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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일하는 여성과 함께 가야 지속 가능한 사회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2-11-24

일하는 여성과 함께 가야 지속 가능한 사회

일하는 여성들의 멘토, 한국코칭경영원 리더십 코치 윤여순 박사(도서관학 74)

/ 전 LG인화원 전무, LG아트센터 대표




국내 최초의 여성 임원

윤여순 동문은 LG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 CEO의 타이틀을 가졌다. 많은 여성들에게 그는 닮고 싶은 멘토, 꿈꾸고 싶은 롤 모델이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윤여순 동문의 성공 스토리는 넘지 못할 산과 같아 보이기도 한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일하는 여성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사회 현실의 불편함, 부조리함,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단함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는 먼 일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그 뒤에는 20년간의 묵직한 이야기가, 그리고 외로웠지만 빛났던 시간 속에서 깨달은 통찰이 있다. 대기업 CEO로 은퇴 후 현재는 많은 리더들의 리더십을 성장시키는 리더십 코치로서 맹활약하고 있는 그는 더 많은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과 통찰을 아낌없이 들려주고 있다. 



한발 앞선 선택들 

늘 남자아이들이 반장을 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 학교에서 최초로 여자 전교 회장이 된 데서부터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다는 윤여순 동문의 진취적인 면모는 우리 대학교의 입학과 캠퍼스 생활에서도 드러난다.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같은 재단의 여대로 진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는 자유로운 학풍과 함께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원했고 그곳이 연세였다. 학과를 지원할 때 주변에서 여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가정과나 간호과를 가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의 안목은 남달랐다. 당시 우리 대학교의 문과대학이 크게 확장되는 시점이어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새로운 학과가 기대됐다. 졸업 후 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신학문이지만 동시에 취업률도 높은 도서관학과를 택했다. 단순히 말과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좋아하는 그의 성향과도 잘 맞았다. 입학 후 그가 선택한 동아리는 놀랍게도 탈춤반이었다.


“동아리 활동이 대학생활의 진수라고 생각했죠. (웃음) 대강당에서 모든 동아리들이 나와서 소개하는 행사를 하는데 뭐 좀 재미있는 게 있을까 해서 갔는데 탈춤반이 눈에 띄었어요. 남들은 영어회화반, 봉사반 이런 동아리를 드는 추세였고, 당시 서양 문화가 주류였어요. 우리 문화에 ‘탈춤’이라는 게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던 시기였는데 신촌 대학생들이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탈춤을 재발굴해 낸 것이죠. 그런 게 참 좋았어요. 좀 앞서가는 의식적인 부분에 매료됐었죠.”


그러나 탈춤반에 가입하겠다고 동아리방에 찾아간 순간, 그를 반긴 것은 놀랍고 의아해 하는 선배들이었다. 탈춤반에서도 그는 최초의 여성 동아리원이었던 것이다. 방학에는 전국을 돌며 탈춤 전수자에게 직접 배우기도 하면서 그간 주목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우리 문화를 조명하며 자부심이 컸다. 그의 대학 시절은 앞선 배움과 문화를 누리며 즐거웠던 추억들로 가득하다. 

 


늦은 공부, 멈추지 않는 고뇌의 시간  

윤여순 동문은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잠시 하다 결혼 후 유학생의 아내로 남편을 따라 미국 아이오와에 갔다. 유학생 아내로서의 단조롭고 지루한 삶에 한계를 느낄 무렵 우연히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의 배우자에게는 무료로 9학점을 이수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공짜로 영어 공부나 해볼까 해서 수강한 과목에서 A+를 받았다. 담당 교수의 권유로 다시 공부에 도전해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어쩌다 시작됐지만 누구보다 절박하게 공부한 시간이었다.


“정식으로 석사 과정 공부를 시작하면서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힘든 점도 많았죠. 그런데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될 것 같았어요. 논문을 쓸 무렵에는 미국에서 학부 과정부터 석사를 거쳐 박사 과정까지 하며 공부에 진이 빠진 남편이 슬럼프를 겪었는데 제게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어요.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죠. 겨우 쓴 논문 초고를 들고 간 교수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교수님이 묵묵히 다 들으시더니 저를 바라보며 뜬금없이 점심으로 뭘 먹었냐고 하시더라고요. 베이글 한 개를 먹었다고 하니 적어도 두 개는 먹어야 힘이 난다며, 단호한 목소리로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이 논문을 빨리 끝내는 일이야.”라고 하셨어요. 순간 가슴속에서 어렵지만 뭔가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렵게 끝낸 석사 논문을 끝내고 4년여의 박사 과정까지 이어졌지만 고뇌는 끝나지 않았다. 주변에서 ‘사십 넘은 여자가 박사 학위를 받은들 경험도 없고 나이도 많아서 어느 대학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며 이런저런 실패담을 들려줬다.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작했으니 반드시 끝내 보겠다고 그는 마음을 다잡았고, 결국 박사 학위를 들고 귀국했다. 

 

 



시작하면 끝을 보는 일, 결과를 책임지는 일 

한국 사회에서 대학교수 자리 구하기는 말 그대로 쉽지 않았다. 매일 대학교수 채용 공고를 검색하며 여러 대학의 시간강사로 일했다. 그러다 맡게 된 한 기업 연수원의 프로젝트 발표회에서 HR 임원과 연을 맺고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됐다. 한 번도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거절했다. 하지만 그 임원이 주선한 연수원 원장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인생을 바꿀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연수원 원장님을 만나보고 결정하라는 말에 마지막 예의라 생각하고 만났어요. 그런데 그 원장님께서 제게 왜 교수가 되고 싶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머리가 하얘졌어요. 사실 저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때 그분께서 ‘기업은 시작이 있으면 끝을 내야 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곳’이라며 기업에서 결과를 온전히 책임지는 생활을 하다 보면 전문성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말이 아니라 행동과 결과로 얘기하자는 평소 제 철학이 무색해졌죠.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다 결론을 냈죠. 입사하기로요.”


그렇게 LG인화원에서, 그것도 박사 학위를 가진 마흔 살의 여성 부장으로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되다 

꽤나 큰 각오를 했지만 회사 생활은 고달팠다. 당시는 기업 내에 부장급 이상의 여성 리더가 드물었던 시기. 나쁜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그는 마치 외계인인 것처럼 낯설고 불편한 존재 자체였다. 조직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성장해 온 이들과 심리적인 이질감이 느껴졌고 공부만 했기에 기업에서 배워야 할 것들은 많이 벅찼다. 무엇보다 특별한 케이스인 ‘여성 박사’로서 내보여야 할 성과에 대한 압박감도 컸다.


“고민을 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차별적인 일로 성과를 내고 싶었어요. 온라인 교육 시스템을 떠올렸죠. 바쁜 업무 중에도 연수원까지 오지 않고 온라인으로 틈틈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어요. ‘일하면서 배우는’ 개념이었죠. 당시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일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야심 차게 오픈을 했고 제법 이슈도 됐어요. 하지만 막상 현장의 반응이 안 좋았어요.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일하기도 바쁜데 회사에서 공부까지 하라니 이중 부담이었던 것이죠. 잘 정착이 되지 않았어요. 애물단지가 됐죠. IMF가 터지면서 그룹사 외부로 교육 과정 판매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비난까지 받게 됐고요. 자존심은 바닥을 쳤고 결국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래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하나는 남기고 싶어 사표를 내진 않았죠.”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이버 아카데미를 정착시키기 위해 가시방석 같은 자리를 지키며 마음을 비워 나가고 있던 때,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책임을 다하며 묵묵히 고군분투하던 그의 모습을 보고 마침 그룹 차원에서 여성 임원 선발을 준비하고 있던 연수원 원장이 임원 후보로 그를 추천했다. 인사팀의 보고를 받고 최종 결정권자는 입사하고 특별히 한 일이 있냐는 질문을 던졌고, ‘일하면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매우 미래 지향적인 교육 시스템인 사이버 아카데미’를 개발했다는 답에 ‘딱 되었다’며 흔쾌히 승인했다.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기업에서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된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활발했지만 유리천장이 확고하던 시기, 윤여순 동문의 LG그룹 최초 여성 임원 발탁 소식은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워킹맘들, 그대로도 충분하다 

기회는 도전의 시간과 맞물려 있다.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 ‘최초’의 꼬리표를 달고 다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늘 그렇듯 최선을 다해 회사의 성장에 기여했고, 그가 외로웠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여성 직원들에게는 믿고 따를 수 있는 길이 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일하는 여성임과 동시에 엄마이기도 했다. 그 두 개의 정체성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은 그에게도 너무 치열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구워준 쿠키를 먹으며 엄마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소원’이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 앞에서 그는 정말 그만둬야 하는지 인생 최대의 고민을 했던 순간도 있다. 일을 그만두는 대신, 그는 딸에게 아무리 바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들어주는 시간을 갖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워킹맘들은 늘 죄책감에 시달려요. 내가 집에 있지 않고 일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아이들 교육이 뒤떨어지지 않을까? 하고요. 저는 그러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진짜 교육은 늘 접하고 보는 것이죠.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 그 자체가 아이에게 좋은 교육입니다. 저 역시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실행력이 있고 도전적이다.’ 이런 말을 듣곤 하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도전 정신을 가지며 살아라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그저 어머니의 삶을 보며 배웠던 것 같아요. 서른넷에 남편을 잃고 딸 셋을 혼자 힘으로 기르셔야 했던 저희 어머니의 삶은 얼마나 고달프셨겠어요. 양호 교사로 일하시며 딸 셋을 보란듯이 키우고 싶어서 어떤 일이 닥쳐도 주저앉아 불평하거나 울지 않으셨어요. 그저 받아들이고 꿋꿋이 최선을 다해 하셨어요. 그게 고스란히 제가 배운 산 교육이고, 그걸로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일을 놓지 않고 최초의 여성 임원에서 다시 최초의 여성 CEO 자리까지 오른 후 윤여순 동문은 20년의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마치고 은퇴 후 리더십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코칭이나 강연 현장에서 만나는 워킹맘들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고단하다. 그래서 그는 “이대로 충분하다.”며 과거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워킹맘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힘을 실어주는 일에 더욱 열심이다. 


“얼마 전 제가 간호사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간호사라는 직업은 3교대로 일하니 워킹맘 중에서도 가장 힘든 직종 중 하나예요. 제가 거기서 전업주부처럼 아이를 관리하지 못한다고 걱정하지 마시라 했어요. 간호사 선생님들은 우리 애가 아픈데도 밤교대를 나와서 일하며 다른 아픈 아이를 돌보시잖아요. 그 마음이 어떻겠어요. 하지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하시다 했더니, 강연 후 한 분이 오셔서 딱 자신의 이야기 같다며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이런 워킹맘들이 너무 많아요.” 

 

 

누군가의 성장 여정을 돕는 행복한 일 

현재 윤여순 동문이 하고 있는 ‘비즈니스 코칭’은 누군가의 성장 여정을 돕는 일이다. 그는 주로 리더들의 리더십 개발을 돕는 코치로 1:1 코칭이나 그룹 코칭 등을 아우르며 활동하고 있다. HR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 오면서 그는 천직인 듯 참 좋았다. 사실 교육 부서는 돈을 버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한직으로 여겨지기 일쑤지만 그가 기업의 교육을 접해 보니 너무나 할 일이 많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됐다. 특히 리더가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 깨달아 가며 접했던 것이 코칭 리더십. 이것이 리더십의 궁극적인 답이 되겠구나 싶었다. 은퇴 후 후배들의 권유로 코칭 자격증을 취득했다. 처음엔 ‘이 나이에 자격증을 써먹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좇다 보니 이렇게 적성에 딱 맞는 직업이라 느껴지는 ‘리더십 코치’로 활기차게 일하고 있다. 그의 일정표는 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빼곡하다.


“리더들은 성과에 대한 압박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항상 숫자가 먼저이다 보니 다그치기만 하게 되고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죠. 리더들의 영향력이 사업의 미래나 성과를 가를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걸 이뤄내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죠. 더 동기부여가 되고 행복하게 일하면 더 잘 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런 고민을 들어주며 스스로 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죠. 제가 기업에서 일하며 리더들의 그런 고민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이 너무 보람이 있어요.”

 


일하는 여성과 함께 가야 지속 가능한 사회 

윤여순 동문이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열정을 다하는 순간은 여성 리더들을 마주할 때다. 지금은 그가 ‘최초’의 타이틀을 달고 여성 리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남성 중심적인 환경에서 성취해 냈던 때보다는 많은 여성 리더들이 배출되고 있지만 여전히 일하는 여성들의 고민은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요즘 기업에서 지속 가능을 위한 ESG (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가 화두잖아요. 이제 모든 기업들이 ESG 경영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예요. 사회를 의미하는 Social 분야에서 중요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여성이에요.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낙후돼 있는 분야 중 하나가 여성이라는 거죠. 특히 우리나라는 여성 문제를 너무 소홀히 하고 있어요. 이젠 아들딸 차별 없이 교육을 받잖아요. 교육 인프라도 뛰어나고요. 그런데 많은 투자, 교육을 받았던 똑똑한 여성 다수가 사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일하는 여성이 30%도 안 돼요. 사회적 낭비죠. 똑똑한 인재들이 꿈도 야망도 많은데 집에서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어떻겠어요? 아이의 성공을 내 성공으로 여기고, 아이를 통제하려다 보니 문제가 생기죠. 또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지원금을 주잖아요. 그런다고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봐요. 그동안 육아 시스템에 투자했더라면 달라졌을 거예요. 예를 들어 초등학교와 같은 기존 교육 인프라를 활용해서 부설로 육아 시스템을 갖춘다면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서 일할 수 있고, 저출산 문제의 해결로도 이어질 거예요.”


그렇게 그는 보다 큰 그림에서 조직과 사회가 여성 문제를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더 많은 한국 여성들이 사회로 나와 더 큰 에너지가 되고 더 뛰어난 경쟁력이 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만의 리더십은 없다 

지금도 일터에서 많은 여성들은 당혹스럽다. 그의 말처럼 일터 대부분의 제도, 관습, 시스템 모든 것들은 남성들이 구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사회에 나와 불합리한 현실을 체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 불합리함에 반기를 들다 보면 드세다, 리더십이 없다, 조직 생활이 어렵겠다 등 냉혹하고 부당한 평가를 받는다. 이런 반응들에 자존감과 자신감은 점점 낮아진다. 윤여순 동문은 코칭을 하며 그런 여성들을 너무도 많이 봐 왔다. 그때마다 그는 조금 더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싸우기보다는 우아하게 이기는 것이다. 


“시스템 안에서 여성이라서 소외된 존재로, 소수자로 겪는 일들이 많거든요. 외톨이가 된 기분일 거예요. 하지만 단번에 극복될 상황도 아니죠.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데 변화는 너무도 천천히 일어나죠. 그럴 때 너무 흥분하거나 싸우면 안 돼요.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때론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좀 더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보고 내가 어떻게 이들을 설득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낼까 생각해 봐야 해요. 저 역시 그런 고민들을 실제로 너무 많이 했어요.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내 페이스를 찾아야 해요. 서로 더 소통하고 화합해야죠. 그러면 상대의 입장이 이해가 되죠. 상대 역시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너그럽게 상대에게 당신은 알지 못하고 하는 일 같은데 내게는 이런 일이고 상처야. 이렇게 설득력 있게 대처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릇이 큰 사람이 돼요. 또 남성들이 보는 잣대로 여성을 나누고, 편견으로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넘어가지 마세요. 무조건 나도 남성들하고 똑같이 할 수 있다는 마음도 경계해야 해요. 그저 자신의 모습으로 나답게 성취하고, 극복해 나가야죠. 나만의 리더십, 좋은 리더십과 나쁜 리더십은 있지만, 남성과 여성의 리더십이 따로 있진 않아요.”


더불어 그가 여성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은 여성들이 함께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다. 개개인의 여성이 주먹 불끈 쥐고 의욕과 도전 정신만으로 헤쳐 나가기는 쉽지 않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목소리를 높여 주는 일은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든든한 응원이 되기에. 

 



We Never Know

한국 기업에서는 한국 여성만 모아 놓고 여성 리더십 강의를 하는데 외국 회사는 간혹 관심이 있는 남성도 함께 들어와 강의를 듣고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윤여순 동문은 그럴 때마다 언젠가는 남성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 여성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싶은 꿈을 가지게 된다. 그때 많은 남성들에게서 어떻게 여성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여성과 잘 협업할 수 있는 방법, 어떻게 여성의 잠재력을 깨우고 리더로 키워낼 수 있는지 질문을 듣고 싶다. 그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단절된 채로 서로의 부당함을 비난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렇게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세상의 앞이 다 꽉 막힌 것 같지만 오늘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게 인생이에요. 그러니 용기를 내고 자신을 믿으세요. 우리는 언제 어디서 그 문이 열릴지 모르잖아요? 제가 자주 쓰는 말이에요. We Never Know.“


누군들 알았을까, 그 역시 암담했던 미국 유학 시절 만났던 작은 가능성이 어쩌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되고, 그것이 겁 없이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돼 ‘국내 최초의 여성 임원’이라는 성취하는 삶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그리고 기업을 떠나 다른 이들의 성장을 도우며 스스로도 함께 성장해 나가는 삶을 살게 됐을지, 그 역시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내일 만날 또 다른 저마다의 세계,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이다. 모두의 가능성은 무한함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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