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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여자 아이스하키 전설은 지금 현재 진행형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3-05-23

여자 아이스하키 전설은 지금 현재 진행형

사상 최초 2부 리그 승격의 기적,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 팀 주장 한수진 선수(기악 07)


 

지난 4월, 우리나라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 팀은 수원에서 열린 2023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전승을 기록하며 디비전 1 그룹B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번 우승으로 우리나라 대표 팀은 사상 최초로 2부 리그(디비전 1 그룹A)로 승격했다. 여자 아이스하키의 불모지에 가까운 척박한 환경을 딛고 2부 리그 입성의 역사를 이뤄낸 우리나라 국가 대표 팀. 대표 팀의 주장을 맡아 팀을 이끈 한수진 선수를 광교복합체육센터 링크장에서 만났다. 



‘음대 기악과 학생’으로 연세인이 되다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팀의 주장이자, 국내 유일 여자 아이스하키 실업 팀인 수원시청 팀의 주장인 한수진 선수. 놀랍게도 그의 전공은 기악, 피아노이다. 손을 다치면 안 되는 섬세한 피아노와 과격한 운동으로 꼽히는 아이스하키의 조합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이모가 피아노 학원을 하셔서 자연스럽게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소위 말하는 학원 뺑뺑이라고 하죠(웃음). 미술도 하고, 피아노도 하는 정도로 시작했는데, 어머니께서 피아노를 시키고 싶으셨나 봐요. 7살 때부터는 개인 레슨을 시작하면서 피아노를 전공으로 삼게 됐어요.”


피아노는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이 됐다. 초등학교 때는 예원학교를 위한 입시를, 중학교 때는 예술고등학교를 위한 실기 시험 준비를, 이후에는 대입을 위한 실기 시험을 준비하며 늘 피아노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제가 입시를 치를 때는 피아노 전공 학생들의 희망 대학이 연세대와 서울대, 이화여대였어요. 당시 가군, 나군으로 나눠서 지원할 수 있었는데 다른 학교는 보지도 않고 나군에 있는 연세대에만 지원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연세가 좋았어요.” 


 


아이스하키, 인생의 새로운 악장이 시작된 순간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점심시간에 농구나 축구를 하면서 놀았어요. 단체 생활도 좋아했고요. 오히려 혼자 방에서 엉덩이 붙이고 연습해야 하는 피아노가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처음 아이스하키를 접한 건 초등학교 때였어요. 미국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는데, 미국과 캐나다는 워낙 아이스하키가 활발하다 보니 친구도 아이스하키를 하고 왔더라고요. 그 친구와 함께 초등학교 클럽 팀에서 1년 정도 취미로 하다가 중학교 입시에 집중하기 위해 그만뒀어요.”


한동안 잊고 지내던 아이스하키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재수 시절이었다.


“재수할 때 입시 선생님께서 목동에 계셨거든요. 근데 목동에 아이스 링크가 있잖아요. 어느 날 레슨까지 시간이 비어, 시간도 때울 겸, 아이스 링크장에 들어갔는데 마침 하키를 하고 있더라고요. 링크장의 시원한 공기, 하키화 날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까지 모든 게 너무 멋졌어요.”


여전히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에만 몰두 중이던 그가 아이스하키와의 날카로운 재회를 한 순간이었다. 


“‘맞아, 나 아이스하키 했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가슴이 뛰었죠. 그리고 집에 가서 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온 집안이 난리가 났죠(웃음). 일단 대학만 들어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준다고 하셔서 마음을 잡고 원래 가고 싶었던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운명처럼 다가온 아이스하키는 순식간에 그의 인생을 바꿨다. 어린 시절부터 동반자였던 피아노 대신 아이스하키에 자꾸 마음이 끌렸다. 게다가 우리 대학교에는 다른 학교에 드문 아이스하키 팀까지 있으니 더더욱 운명같이 느껴졌다. 입학한 동시에 바로 하키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교통비와 식비까지 아껴 가며 장비를 하나씩 구매했다. 


“연세대에 합격하고서 바로 아이스하키 동아리 ‘타이탄스’에 들어갔어요. 학교 다닐 때는 수업보다는 타이탄스 활동에 더 열심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수업이 마치면 쏜살같이 바로 운동하러 갔어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미팅을 하거나, 신촌 거리에서 놀거나 이런 기억은 별로 없어요.”


손에 더욱 예민한 피아노를 전공하며 하키를 병행하는 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음대 안에서 그는 별난 학생이었다. 이해해 주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손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탐탁지 않아 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그 가운데 당시 음대 학장이었던 김영호 교수는 한수진 선수에게 큰 힘이 됐다. 김 교수는 하키를 하는 제자를 이해해 주고 많은 응원과 격려를 보냈다. 필요할 때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그는 주저 없이 김영호 교수를 이야기한다.


“평창 올림픽 전에도 연락을 드렸고, 올림픽 이후에도 인터뷰를 통해 연락을 드렸어요. 교수님 제자 모임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쉽게도 참석은 못하지만,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연세소식 인터뷰가 올라가면 링크와 함께 오랜만에 연락드리려고요(웃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일본 유학

늦게 시작했지만, 아이스하키에 흠뻑 빠진 그는 연습에 몰두하며 국가 대표에 선발될 만큼 기량을 길렀다. 이제 별난 도전이 아닌, 진정한 아이스하키 선수로 가족과 주변의 지지를 받으며 국가 대표 생활을 이어가던 한수진 선수는 25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2011년 열린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선수들과 만남이 계기였다. 아이스하키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캐나다처럼 체격이 월등히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과 한국의 실력 차이는 충격이었다.


“아시안 게임에서 만난 일본 친구들이 우리와 머리카락 색도 똑같이 까맣고, 체구도 작은데 너무 잘하는 거예요. 관심 있게 보다가 저랑 동갑인 선수와 친해지면서 일본에 놀러 간 게 계기가 됐어요. 그 친구가 클럽 팀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에 와서 하키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국이나 캐나다는 너무 머니까 거기까지 갈 용기는 안 났어요(웃음).”


일본 유학 생활은 그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엔화 환율이 최고를 찍던 시절, 1년 치 방값을 미리 내고 가야 하는 상황에 호기롭게 대출을 받고 유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현지 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에 있는 한식당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힘들었을 상황이지만 그는 일본 유학 생활을 배움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시안 게임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가족분들이 잘 챙겨 주셔서 외롭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일본과 한국의 실력 차이가 크게 났기 때문에 배우는 입장으로 가니 모든 게 신기했죠. 그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일본어도 많이 늘고,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일본은 하키 시스템과 훈련 체계가 아주 잘 잡혀 있어요. 프로 팀에서 월급을 받고 활동하지 않아도, 클럽 팀이 많아서 자기 일을 하면서 생활 체육으로 클럽 팀에서 운동하고, 그 안에서 잘하면 국가 대표에 선발되고요. 그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특별히 잘하는 선수는 개인적으로 후원받으면서 운동을 계속하더라고요.” 



아이스하키의 불모지에서, 포기 없이 퍽을 날리다

일본에서 돌아왔지만, 국내 여자 아이스하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지금은 수원시청 실업 팀이 있지만 당시 한국은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 팀만 있었다. 월급이 아닌 수당만 나오는 국가 대표 팀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선수들은 다른 생계 수단을 찾아야 했고, 직장을 다니거나, 학교에 다니며 저녁에 모여 운동했다. 수원시청 팀이 창단하며 사정은 조금 나아졌지만, 유일한 실업 팀으로 연습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경기할 프로 팀이 없어 남자 중학생 팀과 연습 경기를 치렀다. 예산이 필요한 전지훈련에도 제약이 따랐다.


“다른 종목은 프로 리그가 있어서 그걸 바라보며 올라오는 어린 선수들이 있는데 하키는 그런 인프라가 적어서 힘들죠. 선수 자체도 많지 않아서 실업 팀이 생기는 데 실제적 어려움이 있고요. 초등학교 때는 클럽 팀이 몇 백 개가 있어서 남학생, 여학생 섞여서 활발하게 운동을 해요. 근데 중학교, 고등학교에 여자 아이스하키 클럽 팀이 없으니 하고 싶어도 갈 곳이 없어서 지속하지 못해요. 대학 하키 팀이 많이 있어서 하키를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새로운 선수들이 나오고, 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매우 아쉬워요.” 


그래도 아이스하키에 대한 열정, 팀 동료들과의 우정으로 외롭지 않게, 힘차게 스틱을 들고 얼음 위를 달렸다.



수원시청 팀 김도윤 감독(왼쪽), 김태겸 코치(오른쪽)



나이를 넘어, 남과 북을 넘어 하나가 된 평창 올림픽

2018년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한수진 선수는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팀의 주장으로 선임됐다. 일반적인 엘리트 체육 코스를 밟지 않은, 어떻게 보면 아이스 링크의 이방인일 수 있는 그녀가 위아래 10년까지 차이가 나는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어린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며, 명령하기보다 자신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통솔에 선수들은 잘 따라오며 화답했고 팀워크와 함께 기량도 더욱 자라났다.


“여자 아이스하키 판이 워낙 좁다 보니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같이 뛰거든요. 지금은 U16(만 16세 이하 리그), U18(만 18세 이하 리그)도 있는데 거기서 잘하는 친구들이 올라오고 그 안에서 대표 팀에도 발탁되니까 후배 선수들도 계속 보고 있어서 선수들끼리는 거의 다 알고 지내요. 세대 차이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언니, 동생 하면서 가족같이 어울리고, 또 시합하며 어울리다 보면 나이를 잊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선수들이 힘을 낼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그의 아이디어로 선수단 로커 문에는 응원 문구가 적혀 있는 화이트보드가 붙어 있다. 서로에 대한 응원이 담긴 글과 그림으로 빼곡한 화이트보드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말해준다. 끈끈한 관계를 자랑하는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팀은 평창 올림픽을 위해 결성된 남북 단일팀에서도 감동의 팀워크를 보여줬다. 그는 전지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귀국길에 단일팀 결성 소식을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소식에 놀랄 새도 없이 얼마 안 있어 북한 선수들이 진천 선수촌에 도착했다.


“북한 선수단이 오는 날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입구에서 기다리는데 솔직히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살면서 경험해 볼 수 없는 일을 겪은 거잖아요. 처음에는 양쪽 선수들 모두 경직돼 있고, 긴장한 상태였는데 지내다 보니 다 똑같은 철부지 없는 하키 하는 소녀들이었어요. 같이 밥 먹고, 운동하고, 생활을 같이하다 보니 어색함이 금방 없어졌어요. 훈련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북한 용어가 정리된 책을 받기도 했어요. 당시 북한에는 실업 팀이 4개나 있다고 해서 놀랐어요. 정말 친구처럼 밥 먹으면서 남자 친구는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이런 얘기도 했어요(웃음). 헤어질 때 더 이상 연락도 못 하고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게 가슴에 와닿았어요. 선수들 사이에서는 참 뜻깊은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평창 올림픽 스웨덴전에서 그는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의 올림픽 2번째 골이자 순수 한국인 선수로서 첫 골을 기록했다. 남북 단일팀으로 받은 큰 관심은 이후 수원시청 팀 결성에 밑거름이 됐다. 코로나로 인해 5년 만에 한국에서 치러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그 인기는 여전했다. 수원시청의 링크장인 광교복합체육센터 링크장에서 올 4월 열린 경기는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처음 경험하는 꽉 찬 관중석과 플래시 응원은 선수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도전이 계속되는 한, 전설도 이어진다

“처음으로 세계 선수권 대회를 나갔을 때, 동점인 상황에서 연장까지 끝나고 축구로 치면 승부차기인 ‘슛 아웃’을 하는데 제가 세 번째 주자로 나갔어요. 저희가 첫 번째, 두 번째를 다 못 넣은 상황이라 제가 못 넣으면 경기가 끝나는 거였어요. 가운데에 서서 준비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아무것도 안 들리더라고요. 관중의 응원 소리, 팀의 격려 소리, 경기장 소리 모든 게 안 들렸어요. 운 좋게 골을 넣는 순간 막혀 있는 게 뚫리듯이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요. 이번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한 경기를 뽑을 수도 없이 모든 경기가 다 박진감 넘쳐서 벤치에 있는 선수들도 모두가 긴장하며 봤어요.”


처음 세계 선수권 대회에 나간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에 땀이 난다는 한수진 선수는 어떻게 하면 하키를 잘할 수 있을지 계속 탐구하며 근력과 체력을 늘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온통 하키 영상밖에 없을 만큼 하키에 진심이다.


“은퇴를 고민하는 시기가 되니 어떻게 하면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생각해요. 은퇴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 두 번째는 2부 리그를 사상 최초로 경험해 보기, 마지막으로는 최근 코로나 때문에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없었는데 2025년에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열린다면 17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메달을 따고 싶어요.”


이번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전승 우승을 기록하며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한 그는 두 번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2부 리그 유지를 위해 공격적인 하키 스타일을 보여 줬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수비 위주의 ‘재미없는 하키’를 전략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체력적인 부분을 보완할 예정이다. 2부 리그 승격이라는 성과에도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무대를 꿈꾸고 있다.


“이번 인터뷰를 보시고 여자 아이스하키에 관심과 응원을 보내 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지금 하키를 하는 학생들도 하키를 하는 순간이 즐겁고 재밌다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공부와 병행하며 하키를 계속하면 선수들도 많아지면서 새로운 길도 열리고 좋은 환경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그는 지금,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하지만 지금도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바람처럼 많은 연세 동문들이 여자 아이스하키에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보내 주길 기대한다.

 

vol.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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