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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생각하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2-10-24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생각하다 

고난과 한계를 이겨낸 기적의 소년 ‘탈북민 출신 1호 변호사’, 이영현 변호사(법학 05)

 


고난의 행군을 넘어 한국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자연재해, 국제적 고립 등으로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이 시기, 북한의 많은 주민들이 굶주림을 겪고 아사했다. 이영현 동문은 이 힘겨운 시기의 처참함을 겪다 1997년 탈북했다. 그의 나이 겨우 만 열넷이었다. 소년은 굶주리는 가족들을 살리고자 외삼촌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연변으로 탈북,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다 몽골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2002년 한국에 도착한다. 영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기적의 탈북 스토리다. 그가 한국에 정착한 지 어느덧 20년. 북한에서 산 날보다 더 오랜 시간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았다. 고등학교 과정부터 시작해 우리 대학교에 입학하고 ‘탈북민 출신 1호 변호사’가 되기까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현재 법무법인 세창의 변호사로 우리 사회에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느 변호사처럼 의뢰인을 대리해 민‧형사사건을 해결하는 삶을 살지만, 동시에 북한 인권 문제를 알리고 개선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인정받지 못하는 난민의 삶 

쌀 한 포대라도 구해 오자고 함께 길을 떠났던 외삼촌은 탈북 과정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혈혈단신으로 건너간 중국에서는 공안의 감시를 피해 조마조마한 생활을 해야 했다. 강제북송은 죽는 것보다 무서웠던 일이다.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 어린 나이에 막노동을 하며 생존의 어려움도 컸다. 그런 그의 인생을 바꾸고 한국까지 올 수 있게 도운 은인을 만났다. 연변 지역 선교를 위해 미국에서 온 선교사였다.

 

“선교사님 한 분께서 미국에서 선교팀을 이끌고 일 년에 두 번 정도 오셨어요. 감사하게도 조선족 집사님을 통해 그분과 연결이 됐죠. 그전까지 선교사님은 단기 선교로 왔다 돌아가시곤 했는데, 저를 만난 게 처음으로 북한 사람을 실제로 본 거였어요. 말로만 듣던 깡마른 탈북 아이를 눈앞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으셨고 마음이 아프셨던 것 같아요. 이후로 북한 인권 상황의 심각성을 아신 것 같았어요. 탈북민은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중국 공안에 발각되면 끌려가 강제북송을 당하죠. 선교사님께서 탈북민들을 돌보겠다는 사명감으로 장기 체류하면서 쉼터도 마련해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외국인이 다른 나라에 와서 탈북민을 보호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선교사가 마련해 준 쉼터에서 생활하며 보호를 받게 된 이영현 동문은 두려움보다 신앙심이 커졌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삶은 이어졌다. 탈북민 쉼터가 있던 곳은 연세의 선배 윤동주 시인이 공부했던 중국 용정 인근. 겉으로는 고아원이라고 위장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의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 됐다.

 

“어느 날, 쉼터에서 같이 지내던 한 탈북민 아이가 TV에 나오는 거예요. 당시 스페인 대사관에 탈북민 25명이 뛰어든 사건이 있었는데 그 무리에 합류했던 거죠. 모두 놀랐고 빨리 피하지 않으면 공안이 들이닥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간 선교사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몽골 루트를 통한 한국으로의 탈출을 감행했어요. 너무도 다행히 우리가 떠난 바로 다음날 공안 100여 명이 무장을 한 채로 들이닥쳤어요. 하루만 늦었어도 체포돼서 강제북송됐을 거예요. 선교사님께서 늘 기도해 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쉼터가 발각된 후에 선교사님은 감금당해 조사를 받으셨고 거액의 벌금을 물고 강제추방되셨어요.”  

 

그러나 한국에 오기까지는 북한을 탈출한 것 이상의 고난이 있었다. 연변에서 북경까지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 북경에서 버스를 타고 내몽골로 이동, 거기서 다시 몽골 국경까지 가는 길은 수일이 걸렸다. 몽골 사막을 걸으며 도저히 한국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도 들었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국경 근처에서 그동안 길을 안내해 준 분과 이별하고 3명의 탈북민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컴컴한 어둠 속에서 10여 개의 철조망을 지나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한없이 불안했던 중국에서의 삶에서 탈출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눈물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쏟아졌다. 2002년, 그는 그렇게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 사회에서 새 출발, 법조인을 꿈꾸다  

한국으로의 탈출에 성공한 후, 그가 만난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한국에 대한 기대감도 분명 있었고, 두 눈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삶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외로웠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인연’과 ‘신앙의 힘’이었다.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 사회로 나왔죠. 6개월 정도는 천안에 있는 어느 교회 쉼터에서 지냈어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늘 새벽 기도를 강조하신 목사님 덕분에 저 역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갔어요. 제 신앙의 정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또 감사함도 컸던 것 같아요. 제게는 기적 같은 시간이었죠. 검정고시 준비도 생각했었는데 공부할 환경이 안 됐어요. 마침 중국에서 만난 선교사님의 지인께서 부산에 있는 대안학교 운영진이셨는데, 추천을 받아 그곳에 입학해 고등학교 과정을 다녔습니다.” 

 

대안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 한참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들은 아낌없이 나누고 챙겨 주셨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외로움을 덜고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생활과 인권 문제에 대한 생각들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는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북한의 인권 상황이 얼마나 참혹한지 제가 몸소 경험하고 봤잖아요.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제2의 인생은 탈북민들을 법률적으로 돕고 나아가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라 확신했어요. 법조인이라는 꿈을 밝혔을 때 주변에서는 한국인도 이루기도 어려운 꿈이라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저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 왔잖아요.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법조인을 진로로 정하고 우리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무엇보다 연세는 기독교 정신과 가치관 위에 세워진 학교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대학보다 꼭 연세에 입학하고 싶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사법고시에서 로스쿨까지  

인권에 대한 관심은 대학 시절에도 이어졌다. 학교 내에 인권 단체를 만들고자 시도하기도 했고 학생들이 협력해 미래 통일한국을 준비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동아리 ‘통일 한마당’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법조인의 꿈을 이루기 위한 법학도로서의 준비도 시작했다. 

 

“1학년 때는 공부보다는 다른 대학생들처럼 대학의 낭만을 즐기며 재미있게 추억을 만드느라 정신없었죠. 2학년이 돼서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로스쿨이 없었죠. 50년간의 우리 대학교 고시 합격자들의 수기를 모은 두꺼운 책자를 읽었는데 산에 들어가서 독학하며 합격한 얘기들이 많았어요.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하느냐, 이런 스스로의 다짐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그래서 다들 신림동 고시촌에 가서 공부했지만 저는 삭발하고 배낭에 쌀과 법전을 넣고 산으로 들어갔어요. 수기집을 보면 눈썹까지 밀어야 된다는 분들도 있었어요.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그건 옛날 얘기라며 안 된다고 미용사님이 말리시더라고요. (웃음)” 

 

하지만 그는 산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하산했다. 어렵고 난해한 용어들이 가득한 법전 한 페이지를 보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난한 시간들이었다. 하루 열 시간을 쏟아 열 페이지를 읽어도 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법전마다 여러 차례 회독을 해야 하는데 이해조차 어려우니 스스로 독학할 수 있는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퇴를 결심하고 학교 수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법학도라면 으레 당연한 코스로 여겨지는 사법고시 준비를 멈춘 시기에 조금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그때 로스쿨 도입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던 시기였어요. 동기들은 몇 번 남지 않은 사법고시를 준비한다고 한창 바쁠 때였는데, 저는 조금 여유가 있었죠. 사실 로스쿨보다 사법고시 합격자에 대한 공신력이나 실력이 더 뛰어날 거라는 편견들이 팽배했죠. 하지만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 속에서 개방적인 교수님들은 학생들에게 로스쿨을 준비하라는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저는 좀 일찍 로스쿨을 가야겠다 결심하고 학점 관리나 영어 실력을 갖추는 데 주력했어요. 깊이 있는 법률은 로스쿨에서 다시 배우니 기본 소양을 쌓는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기본기를 다지자는 생각으로 공부했고, 국회나 법무법인 등에서 인턴십을 하며 입법과 사법 과정을 두루 경험했어요.” 

 

 

4전 5기, 최초의 탈북민 출신 변호사 

졸업 후 그는 경북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각 대학교 법학과에서 상위의 실력을 갖춘 인재들이 모인 로스쿨은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재학 중에는 많은 양의 수업, 과제, 예복습으로 하루 일과가 그냥 끝나게 마련.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을 아끼며 3년간 최선을 다한 끝에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변호사 시험은 다른 얘기였다.

 

“주로 학술정보원에서 공부를 했어요.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연세 법학과 출신 친구들과 스터디 모임을 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네 번을 내리 시험에서 떨어졌어요. 변호사 시험은 5번 치를 수 있으니 마지막 1년이 남았죠. 그때는 하루에 20시간씩 오직 공부만 했던 것 같아요. 네 번째 시험은 스터디보다는 혼자 집중해서 공부를 했어요. 기존까지는 얇은 기본서로 암기 위주의 공부를 했었는데, 네 번째부터는 두꺼운 기본서로 한 글자 한 글자 뜯어가며 이해 위주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네 번째 시험 직전에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구나, 합격하겠다 싶었죠. 아쉽게 2점이 모자라 떨어졌지만 성적이 많이 올라서 마지막 시험도 그런 방법으로 하면 되겠다 방향을 잡았죠.” 

 

다시 마음을 다잡고 독학하던 중 먼저 합격한 후배가 그에게 학원 커리큘럼이 도움이 됐다는 조언을 했다. 하지만 비싼 학원비가 문제였다. 고민 끝에 그는 다음 번 합격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학원 원장을 찾아갔다. 

 

“탈북민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고 성적표를 보여드렸어요. 아쉽게 떨어졌는데 학원에서 수업을 좀 들을 수 없냐고 물었죠. 원장님이 너는 곧 합격하겠네, 이러시면서 그럼 조교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학원비를 내지 않아도 됐죠. 시험 감독도 하고 수업 전후로 정리도 하고 이런 일들이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할 일이 많았죠. 똑같이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입장인데 그 학생들은 커리큘럼에 따라 강의를 듣고 준비하는데 저는 그 친구들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셈이었어요. 학원 들어갈 때 TOP이었던 성적이 중간 정도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사표를 냈죠. 다행히 원장님이 학원비를 조금 깎아 주셔서, 그 돈을 내고 남은 시간들을 학원에서 준비했어요. 학원비 충당이 어려울 때는 먼저 변호사가 된 친구들이 고맙게도 십시일반 모아서 도움을 주기도 했죠. 그렇게 공부할 수 있었어요.”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니 성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계속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답안인 ‘모범 답안’으로 계속 뽑혔다. 그는 결국 제8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탈북민 출신으로는 최초였기에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실력과 진심으로 승부하는 치열한 변호사의 삶 

이영현 동문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두 곳의 법무법인을 거친 후 현재 법무법인 세창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탈북민 변호사’가 아니라 ‘보통의 송무 변호사’들처럼 치열하게 늦은 시간까지 형사, 민사, 가사 소송과 관련한 법리적 다툼을 위해 의뢰인과의 상담, 서면 작성, 법정에서의 변호 등을 맡고 있다. 드라마에서 보는 낭만적인 변호사의 삶보다는 승소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복잡한 사건들의 법률적 적용과 논리를 구성하는 업무, 잦은 야근으로 힘든 송무 변호사의 삶을 살고 있지만 다양한 사건들 중 그는 특히 형사 소송 분야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 

 

“변호사의 삶은 늘 야근이에요. 어제도 저는 새벽 4시에 퇴근했거든요. 밖에서 봤을 때는 굉장히 멋있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 변호사의 삶은 달라요. 상대방과 법률적으로 싸워야 하고 서면을 쓰느라 늘 자신과 싸워야 돼요. 피로와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직업이죠. 하지만 저는 그런 변호사의 삶이 좋습니다. 특히 제가 경험한 사건들 중 형사 분야가 좀 더 생동감 있는 것 같아요. 실질적으로 누군가의 권리를 법정에서 옹호해 주고 대변한다는 느낌이 확실히 강하거든요. 그래서 형사 사건이 저한테 잘 맞고 재미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패소하는 경우들도 있죠. 그래도 그 과정에서 살아있다는 느낌이 더 크게 들어요.” 

 

법무법인 홈페이지의 이영현 변호사 소개 란에 쓰여있는 문구 중 ‘진심을 담아 사건을 해결’한다, ‘의뢰인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변호사로서 그의 철학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의 기억 속에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은 엄청난 수임료를 받은 사건도, 단번에 승소했던 사건도 아니다. 그저 ‘신뢰’를 이끌어냈던 순간이다.

 

“변호사 생활 초기였어요. 임차인과 임대인 간 분쟁이 있었는데, 두 분 다 70대 어르신이었어요. 아파트에 하자가 있었죠.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하자 수리를 요청했는데 계속 거부했대요. 갈등의 골이 깊어져 결국 임차인이 소송을 하겠다고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하자 수리비가 백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거든요. 소송을 하면 몇 백이 들 텐데 말이 안 되잖아요. 사실 변호사들은 어떻게든 사건을 수임하려고 하지만 저는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임대인과 통화하고 서로 답답해하시는 부분을 중재해 드렸죠. 결국 두 분 다 중재안에 합의했고 간단히 마무리됐어요. 나중에 두 분 다 따로 연락하셔서 ‘당신 같은 변호사는 처음이다, 앞으로 기대하겠다’고 감사 인사를 전하셨어요. 정말 뿌듯했어요.”

 

3년간의 변호사 생활, 이제 개업 변호사로서 영리 활동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하지만 사건이 들어오면 내 가족 일처럼 나선다는 그는 그런 신뢰가 만드는 일에서 변호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북한 주민과 탈북민 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  

이영현 동문은 탈북민 변호사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를 잘 모르는 것 아닌가 하는 고객들의 편견을 접한 경험이 있지만 그 모든 편견을 실력으로 잠재우며 신뢰를 이끌어 내고 많은 성과를 이뤘다. 그러나 동시에 탈북민 변호사로서 그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소명 의식은 늘 운명처럼 새겨져 있다. 북한 주민과 탈북민들의 인권 개선을 돕는 변호사로서의 모습이다. 이를 하나씩 이뤄가기 위해 그는 다양한 인권 관련 공익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 특별위원회 위원, 북한이탈 주민 법률주민위원회 위원,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재단 사무총장직을 수행하며 세미나, 백서 발간, 북한 인권 수기 공모사업, 북한 인권 활동가 후원 사업 등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를 알리고 해외 탈북민들의 인권 실태를 파악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단지 인권 실태 파악이나 알리는 일을 넘어 탈북민들의 정착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는 일에도 대한변호사협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탈북민들은 한국 물정에 대해 잘 몰라 사기를 당하거나 법률적으로 놓치는 부분들이 많아요. 무료 상담으로 법률 지원을 하고 필요하면 소송까지도 소액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인권재단은 한국이 인권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여성, 장애인, 소수자, 북한 주민 등 다양한 인권 문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지난해 저에게 사무총장직을 맡겨 주셔서 시급한 인권 문제인 북한 주민, 탈북민 인권 개선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국내 입국 탈북민들은 북한이탈주민의보호및정착지원에관한법률에 따라 여러 가지 지원을 받고 있는데, 제3국 출생 북한이탈주민 자녀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이 기본적인 교육, 의료 등 최소한의 보호과 지원을 받으려면 법 개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법률적 문제뿐만 아니라 탈북민 자녀들의 급식비 지원 등 작지만 실질적인 지원까지 다각도로 정착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든든한 맏형으로 

이 동문은 법률적 도움뿐 아니라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관계 맺기의 어려움, 탈북민 학생들의 학업, 진로 같은 문제들도 상당하다. 

 

“부산의 대안학교에서 제가 탈북민 출신 첫 학생이었지만 저 이후로 많은 탈북민 학생들이 입학했어요. 저희가 졸업할 때 서원을 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받은 사랑이 큰 만큼 졸업 후 사회에 나갔다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섬기는 시간을 갖자고요. 그걸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대학 시절 휴학을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진로상담, 대인관계 상담도 했었어요. 현재까지 제가 맏형 역할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그 학교는 재정적인 문제로 문을 닫았지만 인권재단 활동을 통해서 법률 상담과 함께 그 영역을 좀 확대해 일대일 매칭으로 멘토링도 하고 있어요. 같이 밥 먹으면서 법률 외적인 고민, 학업 상담도 하고 한국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것도 알려주고요.” 

 

실제로 그는 탈북 청소년들에게 큰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있다. 로스쿨 입학을 꿈꾸는 탈북민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그를 찾아와 진로나 학업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역량이 되는 한 잘 챙기려 한다는 이영현 동문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아낌없이 시간은 내고 귀를 기울인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의지가 되어 주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처럼, 그 역시 선배로서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탈북민 출신 최초의 변호사지만 자신이 그 최초 사례가 된 것은 불과 3년여 전, 더 많은 탈북민들이 새로운 기회와 용기를 만났으면 한다. 되돌아보면 그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큰 힘을 얻었다. 

 

“특히 연세에서 많은 교수님들께서 제게 힘을 주셨습니다. 학업에 대한 조언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저를 많이 챙겨 주셨습니다. 제가 시험에 떨어지고 힘들 때 어떤 교수님은 도시락까지 싸 들고 오셔서 밥 먹으며 공부하라고 응원해 주셨고, 명절 때는 전과 과일 등 음식을 보내 주시면서 외롭지 않게 해주셨어요. 때로는 좋은 성경 구절을 계속 보내주시고 응원 기도도 해주셨습니다. 건강 챙겨가며 공부해라,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신앙의 힘으로 견뎌라… 이런 큰 사랑과 관심을 주신 김정주 교수님, 정종훈 교수님, 전용관 교수님 덕분에 잘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인권 수호를 위해 헌신하는 삶 

이영현 동문은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받은 넘치는 사랑을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베풀고자 한다. 아직까지 한국에서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동시에 무관심한 북한 주민, 탈북민 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알리는 활동을 더욱 확장해 나갈 예정이다. 

 

“인권이라는 문제는 권리와 자유의 문제잖아요. 결국 한 국가 내의 어떤 제도권 안에서 보장을 해야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북한은 생존의 문제조차 챙기질 않고 있어요. 북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 부분은 눈 감고 있다고 생각해요. 북한 내부적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하고 압박을 하면서 이슈화해야 합니다. 수십만 명의 탈북민들이 해외를 떠돌고 있고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국제 사회에서 그 실상을 잘 모르고 있어요. 또 북한 사람들 역시 바깥세상을 모르니 무엇이 잘못돼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적 목소리가 높아져야 합니다. 그 목소리가 커질 수 있도록 알리고 참여를 호소하고 관심을 이끌어 내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영현 동문은 한 번도 변호사 이외의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권리를 대변하고 지켜내기 위한 일, 그것은 그가 북한에서, 중국에서 맞닥뜨린 수많은 인권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의 소명은 가장 위태로운 곳에서 누구보다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것, 그는 그들을 위한 작은 관심이 큰 변화로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자유와 인권 수호의 가장 앞줄에서 목소리를 높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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