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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2-05-24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 

어린이·청소년 인권 확대에 힘써 온 이상경 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사회학 75) 



어린이의 존재 자체에 주목

1922년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선언’을 하며 그간 존중받지 못했던 어린이의 존재에 주목하고 어린이들을 존중할 것을 선언했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의 인권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 갈 주체로서 어린이 존재 자체에 대해 주목했다. 한국방정환재단은 이런 방정환 선생의 뜻을 기리고 어린이들의 인권과 복지 등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어린이 선언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어린이의 인권과 복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소외된 어린이들, 그리고 이들을 위한 존중과 배려는 아직도 부족하다. 한국방정환재단은 약한 존재, 그래서 배려할 존재로서만 어린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이뤄낸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갈 존재로 여기며,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세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는 방정환 선생의 말을 되새기면서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방정환재단을 이끌며 오랜 시간 우리나라 어린이의 인권과 복지에 힘을 쏟고 있는 이상경 동문을 만났다.



아버지의 뜻을 이은 사회적 책임 사업 

이상경 동문은 2008년 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이런 사회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고, 15년째 이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남다른 가풍에서 비롯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상경 이사장의 아버지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통해 번 자산으로 고향인 남양주에 중학교를 설립했다. 여러 일로 학교를 접으셨지만,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4년 전쯤 아버지께서는 다시 재산 중 일부를 사회사업에 기부하고 싶어 하셨고, 다시 학교 설립에 관심을 두셨다. 


“파킨슨병으로 12년째 투병 중이셨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자녀들을 다 부르시고는 재산 중 일부로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런데 저희가 말렸어요. 학령 인구는 감소하고 있고, 공교육도 확대됐으니 학교 설립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진정한 뜻은 미뤄 짐작할 수 있었어요. 어린이, 청소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다 마침 한국방정환재단 형편이 매우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게 됐고, 아버지께 권유했죠. 그렇게 재단에 기부했고 제가 이사로 운영에 참여하게 됐다가 2008년에는 이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어찌 보면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저변에 있는 의식, 철학이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은 그에게 고스란히 위대한 유산이 됐다. 되돌아보면 아버지는 늘 그렇게 ‘깨어 있는’ 의식을 강조하셨다.


“저희는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모든 행사를 기독교 식으로 했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식사 기도예요. 식사 기도를 할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아이들이 성공하길 바란다는 말 대신, 우리는 혜택받은 사람이니 어려운 이들,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소망하셨어요. 재단에 기부를 하신 후에도 저희를 부르셔서 ‘너희도 돈을 벌면 재단에 기부하라’고 권하셨어요.”



깨어 있는 가풍 속에서, 열린 캠퍼스 문화에서 만난 기회들  

75학번인 이상경 동문, 당시만 해도 여성에 대한 교육과 평등에 대한 인식은 높지 않았다. 이상경 동문이 우리 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과 학생 30명 중, 여학생은 단 3명이었다. 하지만 이상경 동문이 연세에 입학하고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 또한 ‘깨어 있는’ 가풍에 기인한다.


“외할머니께서는 딸만 일곱을 낳으셨어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겠어요. 그러다 교회에 다니면서 더 넓은 세상을 보셨고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딸 일곱을 데리고 서울로 오셨고, 다시 동경으로 이주하셨죠. 더 많은 기회를 찾아서요. 동경에서 한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숙을 치시다가 해방 직전에 다시 귀국하셨어요. 빨리 개화되고 깨이셨던 할머니 덕에 저희 어머니도 우리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셨고 해외 유학을 가신 이모들도 많아요. 특히 막내 이모는 제게 롤 모델과 같은 분이세요. 해외에서 경제학 석사를 하고 세계은행에서 근무하셨는데 아시아 지역에 출장을 왔다 돌아가실 때 한 번씩 한국에 들르셨어요. 너무 멋있어 보였죠. 나도 저렇게 돼야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그런 집안 분위기와 가족들의 모습이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또, 늘 부모님께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며 응원해 주셨죠.”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에게 받은 영향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에 대한 관심을 펼쳐내고 스스로 ‘여성’이라는 틀에 제한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고, 자연스레 관심을 뒀던 사회학 공부를 위해 우리 대학교에 입학했다.

 

연세에서의 추억을 되돌아보면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이상경 동문은 말한다. 특히 여성으로서 어떤 차별이나 배제되는 경우, 혹은 특별한 대우 없이 자체로 존중받았던 기억이 많다. 당시는 같은 교육을 받아도 여학생들의 목소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다수, 7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과에 여학생이 단 3명임에도 소수라고 무시당하거나 여성이라고 기회가 불공평하게 주어진 경험은 없어요. 어떤 의견이든 어떤 질문이든 교수님들께서는 존중하셨고, 격려해 주셨어요. 나중에 타 학교에서 최고위 과정을 했을 때는 저 혼자 여성이었어요. 그런데 제게 그러더군요. ‘여학생이 당신 한 명인데, 다닐 수 있겠냐’고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죠. (웃음) 연세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어요. 심지어 그때는 90년대, 20여 년 전이었어요. 학부 시절 존중받으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연세인으로서 자부심이 들었죠.” 




동문들과 함께 리서치 회사 창업에 도전 

이상경 동문은 사회학과 4기다. 사회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고 입학했지만 그에게는 적성에 맞는 재미있는 공부였다.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을 분석하고 탐구하는 일이 흥미로웠던 그는 ‘사회학은 사회과학의 근본, 기초과목으로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통해 더 좋은 솔루션을 찾는 공부’라고 정의한다. 졸업 후에는 결혼과 육아를 병행하며 과학철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다시 사회학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그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당시 한국여성개발원)의 조사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4년 만에 안정적인 공공기관에서의 커리어를 넘어 창업에 도전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한 축을 이루는 ‘현대리서치연구소’다. 창업은 사회학과 선후배 5명이 함께 준비했고 실행했다.


“동문들이 모여서 홍대 앞에 작은 사무실을 냈어요. 사실 직장에 다닐 때부터 창업을 준비하긴 했죠. 처음엔 함께 창업을 준비한 이들도 그냥 직장에 남으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창업을 하고 일을 하다 보니 다들 실무를 잘 몰랐던 거예요. 저는 현장에서 4년이나 일을 했으니 여러 경험이 있었고, 결국 회사를 정리하고 다소 늦게 합류했어요.”


현대리서치연구소의 창업 시기는 우리나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정치적으로는 역사상 첫 직접선거가 시작됐고,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 체제가 움텄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는 사업이 바로 여론조사 분야다. 


“유권자로서의 시민, 소비자로서의 시민. 이 두 시민의 의견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기였어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들의 의견이 중요해졌죠.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아요. 80년대 이후에는 시장 개방과도 맞물려 기업의 여론조사 니즈가 높았어요. 정부의 사회 조사, 기업의 마케팅 리서치 시장이 성장했죠. 시장이 무르익으면서 다양한 리서치 펌도 생겨났고요. 90년대 후반에는 인터넷과 접목한 온라인 리서치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어요. 90년대 초에는 현대리서치를 함께 창립한 멤버들이 교수로, 큰 기업의 사장으로, 또는 정치권으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됐어요. 그 이후로 제가 회사를 이끌고 있지만 처음 창업할 때 함께했던 열정과 즐거움은 잊을 수 없어요.” 



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에 취임, 방정환 제대로 알리기 

이상경 동문은 2006년도부터 한국방정환재단 이사의 역할을, 2008년도에는 이사장에 취임하며 리서치연구소의 대표이자 공익 재단의 책임자로서 두 가지 일을 병행했다. 재단의 이사장으로 첫걸음을 내디디며 삼은 첫 번째 목표는 방정환 선생을 제대로 알리자는 것이었다. 방정환은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지만, 구체적으로 선생이 실행한 업적,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잘 모르는 게 현실이었다. 방정환 선생에 대한 연구와 자료 수집부터 나섰다. 무려 8년여에 걸친 시간을 쏟은 사업이 바로 2019년 이뤄진 ‘방정환 전집 발간’이다.


“방정환 전집을 내기 위해 연구에만 4년, 그것을 현대어로 번역하고 정리하는 데 4년여가 걸렸습니다. 우리는 대개 ‘소파(小波)’라는 호만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신 호는 30개 이상이에요. <어린이> 잡지 한 권을 혼자 제작하시면서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고, 당시 일제 검열이 심하다 보니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도록 여러 사람이 공동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국문학자, 교육학자, 역사학자 등이 모여 그것을 구분해 내는 일에서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에 쓰인 작품들이다 보니, 현대어와는 매우 다른 언어로 작품들이 쓰였죠. 현대어에 맞게 번역 작업을 하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총 8년여가 걸렸지만, 참 보람 있는 일이죠.”


한국방정환재단은 이 외에도 방정환 선생을 21세기 현재에 맞게 제대로, 다시 보고 또 그 정신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오늘의 방정환’을 조명하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새쓰 방정환 문학상'은 방정환 선생의 생각과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를 현대 어린이들의 정서에 맞게 ‘다시, 새롭게, 쓰는’ 아동문학상이다. 이를 통해 방정환 선생의 생각을 현대에도 전파하고 있다. 전문 심사위원뿐만 아니라 어린이들도 심사에 참여해 더욱 뜻깊은 사업이다. 





연세와 함께한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 연구 

이상경 동문이 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이기에 펼칠 수 있는 사업도 있다. 여론조사연구소에서의 오랜 커리어를 바탕으로 우리 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염유식 교수팀과 함께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를 진행, 2009년 이래 어느덧 12회차를 발표해 왔다. 이는 유니세프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를 모델로 OCED 국가들과 우리나라를 국제 비교 연구한 조사 결과 보고서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이자 어린이들의 복지, 인권 문제 등에 대한 연구에 많이 활용되고 있는 데이터다.


“방정환 선생님이 오늘날 살아 계셨다면 무엇을 하실까요. 방정환 선생님의 뜻을 가늠할 때 재단의 역할이 어린이·청소년과 관련한 사회 문제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래서 제 전문 경력과 결합할 수 있는 조사연구를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빌&멜린다게이츠 재단에서 주관하는 어린이 백신 접종 실태 조사 데이터를 보고 동기 부여가 됐어요. 하지만 백신 접종률이 높은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주제였죠. 그러다 유니세프가 하는 OECD 국가 대상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를 알게 됐고, 조사 대상에 우리나라가 빠져 있어서 이걸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모교 사회발전연구소 염유식 교수팀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제가 대표로 있는 현대리서치연구소가 후원을 하고, 한국방정환재단이 주관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사는 단순히 어린이, 청소년과 관련한 조사이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벌써 12회차까지 축적된 데이터는 누군가에게는 연구의 근거 데이터로 활용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문제의식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또 전 계층을 다 아우를 수는 없지만 어린이, 청소년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에 힘을 보태주는 하나의 동인이 되며, 학문 연구에도 특별한 자산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 조사연구 데이터가 사회학과를 졸업한 동문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연세에 제안했습니다. 사실, 리서치는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비싼 상품이에요. 그래서 이런 데이터 세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큰 자산이 됩니다. 계속 축적되는 데이터 세트가 있으면 어린이, 청소년과 관련한 후배들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고, 또 이와 관련한 더 많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장려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자산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고요.”


지난해 발표된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주관적 행복지수에서 22위로 OECD 최하위다.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지만 반대로 어린이·청소년의 행복지수는 낮아지는 불균형 속에서 이상경 동문은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는 주관적 행복지수가 낮아요. 청소년 자살률도 높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긴 근로시간 등으로 돌봄을 못 받는 아이들, 파괴된 가정에서 정서적 결핍을 가지는 아이들이 많아요. 이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일이죠. 하지만 우리가 앞서나가는 지표들도 많습니다. 마약, 흡연, 음주 등 보건 행동, 안전 행동에 대한 지표는 매우 좋아요. 이 조사 결과를 통해 한편으로는 우리가 잘하고 성취한 것들을 더 잘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가 잘하는 것은 인정하고 못 이룬 것은 다 같이 고민하고 목표를 수정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 조사가 그런 문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책 나눔을 통해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작지만 큰 변화를 

한국방정환재단은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한 지원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작은 물결 문고’다. 방정환 선생의 호인 소파(小波, 작은 물결)에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방정환 선생의 뜻을 잇고 있다. 기업, 지자체의 후원으로 차상위 계층 어린이들을 방과 후 돌보는 지역아동센터에 책을 기부해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는 것. 전국 4천여 곳의 지역아동센터에서 각 30명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어, 이런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12만 명에 이른다. 


“원래 저는 개인적으로 은퇴를 하면 소소하게 도서관을 하나 지어 소박한 문화 행사도 꾸려나가고 싶은 바람이 있었어요. 재단을 통해 이 사업을 하면서 전국 곳곳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으니 제 꿈과도 연결되는 사업이에요. 아이들은 책을 계속 봐야 해요. 특히 요즘은 지식 정보 사회고, 정보 처리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정보를 읽고 소화해 내는 역량이죠. 이것은 책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중산층 자녀들은 부모들이 독서를 챙겨 주고 관리합니다. 저소득 계층은 그것을 해 줄 부모들이 없거나 너무 바쁜 삶이라 챙길 수 없어요. 그래서 책과 멀어지면 계층 차이가 더욱 커질 겁니다. 작은 물결 문고를 통해 이런 격차 해소에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방정환재단은 기업의 후원으로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 학기 3천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이제 7억 원으로 규모를 늘리고 있다. 



낡은 틀을 깨는 전혀 다른 세상의 주역, 어린이  

방정환 선생은 1922년 세계 최초로 어린이 인권 선언을 하고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의 창립자 에글렌타인 젭(Eglantyne Jebb) 여사가 1923년 만든 어린이 권리 선언 초안이 1924년 채택된 것에 비해 1년 앞선 선언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어린이날. 이 뜻깊은 시간을 맞아 이상경 동문은 다시 한번 방정환 선생의 뜻을 되짚어 보게 된다.


“어린이라는 말은 원래 있던 말이지만 방정환 선생님이 이것을 들어 올리셨어요. 그 이전에 어린이는 그저 ‘아해’, ‘애’로만 불리던 어린 사람들이었지만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라는 존재로 부각시키고 의미 부여를 하셨죠. 일제 치하, 좌절의 시간에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까?’에 대한 답을 어린이에게서 찾으셨습니다.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셨어요. 가부장제는 낡은 정신이라고 여기시고 새로운 생각과 세상을 맞이할 이는 어린이뿐이고 어린이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새로운 세상이란 시대의 전환이죠. ‘철도와 전기’의 시대에 ‘마차와 등불’을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린 것이잖아요. 단순히 새로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세상은 어린이들로만 가능하다 여기셨던 것입니다.”


단지 어린이의 인권을 존중해서 어린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만이 차원이 달라지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정환 선생의 정신은 낡은 것과의 이별, 그리고 새 시대를 열어 갈 어린이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20년, 30~40년 새로운 시대를 타고 나온 새 사람’이라는 방정환 선생의 말은 결국 어린이라는 존재에 주목한 것 이상 더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어린이 인권 선언을 통해 어린이의 존재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방정환 선생의 뜻은 한국방정환재단의 ‘다시 새로 쓰는 어린이 인권 선언’을 통해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멀리 퍼져나가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용감하라 

이상경 동문은 앞으로도 방정환 선생을 제대로 알리고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한 사업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다양한 사업으로 늘리기보다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을 더욱 키워나갈 예정이다. 더 밀도 있게, 그리고 시대에 맞는 변화도 계획 중이다.


“방정환 선생님의 뜻을 어떻게 잘 구현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는 가상 도서관을 만들어 아이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책을 볼 수 있게끔 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책을 아이들이 볼 수 있고, 또 책이 순환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습니다.”


이상경 동문에게 청년들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는 어른들의 잣대로 스스로를 재단하기보다는 ‘용감하라’는 조언을 건넨다. 


“대학시절 저는 한 번도 제가 리서치 회사의 사장이나 재단의 이사장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공부를 했으니 교수가 되라고 하셨어요. 그 시대 여성의 직업으로 교수 정도면 됐다 싶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부모의 기대는 그 시대에 국한되는 겁니다. 자꾸 어른들의 잣대로 얘기하지만 다음 세대의 세상은 또 다른 것이 보이잖아요? 처음부터 용감하기는 어렵지만 성공하든 실패하든 도전하다 보면 용량이 점점 커진다고 할까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망설이는 것보다는 한발 내딛는 것이 훨씬 더 내 길을 찾아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가 무엇인지 인식도 낮고 생소했던 시절, 한발 앞서 리서치 회사를 창립했고, 아버지 뜻을 이어 공익 재단에 참여해 사회사업을 해오면서 사회 인식 개선과 발전에 힘을 보태 온 이상경 동문은 어쩌면 낡은 것보다는 늘 새로운 것, 그리고 그 시대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 왔던 ‘새로운 사람’의 DNA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것이 늘 즐겁다는 그가 이끌어 갈 현대리서치연구소와 한국방정환재단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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