좀 끼얹어야 되는 그런 사람들이라는데 저희 팀은 다행히 전부 다 후자였어요. 매일 아이디어가 쏟아지니 저는 정신 차리고 선택과 집중을 하면서 그들을 진정시키는 그런 역할을 했어요.” 


유 동문은 이러한 제작 현장의 열정이 영화에 담겨 있다고 이야기하며 지금 생각해도 참 신나고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무엇이 좋은지 모른다’

(‘잠’ 포스터 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잠’은 다채로운 얼굴을 갖고 있다. 누구는 공포 영화의 외피를 뒤집어쓴 사랑 이야기라고도 하고, 누구는 시종일관 긴장하게 하는 공포의 스릴러물이라고도 하고, 관계에 대한 오해와 관용의 드라마라고도 한다. 이른 바 ‘열린 결말’로 다양한 해석이 이뤄지고 있는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영화가 다양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감독으로서 참 행복한 일이지요. 저는 이 영화가 모든 것을 떠나서 재미있는 장르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극장에서 봤을 때 1분 1초도 재미없는 순간이 없게끔 열심히 설계했습니다. 저희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혼을 갈아 넣은 느낌으로 ‘이 영화는 재밌어야 한다!’라는 일념 아래 열심히 만든 작품이죠. 영화의 이야기적인 어떤 매력을 말씀드려 보자면 보통 장르 영화의 경우 구조적으로 주인공이 공포와 위협의 대상으로부터 탈출하고 멀어지고자 하는 게 이야기의 구조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약간 비트는 재미가 확실히 있어요. 본인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 위협의 대상이 또 한편으로는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본인이 가장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기도 해서 전혀 도망가거나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자의적으로 이 공포와 함께 지내면서 그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적으로 신선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단의 호평을 받는 ‘참신성’은 이렇게 색다른 ‘이야기의 힘’일 터이다.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돌파하는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가 들려준 지혜의 말에 힘입은 듯하다. 아들이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투덜거리던 시절,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무엇이 좋은지 모른다’라는 말을 들려주셨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불만, 새로운 욕구와 목적과 달성하지 못할 때의 절망감조차 놀랍게도 좋은 상황의 씨앗일 수도 있다는 그 말은 자칫 단선적으로 이어지다 닫히고 말 생각에 멋진 문을 만들고 활짝 열어 줬다.


“모든 상황이 사실 좋은지 안 좋은지 세상사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에 항상 감사하고 살아야 된다는 어떤 가르침을 주신 것 같아요. 그 가르침이 제겐 좌우명처럼 자리 잡고 있어요. 요즘 들어 이 말씀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아버지한테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랑과 존중’입니다. 아버지께서 만드신 저희 집 가훈인데요. 아버지는 항상 가족을 최우선시해 오셨고 정말 사랑하고 존중하세요. 저도 가훈을 만든다면 ‘사랑과 존중’이라고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과 존중이 저를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해요.” 



유 동문 스스로 밝히는 자신의 경쟁력이자 장점 또한 ‘무엇이 좋은지 모른다’는 열린 생각에서 만들어진 듯하다. 처음에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본인이 단점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관과 현장에서 어깨너머 배운 정보들을 끌어모아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수많은 단점들이 고개를 내밀고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제 장점은 그 단점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점 같아요. 자기 객관화가 좀 된다고 해야 될까요? 그러니까 제가 무엇이 부족한지 알기 때문에 저는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도움을 구하는 일을 꺼리지 않아요. 감독이라는 직업 자체가 본인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재능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를 들어 이런저런 단점들이 있고 보완해야 될 점들이 있다고 확실히 인지가 되는 부분이 있으면 책을 읽는다든지 뭔가를 접한다든지 도움을 얻는다든지 조언을 구하든지 해서 그걸 메우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긴 합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14년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스무 살 청년이 돼 백양로를 걷는다면 새로 해 보고 싶거나 바꿔 보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묻자 유 동문은 조금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했다. 미소 띤 얼굴에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이유는 우리 대학교에서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대학교에 오길 가장 잘한 이유는 아내를 만날 수 있어서였어요(웃음).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만나 오래도록 친구로 지내다가 결혼한 지 1년 반쯤 됐어요. 만일 과거로 돌아가 하나라도 엇나가면 지금 아내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단 한순간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겠어요. 아내는 ‘제1호 팬’이자 ‘영혼의 친구’입니다. 제가 수입도 없이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있을 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응원을 해 줬죠. 제게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차기작을 묻자 유 동문은 미스터리 범죄물이나 로맨틱 코미디 중 하나가 될 것 같은데 마음이 가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라고 했다. “개인적인 것은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고 한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처럼 차기작에도 그의 사랑 이야기가 녹아들지 않을까. 사실 영화 ‘잠’에도 유 동문 부부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인터뷰 내내 유재선 동문은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했고 자주 감탄했다. ‘감사’와 ‘감탄’의 힘으로 그가 선보일 다음 작품은 또한 얼마나 새로울지 자못 기대된다.

 

vol. 634
웹진 PDF 다운로드

연세소식 신청방법

아래 신청서를 작성 후 news@yonsei.ac.kr로 보내주세요
신청서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