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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신촌캠퍼스 소식] 김대중도서관,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동영상 공개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3-05-17

김대중도서관,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동영상 공개

5.18 민주화운동 43주년


[사진. 공개된 구술 동영상 자료 화면 캡처]


김대중도서관(관장 양재진)은 5.18 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5.18 당시 광주의 참상을 영상으로 보도해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의 구술 동영상 자료를 최초 공개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정확하면서도 빠르게 전 세계에 알렸다. 그가 남긴 자료가 없었다면 광주항쟁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일부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처럼 1980년 5월에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그는 그 이후에도 광주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는 데 공헌했다. 그는 광주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을 남긴 외국인 기자였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광주항쟁에 대한 각종 음해와 가짜 뉴스를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동영상 촬영은 2006년 1월 26일 독일의 그의 자택에서 진행됐다. 김대중도서관은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자료에 대한 해제 및 편집 작업을 거쳐 그중 11개 소주제로 구분한 총 30분 분량의 동영상 자료를 공개하게 됐다. 


11개의 구술 동영상을 주제별로 구분해 보면 광주항쟁을 취재하게 된 배경, 광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과정, 광주에서 목격한 참상, 광주항쟁 촬영 과정,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 자료를 방송할 수 있게 된 과정, 광주항쟁과 김대중에 대한 평가, 사후에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한 이유, 택시운전사 김사복에 대한 일화 등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상황을 증언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 외에 광주항쟁 관련 회고와 평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2006년 김대중도서관 구술 채록 사업에서 그의 활동 전반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는 국내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활동에 대한 증언을 남긴 바 있는데, 이는 인터뷰 기획 의도와 관련된 특정 주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김대중도서관의 구술 채록은 긴 호흡에서 역사 기록을 남긴다는 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의 활동 전반을 주제로 다뤘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광주항쟁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가치가 보편화, 세계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중대한 공헌을 했고, 특히 이번에 공개한 구술 자료처럼 항쟁 이후 남긴 각종 증언 기록도 큰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개 자료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동영상은 우리 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페이지(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EsG52elnb1uUBGvPeBfXmX)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녹취문]

(1) 광주항쟁 취재 배경 및 광주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저는 아직 도쿄에 있었습니다. 그곳 도쿄 스튜디오엔 당시 결원이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휴가를 떠났기 때문에 남아있는 독일 직원은 저와 음성 엔지니어뿐이었습니다. 저는 아침에 욕실에서 옷을 입다가 한국에서 무슨 큰 봉기가 일어났다고 들었지만,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곧 사무실로 가서 사무실 전화로 한국에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 시각에 전화가 차단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우리의 접촉인과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저는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타게스샤오(Tagesschau, *독일 ARD방송의 뉴스보도 프로그램)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타게스샤오는 내게 즉시 한국으로 가라고 허락했습니다.


당시 운전사인 김사복 씨가 일의 경과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주었어요. 저는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보고할 수 없고 현지에 가서 직접 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나서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렸어요. 도로에는 자동차가 하나도 없었고 나가는 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차로 달렸어요. 저는 안전을 위해서 독일 국기를 가져갔고 ARD 방송 뉴스센터의 표지판과 스티커를 함께 가져갔어요. 저는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처음 정지를 당했던 초소에서, 저는 군인들과 장교들에게 지어낸 이야기를 설명했어요. 우리는 아주 완강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를 했고 우회로를 거쳐 그곳으로 들어갔지요.



(2) 택시 운전사, 김사복에 대한 회고

제가 유일하게 접촉한 사람은 김사복 씨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어를 이해했어요. 그런데 이야깃거리가 많아요. 그의 영어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농담하고 크게 웃기도 했던 정도였어요. 김사복 씨에 대한 작지만 따뜻한 많은 기억들이 있어요. 그는 무척 고마운 사람이죠. 


제가 김포에 도착했을 때 


-김포요?

-네


그는 한국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준 사람이에요. 그는 당시 우리에게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첫째로 김사복 그는 돈을 벌어야 했고 우리로부터 돈을 받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둘째로, 그의 택시 사업이 어려움에 빠지거나, 자기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광주에 함께 가기로 결정한 것은 용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지, 사람들이 실제로 제게 설명한 것처럼 간암으로 죽었는지, 혹은 감옥에 구속되고 고문을 통해 죽게 된 것인지 대단히 궁금했습니다. 그는 항상 마르고, 약골이었지만 항상 기꺼이 도와주고자 했으며 유머러스하고 친절했습니다.



(3) 촬영 과정

저는 단지 속옷 밑에 지니고 있었던 필름 5~6개를 가지고 당시 상황을 필름에 담았을 뿐입니다. 날씨는 정말 더웠어요. 저는 16mm 필름 두루마리 60미터를 갖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가져가기는 힘들었습니다. 긴장된 상황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들어갔다 다시 가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인터뷰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시의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4) 1980년 5월 20일 광주의 모습

5월 20일 처음으로 광주에 왔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정말로 아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광주로 들어가기 직전에 우리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들은 우리를 트럭에 태워서 시내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어느 큰 광장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우리는 시민들로부터 음료수와 오렌지와 버터 바른 빵 그리고 과자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시위자들에게도 음료수와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트럭 위에 올라탔고, 거기서 우리는 많은 군중들을 아주 잘 조망할 수 있었지요. 이 트럭을 타고 우리는 시내로, 한 총탄 세례를 받은 광주 시내 주도로의 한 주택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처음으로 여러 명의 사망자를 보았습니다. 정오쯤으로 생각됩니다. 사망자들은 트럭에 실렸습니다. 저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제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재삼재사 강조해야 합니다. 


제가 기기서 본 이 첫 번째 사망자들 중 한 명은 젊은 대학생이었는데, 얼굴에 심하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후에 병원에서 이 많은 사망자들과 젊은이들이 모두 특히 머리 관통상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의 저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고 그것은 매우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었는데, 사망자들은 밤에 살해되었으며 군대의 야간투시경을 가지고 조준사격으로 사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야만적인 일이었습니다.



(5) 처참한 병원의 모습

통로에는 피를 흘리며 링거를 맞고 있는 부상자들로 가득했어요. 그것은 보기가 힘든 끔찍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혼란스럽지 않았고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병원 밖에서는 천막이 있었고 거기엔 사망자를 보관한 관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서방에서(저의 경우 독일에서) 온 외국인이 취재를 하고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관을 열어주고, 제가 카메라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 때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계속 찍었지요. 따라서 이 장면들도 갖고 있습니다. 이 장면들은 너무 끔찍해서 일부는 도큐멘터리 필름에서 빼 버렸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아카이브에서 더 이상 찾을 수 없어요. 하지만 충분히 많은 영상들을 저는 갖고 있지요. 저는 사적인 사진들도 많이 찍었어요. 그러나 이 순간 저는 대단히 충격을 받았어요. 당신은 그것을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무언가를 독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것을 반드시 보여줘야 하고, 따라서 찍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촬영을 했습니다. 여인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런 장면이 저 역시도 비탄에 빠지게 했어요. 그리고 영상을 찍는 것을 중단해야 했어요. 더 이상 찍을 수가 없었어요. 참으로 슬프고 끔찍한 일이었어요.


한운석: 당신은 자식들을 찾는 부모들도 보았지요.


힌츠페터: 네


한 게시판이 있었고 거기에 이름들이 적힌 쪽지들이 붙어있었어요. 저는 그걸 읽을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내 아들을 찾습니다.’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사망자 수와 이름들이 공개되었어요. 하지만 그 전체 명단은 도청에 게시되었어요. 


한운석: 도청이요?


힌츠페터: 네 도청이요.


체육관 앞 왼편에 커다란 광고판 벽이 있었어요. 그 옆에 저녁 5시경 사람들이 모였어요. 거기서 저는 필름을 찍었어요.



(6) 광주에서 촬영한 필름이 전 세계에 방송될 수 있게 된 과정

저는 촬영한 자료인 60미터 필름을 원래의 테이프 보관통에 인식 번호를 붙여서 다시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 필름으로 보이도록 하려 한 것이었지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필름을 셔츠 밑에 숨겼습니다. 모양이 좀 이상했지만, 그것을 바지 주머니에도 넣었어요. 


저는 한 군인이 우리 차 트렁크를 조사하고 박스도 뒤지는 사진도 갖고 있어요. 거기엔 촬영한 필름들도 들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 군인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고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저는 조선호텔에서 잤어요. 그날 서울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으니까요. 저는 또한 필름을 가지고 공항을 뚫고 나가는 것이 겁이 났어요. 


그런데 저에게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첫째로 자료를 어떻게 했는가의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나의 동료인 위르겐 버트람(Juergen Bertram)이 1980년 9월 17일 김대중 사형선고에 대해 보도하면서 ‘케이크 통 속의 너무나 중요한 자료’라는 기사를 썼지요. 제가 그때 영상 편집을 같이 했습니다. 그 보도에는 제가 찍은 영상이 들어있어요. 저는 영상 자료를 케이크 통에 넣었지요. 강력한 뢴트겐 촬영이 영상 자료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아주 재밌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당시 저는 마음이 몹시 떨렸어요.


또한 저는 선물포장지를 준비했는데, 한쪽은 다채로운 색깔들과 은빛이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오늘날에서도 결혼 선물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빨강, 초록, 노란색 줄무늬로 어우러진 색동 포장지였습니다. 그것은 알루미늄 포장지였는데 한 번 더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소에 비해 안전요원이나 공항 직원들은 느슨했고, 직원들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지도 않아 검사가 엄격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거의 마지막 순간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 뛰어들어간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선물은 엑스레이 스캐너 검사를 통과하지 않았어요. 선물이 눈에 띄게 화려해서 의심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결혼식에 초대받은 정장 차림의 직장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사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가서 필름만 가져다주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세 시간 뒤에 저는 도쿄에 도착했고, 동료들이 저를 환영했고 저는 그들에게 이 과자 상자를 선물로 넘겨주었지요. 그 자료는 즉시 플라스틱 자루에 담겨 주소를 적은 후 승무원을 통해 독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송신기를 통해 위성으로 자료를 브뤼셀,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에 있는 뉴스 센터로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유로비죤에 송출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방영되었습니다. 출처는 ARD Studio Tokio라는 이름으로요. 


그리고 심지어 일본으로까지 보내졌습니다. 그건 우리가 도쿄에 있는 NHK와 협력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



(7) 5월 23일 두 번째 광주 방문

저는 5월 22일 목요일에, 서울에서 도쿄로 갔다가 동일한 비행기로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요. 저는 이날 저녁 서울에 있었고 5월 23일에 광주로 갔어요. 


거기서 우리는 차단초소를 통과하는데 어려움을 가졌어요. 코리아 헤럴드 신문에 외국인은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기사가 있었어요. 저는 이것을 오려서 안쪽 호주머니에 넣어두었어요. 그것이 신문 머리기사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도움이 되리라 믿었어요. 


군대의 첫 번째 검문에서 저는 기사를 보여주고 우리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내 물건들이 모두 광주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광주로 들어가야 한다고 저는 설명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우리는 첫 번째 때처럼 고속도로가 아니라 논이 있는 들길을 안내받아 광주에 들어갔어요. 


5월23일 광주에 있었고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5월 24일 토요일에 저는 서울로 돌아갔어요. 


도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거기서 다양한 사람들이 연설을 하고 애국가 제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인싱적이었습니다. 저는 YMCA 건물 옥상으로 가서 그곳으로부터 필름을 찍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다행히 여러 소절이 불렸습니다. 애국가 제창 말이에요. 


그 뒤 저는 오전에 다시 시신들이 안치된 체육관(유도장)에서 촬영을 했어요. 거기서 관들이 담긴 영상이 만들어졌어요. 관들이 몇 개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거기서 저는 움직이는 카메라로 촬영을 했는데 많은 필름이 소요되었어요. 그러나 저는 이 두 번째 방문에는 많은 필름을 갖고 갔어요. 그리고 관마다 하나씩 촬영했고, 얼마나 시신들이 많았는지 알 수 있도록 관의 번호도 볼 수 있게 촬영했습니다.



(8) 5월 27일 이후 세 번째 광주 방문

한운석: 세 번째 방문에 대해서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그것이 언제였고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힌츠페터: 제 생각에는 28일이었습니다. 아주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들어간 적십자 트럭들과 함께 다시 광주로 들어갔어요. 저는 그래서 오래 지체되지 않고 자동차로 들어갔어요. 운전수는 다시 김사복 씨였죠. 


우리는 직접 도청으로 갔어요. 거기서 저는 군대의 철거 작업을 보았어요. 군대는 모든 출입구들을 청소하고 소독을 하고 몇 군데 남아있던 혈흔을 제거했어요. 이 모든 것을 저는 촬영했어요. 거기서 소독약으로 커다란 연기를 뿜어대던 차량 한 대를 보았어요.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학생들이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출구에서 군부대의 통제를 받으며 무릎 꿇고 기어야 했던 광경을 보았습니다. 저는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던 영안실도 쳐다보았는데 다 치워져 있었어요. 그밖에도 저는 모래주머니들을 보았는데, 그것은 도청 앞에 세워진 군대의 보호 장벽이었어요. 건물 앞에는 열기 속에 기관총과 헬멧을 가진 초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벽을 이용했고 사진도 찍고 그 위에서 필름도 갈아 끼웠어요. 



(9) 광주항쟁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과 순간

우리를 트럭에 태워서 시내로 데려다준 학생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어요. 그들은 분명히 봉기 동안 목숨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시민위원회가 군대와 통화했던 날의 그 불확실성. 군대가 지금 밀고 들어올지, 들어와서 시민군을 쓸어버릴지에 대한 불확실성. 저는 제 스스로의 신변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었어요. 제가 일을 할 때는, 즉 촬영을 하고 조직을 할 때 저는 아무런 두려움을 갖지 않았어요. 그러나 저녁에는 두려움을 가졌어요.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어요. ‘아마도 오늘 밤은 아니겠지.’ 그건 대부분 어두워진 밤중이나 새벽에 발생하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이틀 뒤였죠. 저는 이 끔찍한 장면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병원과 시신들이 놓여있던 홀이 화염에 휩싸였고 관 옆에 서서 절망적으로 울부짖던 가족들을 말이에요.



(10) 광주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김대중

그들은 마침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기를 원했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를 원했어요. 그것은 실현될 수 있는 이상이었어요. 민주주의 역시 이상이 아닐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독재 대신 민주주의를 갖는 것은 아무튼 이상적인 목표였어요. 


그것은 한국에서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았던 중국의 천안문 사건과 비교해서, 이 사건은 모든 학생 데모들을 거쳐서 이런 과정의 정점이자 전환점이었고, 결국 야당이 정권을 장악하도록 만들었지요. 저는 김대중이 두 번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먼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됐고, 그 다음에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지요. 사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마찬가지이지만, 저는 김대중을 더 선호했습니다.



(11) 사후에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한 이유

저는 매우 아팠어요. 그러나 얼마나 심한지 알지 못했어요. 저는 그때 상태가 안 좋았는데 실제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때에야 그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계단 하나도 올라갈 수 없었고, 몇 주 동안 침대에 묶여 있었어요. 아내인 에델트라우트는 킬 대학 병원의 내 곁에 있었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광주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묻혀있는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 말이에요. 근본적으로 저는 거기서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젊은이들, 그리고 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했어요. 저는 이걸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고 이 생각은 무언가 저의 잠재의식 속에 뿌리를 내렸어요. 저는 작년에 광주에 있었고, 재단에서 그걸 위해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수행했어요. 저는 살아있을 때 제 신체에서 채집한 유물을 거기 두었어요. 그래서 저의 일부가 함께 묻힐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저도 그곳에 속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어요.

 

vol.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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