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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농구의 전성시대에는 언제나 그가 있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2-10-25

농구의 전성시대에는 언제나 그가 있다 

전설의 슈터, 문경은 KBL 경기본부장(체육교육학 90)



한국 농구의 대표 슈터 

90년대 중후반, 많은 스포츠 중 가장 인기를 끌었던 종목은 단연 농구이다. 농구장은 열성 팬들이 가득 찬 콘서트장처럼 열기와 함성으로 뜨거웠다. 인기의 중심에는 연세의 농구팀이 있었다. 우리 대학교 농구팀 멤버 한 명 한 명은 모두 스타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경은 동문은 덩크슛이 가능한 힘과 탄력, 날카로운 감각으로 3점 슛을 성공시키는 탁월한 실력의 전천후 슈터로서 최고의 인기를 얻으며 농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농구 역사상 대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주장으로서 농구 대잔치 우승을 이뤘고 프로 입단 후에도 다수의 우승 게임의 주역이었다. 그가 넣은 3점 슛은 무려 1,669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전설의 기록이다. 농구와 함께한 삶, 뛰어난 실력을 갖춘 스타플레이어로 농구의 전성기를 만들고, 소통의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으며 이제 KBL프로농구연맹 경기본부장으로 스포츠 행정가의 삶을 시작하는 문경은 동문. 농구와 함께하는 그의 전성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라이징 스타들의 팀, 연세 농구팀 

“고등학교 시절 저희 학교 농구팀 선배들은 대개 경희대로 진학했어요. 저도 그러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졸업 무렵 감독님이 가고 싶은 대학을 말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많아 이런저런 경우를 생각해 봤지만, 감독님과 부모님 조언을 듣고 연고대 중 한곳을 고민했어요. 둘 다 최고의 팀이었죠. 당시만 해도 운동계는 좀 엄하고 규율이 센 문화가 있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싫었는데 연세대 최희암 감독님을 보면 딱딱하기보다는 지략가로서 선수들을 이끄셨고 분위기도 자유로워 보였어요. 그래서 연세를 선택했죠.”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있었다고 한다. 전국 고등학교 농구팀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입학하는 연세대 농구팀은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던 것. 그들 중에서도 몇 명만 성공할 수 있었다. 연세에는 고등학교 선배들도 거의 없어 다른 동기들처럼 끌어 주고 응원해 주는 탄탄한 선후배 관계도 없었다. 원해서 입학한 대학이지만 그렇게 1학년 때는 외톨이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사실 그는 입학 전에 미리 훈련에 합류하며 그만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고3 때 입학 예정자로 팀에 합류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계훈련을 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농구를 그만두고 공부하겠다고 했죠. 그때 최희암 감독님께서 절 다잡아 주셨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센터, 파워포워드, 스몰포워드 등 다양한 포지션을 다 했어요. 제가 잘하면 우승을 하는 거고, 못하면 지는 게임이었죠. 그런데 최 감독님께서 학생 농구와 달리 성인 농구에서는 혼자 하면 안 된다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당시에는 조금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그때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밖에 모르는 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 제가 슛 감각이 좋으니까 전문 슈터로 활동하면 좋겠다고 권유하시며 길을 찾도록 이끌어 주셨죠. 참 감사한 일이에요.”


전국의 최상위권 선수들이 모인 만큼 자부심도 쌓여갔다. 다른 학교 선수로 30~40분 뛰는 경기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세대 팀에서 5분, 10분이라도 뛰는 것은 그 밀도와 수준이 남달랐다. 그런 장점들을 몸소 체험하고 느끼며 그는 대학 생활을 채워나갔다. 

 

 

결코 질 수 없는 승부, 연고전 

연세의 모든 스포츠팀에게 결코 지지 않아야 한다는 승부욕이 충만한 게임은 연고전이다. 프로 리그가 없던 시절, 실업팀과의 경기에서도 지지 않은 대학팀들도 다수였기에 그중 최고로 꼽히는 연대와 고대의 라이벌 전은 언제나 주목을 끌었다. 농구팀은 연고전을 위해 무려 100일 전부터 합숙훈련에 매진하고 거울이나 컵처럼 깨질 만한 물건은 조심했을 정도다. 문경은 동문은 쟁쟁한 선배들이 가득한 팀에서 드물게 1학년 때부터 주축 멤버로 참여했을 만큼 키플레이어였다. 그런데 그는 첫 연고전 선발에서 제외돼 큰 실망을 느끼게 된다.


“1학년 때부터 여러 경기에서 베스트 선발로 기용돼 뛰었기 때문에 연고전 때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요. 계속 대회를 뛰었고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베스트 선발이 안되고 10분 정도 투입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알게 됐죠. 연고전은 굉장히 치열한 만큼 선수들도 흥분하게 돼요. 경기장은 온통 파란색과 붉은색이고 함성소리 때문에 옆 선수의 말소리나 휘슬 소리조차 안 들리죠. 몸싸움도 치열해요. 감독님께선 그런 분위기를 경계하신 거예요. 실제로 코트에 들어가서 2점 슛을 날렸는데 저는 들어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림을 넘어가더라고요. 점프가 필요 이상으로 된 거죠. 저도 모르게 흥분했던 거예요. 이후로는 곧 제 플레이를 되찾았지만 그때를 잊을 수 없어요. 재학 중 4년 내리 연고전에서 우승했죠. 뿌듯했고 기억에 남는 추억이죠. 연고전은 비공식경기이기 때문에 경기 중 싸움이 나면 무승부 처리가 되거든요. 당시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고려대 팀이 경기 중 거칠게 싸움을 걸어왔거든요. 그러면 그냥 맞는 거예요. 최희암 감독님이 타임아웃 때 작전 설명은 안 하시고, 참으라고만 하셨죠. 무조건 참으라고. 그렇게 40분을 버텨 이겼던 경기도 기억이 나네요.”



재학 시절 문경은 동문은 정확한 슈팅력과 3점 슛, 강심장의 클러치 득점력으로 발군의 실력을 뿜어냈고 

할리우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을 닮은 수려한 용모로 ‘람보 슈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 출처 : 연세대학교 기록관

 



주말에만 외출할 수 있는 고된 합숙 훈련, 늘 승패에 울고 웃어야 하는 승부의 세계 속에서 운동선수로서의 대학생활이 갑갑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문경은 동문은 연고전을 떠올리며 충분히 즐거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었다고 한다.


“학과 수업은 들었지만, 저는 MT라는 걸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운동하러 걸어가면 다른 과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요. 그런 낭만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참 부러웠죠. 그래도 훗날 동문이라는 반가움으로 인연이 시작된 아내(음악대학 피아노과)를 만나게 됐고, 이른 나이에 결혼하며 삶의 안정감을 갖게 됐어요.”

 


가장 짜릿한 승부, 인생 최고의 경기 

프로농구 출범 전 한국 농구 최고의 팀을 가리는 농구 대잔치. 1994년 우리 대학교 농구팀은 문경은 동문을 주축으로 우지원, 이상민, 서장훈 선수와 함께 유수의 실업팀과 대학팀을 이기고 최종 우승했다. 대학팀이 농구 대잔치 정상에 오른 것은 최초였다.

 

“4학년 때 주장을 하면서 이룬 승리였고 졸업식을 치른 후에 챔피언 결정전을 뛰며 우승한 것이라 더욱 기뻤어요. 이 기쁨을 이루기 위해 연세에서 운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덕분에 대학생활의 마무리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문경은 동문은 화려한 대학 시절을 보낸 후 상무팀을 거쳐 서른 살, KBL 출범 후 두 번째 시즌 삼성 프로 농구팀에 입단했다. 그가 입단하기까지 여러 프로팀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특히 삼성과 현대 팀 간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는데, 대학 시절 한 대회를 보러 온 정주영 회장이 ‘14번 달고 뛰는 선수를 데려오라’고 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결국 이런저런 상황과 부모님의 설득에 힘입어 삼성에 입단한 그는 스타플레이어로서 승승장구했다. 최고의 시간들이었다. 삼성의 KBL 첫 우승을 주도했고, 통산 610경기를 뛰며 경기당 평균 15.3 득점, 2.2 어시스트, 2.1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000-2001 시즌엔 삼성의 통합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인천 SK빅스, 서울 SK나이츠에서도 다수의 우승을 견인했다. 그의 화려한 기록은 모두 끊임없는 훈련, 자기와의 싸움에서 비롯됐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3점 슛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대학교 때 정말 독하게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하루에 천 개 이상씩 공을 쐈어요. 자리를 바꿔가며 무빙 슛 연습을 했죠. 정해 둔 림을 가르는 횟수를 넘지 않으면 밥 먹으러 가지도 못했어요. 대학 시절 내내 슈팅 연습한 것으로 프로 리그에서도 감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사실 은퇴할 때까지 써먹었다고 생각해요. 기본기가 다 한 거죠. 사실 슈터라는 포지션은 ‘신뢰’를 얻어야 해요. 상대팀의 수비들 사이에서 공을 지켜서 슈터에게 넘기면 슈터는 그냥 멀리서 휙 던진다고 하죠. 그럼 나머지 4명의 멤버들은 짜증이 날 때가 있거든요. 그걸 상쇄시키기 위해서는 인정받아야 해요. ‘슛을 쏠 수 있도록 우리가 수비를 해주고, 스크린을 해줘야 해.’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하거든요. 나밖에 모르는데 누가 볼을 줄까요. 그래서 저는 연습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인정받고자 했고 팀워크에도 기여하고 싶었어요.”

 

그런 그에게 인생 최고의 경기는 프로 리그에서의 첫 경기도, 가장 득점을 많이 한 경기도 아니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결승전 우승, 대학 2학년 때 처음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 국가대표 선수로 이름을 올리고 10년 이상을 활약하며 이뤄낸 쾌거의 순간이다. 장신이 즐비한 데다 MBA에서 활약하고 있는 ‘야오밍’이라는 선수를 가진 중국이기에 부담스럽고 쉽지 않은 경기였다.


“예상과 달리 점수 차가 점점 좁혀졌어요. 10점 안으로 들어오면서 응원도 거세졌고 중국 선수들은 당황했죠. 결국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102-100점으로 승리했어요. 우리나라가 20년 만에 금메달을 딴 감격적인 순간이었어요. 그때 눈물까지 흘렸어요.” 

 


 

소통의 리더십으로 명장이 되다 

“40세까지 하고 은퇴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문경은 동문은 2010년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부상 없이 오랜 시간, 좋아하는 농구 코트 위에서 최선을 다했던 그였지만 모든 운동선수들이 그러하듯 은퇴의 시간을 맞닥뜨려야 했다. 


“슬럼프라고 할까요. 서른다섯부터 마흔, 은퇴하기 직전까지가 좀 힘들긴 했어요. 젊은 시절 30~40분씩 뛰다가 점점 뛰는 시간도 줄어들고, 마지막 한 골, 역전이 필요한 순간에 투입이 된다든지 하는 것이 몇 년 됐죠. 관중들에게 창피한 마음도 있었죠. 마지막 5년간 은퇴하라는 주변의 조언도 많이 있었어요. 다행히 SK에서 계속 기회를 주셨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은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선수 시절 이후 그는 감독으로 변신, 지도자로서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는다. 몸담았던 SK에서 전력 분석 담당을 맡은 후 이어 지휘봉을 잡았다. SK는 이전까지 딱 한 번 플레이오프에 오른 팀. 농구계에서는 ‘감독들의 무덤’이라 불렀다. 그러나 문경은 동문은 팀을 변화시켰다. 그가 이끄는 SK는 정규리그 우승 2회(2012-2013, 2019-2020), 챔피언 결정전 우승 1회(2017-2018), 플레이오프 진출 5회 등의 성과를 냈다. 선수였던 시절도, 감독이었던 시절도 목표는 하나, 오직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두가 놀란 일이었지만, 그 변화의 중심에는 소통의 리더십이 있었다. 


“무엇보다 SK구단과 생각이 잘 맞았죠. 구단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팀과의 소통이었고 감독 경험이 없는 저를 감독으로 임명하며 그런 부분을 원했던 것 같아요. 저는 프런트와 선수단, 코칭스태프가 소통을 통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갈 때 좋은 성적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또 소통이 힘을 얻으려면 진정성이 있어야 하죠. ‘감독다움’ 그 진정성을 보여줘야 해요. 일대일로 선수들과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선수들에게 물었죠.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뭔지. 돈이든 명성이든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목표를 향해 합심해 나가면 그것을 이룰 수 있게 해주겠다 약속했고 선수들에게 시즌의 목표를 적어 오게 했어요. 확실한 동기부여를 통해 저는 감독으로서 선수 편에 서고, 선수들은 더 나은 성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게을렀던 선수들, 화려한 것만 좇았던 선수들도 정말 열심히 뛰게 됐고 자연스레 좋은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10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 선수를 10.1만큼의 기량이 날 수 있도록 북돋우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 문경은 동문은 그 0.1이 승부를 가를 수 있다고 믿었고 이는 평소의 노력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평상시에 노력해 연습한 것이 아니면 실전에서 할 수 없고 또 부상으로 이어지게 마련. 그래서 그와 선수들 간의 소통과 약속은 ‘비시즌에 더, 평소의 준비’에 초점이 맞춰졌다. 더욱 단단한 팀이 된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 지난해 10년간의 감독직을 내려놓은 문경은 동문은 KBL 최초로 송별회를 누린 감독이 됐다.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새 길을 만나다

최근 문경은 동문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KBL의 경기본부장으로 임명된 것. 경기본부장은 경기 운영을 총괄하는 자리로,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심판, 경기원 등 조직을 관리하고 책임진다. 그만큼 농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뛰어난 조직 관리 능력이 요구된다. 특히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심판부와 관련해서 각 구단 감독들과 계속 소통하며 문제를 최소화해야 한다. 운영본부의 원활한 관리 없이는 농구 리그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 스포츠 행정가로서 새 출발 한 문경은 동문은 얼마 전 리그가 시작된 만큼 새벽에 집을 나와 매일 9시 데일리 미팅에 참여하고 경기가 진행되는 전국 곳곳에 출장을 가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운영본부의 총괄로서 새로운 길에 대한 각오도 단단하다. 



“처음에 제안이 왔을 때 못하겠다고 했어요. 안 해봤으니까요. 원래 농구 해설을 하려고 했죠. 해설을 하면서 객관적인 시각에서 농구를 다시 공부하고 다른 감독 자리를 기다리고 싶었어요. KBL 운영본부는 우리나라 농구의 한가운데에 있잖아요. 불구덩이 한가운데 뛰어드는 두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생각을 바꿔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했죠. KBL에서 직접 부딪히며 더 큰 그림을 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전체를 다시 보고 크게 보는 경험이 향후 감독을 하더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았고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새로운 커리어도 함께 열릴 수 있겠다 싶었어요. 잘해도 욕먹고 고생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지만 다들 도와주시니 잘 이끌어 나가야죠.”


경기 운영본부의 중요 이슈는 심판의 자질과 능력을 키워 오심을 최소화하고 경기가 공정하고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것. 심판의 결정은 승패를 가르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잘못하면 KBL에 대한 비난과 의구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경은 동문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언론이나 마케팅 같은 분야는 잘못돼도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경기 운영에서 오심이 있으면 각 팀의 항의는 물론 KBL의 역할에 대한 비난도 커져요.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실수가 있을 수는 있지만 최소화해야죠. 그래서 오심을 줄이기 위한 심판 교육 등을 강화해 나가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심판부 자체적으로 시스템화한 교육 관리로 저연차 심판들의 기량 발전에 노력하고 싶습니다. 또 좋은 심판을 양성하고 싶어요. 심판을 뽑은 후 교육하기보다는 KBL 자체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해서 심판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재목을 발굴하고 양성해 보고 싶어요. 이와 함께 심판 배정의 공정함과 투명함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고 싶습니다.”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목표로 달렸던 문경은 동문은 10년의 감독 경력을 거쳐 이제 60세까지 농구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일이라 잘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사실은 그래서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변화를 결심하고, 그 기회를 즐기고 있다는 그는 선수 시절 승패를 가르는 무수한 슛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이끌었던 것처럼 이 새로운 도전에서도 가장 최적의 타이밍에 가장 값진 성과를 보여줄 것이다. 그와 함께 다시 날아오를 한국 농구, 그리고 스포츠 행정가로서 만나게 될 그의 전성시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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