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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특별한 의사보다는 공감하는 의사로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2-03-25

특별한 의사보다는 공감하는 의사로  

근무력증 의대생의 6년의 완주, 전병건 세브란스 인턴(의학 16) 



조금은 다른 인턴  

그 어떤 직업보다 체력적으로나, 지식의 난이도와 양 측면에서나 무척 힘들고 어려운 수련의 과정을 거처야 하는 것이 의사다. 예과 2년, 본과 4년의 긴 학사과정을 마치고 수련의에서 전문의에 이르기까지 10년여에 이르는 시간을 의사가 되기 위해 허투루 쓰지 않는다. 환자에 대한 사명감도 필수다. 명석한 머리에 무수한 시간을 감내하는 끈기, 인간애를 가진 이가 의사가 될 수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다른 일로 인정받는다. 장애를 가진 이가 의사가 됐다면 남다름을 뛰어넘어 ‘아주 특별한, 대단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이뤄낸 이들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또 우리 주변 이들의 삶에서도 발견된다. 그래서 그것은 그저 거창한 극복기라기보다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품은 누군가의 삶 속의 성취다. 선천성 근무력증을 가지고 태어나 우리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이제 인턴 1년 차를 보내고 있는 전병건 동문은 요즘 분주하게 병실을 오가며 환자를 돌보고 당직을 서고 있다. 모든 인턴들이 그렇듯 졸린 눈을 비비며 의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엉덩이 싸움 

전병건 동문이 앓고 있는 근무력증은 체내에서 근육을 만들고 유지하는 단백질을 생성하지 못하는 병이다. 대부분의 희귀난치질병 환자들처럼 그 역시 뒤늦게 자신의 병명이 근무력증임을 알게 됐다. 선천성 질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에야 비로소 병명을 알게 된 것이다. 막상 그는 무덤덤했지만, ‘치료 약은 없어도 병명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병건 동문은 자신의 병에 대해 자세히 탐구하고 싶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의사의 꿈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제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자 사실 저희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셨어요. 행정고시를 봐서 공무원이 되거나 로스쿨을 가라고 권하셨어요. 이과 공부가 더욱 좋았던 저와 이견이 생겼죠. 그러나 당시 다녔던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재활의학과 간호사분께서 어머니께 ‘장애를 가졌어도 충분히 의사를 해볼 수 있다’고 권유하셨어요. 결국 부모님께서도 한번 해보자고 동의하시고, 적극 지원해 주셨어요.”


자사고에서 전교 1등의 성적을 거두던 그였지만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 고3 수험생들은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데 그는 체력이 약해서 11시~12시엔 잠을 자야 했고, 그러다 보니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최대한 쉬지 않고 오래 앉아서, ‘느리게 천천히’ 공부했다. 오래 앉아 공부하기는 곧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매일매일 공부의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이었다. 부족한 체력을 극복한 그의 공부 비법은 쉬는 시간을 없애고 단지 우직하게 엉덩이 싸움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병에 대한 관찰을 기록하고 최신 연구를 정리, 약의 예후를 적은 ‘자기 관찰 보고서’ 형식의 소논문을 작성하는 등 의사로서 꿈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시절을 풍성하게 한 장애학생지원센터  

사실 전병건 동문은 여러 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모두 의과대학이었다. 성적은 뛰어났지만, 자신의 장애 때문에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장애학생을 받아주지 않는 학교가 많아서 초중고 내내 새로운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 대학교의 합격 발표날도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느 학교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아서 수시에서는 안 되는 것인가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연세대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어요. 평상시 무덤덤한 편이지만 그때는 조금 놀랐던 것 같아요. 특히 면접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합격을 했다고 하니 더욱 그랬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대학교의 ‘고른 기회 특별전형’은 면접을 하면서 차별적인 요소가 개입할 수 있다고 보고 아예 면접 과정 없이 선발한 것이었어요.”


당시 우리 대학교 의대에 1급 장애를 가진 학생이 입학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병건 동문의 합격 여부를 결정짓기 전, 의과대학 학장 이하 주요 교수들이 모여 회의를 했고, 만장일치로 합격을 결정했다. 결정 후 합격 통보를 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 대학교는 휠체어로 의대 시설 통행이 가능한지 점검했다. 계단 경사램프 설치, 임상기술센터에 장애인 화장실 설치 등 전병건 동문을 위한 지원은 계속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윤리인권위원회 장애학생지원센터는 그가 대학 생활을 평범하게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과 때는 장애학생지원센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신체의 한계로 학교생활이나 학습에 어려움이 없도록 다양한 지원을 해주셨어요. 무엇보다 학생들이 근로장학의 일환으로 참여하는 활동 보조 도우미는 예과 동안 제 이동이나 대학 생활에 큰 도움이 됐어요. 본과 때부터는 의대 고유의 과정 때문에 의과대학의 자체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많은 자문을 해 주셨어요. 특히 실습 직전에는 저와 어머니, 임상실습 위원 교수님과의 간담회도 마련해 주셨고, 매번 어려움이나 필요가 있을 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셨죠. 학교생활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어요.” 


장애학생지원센터를 비롯한 학교 측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그는 평범한 캠퍼스 생활을 누렸다. 공부만 하지 않고 다른 활동들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은 총학생회 산하의 장애인권위원회 활동이다.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학내에서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저는 어찌 보면 부모님의 도움 아래서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내온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데 장애학생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또 그래야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장애 학생들의 어려움을 학생회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협의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카라카 때 그간 소외됐던 장애 학생들의 자리를 재조정했던 일이었어요. 그 밖에도 이것저것 많은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본과에 올라가 밀도가 높아진 학업에서의 어려움은 학과 동기들과 함께 나누며 이겨낼 수 있었고 그는 그렇게 6년간의 의대 생활을 한 번의 휴학 없이 마쳤다. 




신체의 한계에 부딪혔던 의사 고시 

근육 힘이 모자란 전병건 동문에게 난제 중 하나는 바로 ‘의사 고시’였다. 의과대학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수 관문이지만 신체적인 문제로 잘 해내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바로 실기 시험이었다. 다양한 모형을 이용해 처치나 진단 기술을 시행해 보는 것. 심폐소생술이나 채혈, 마취, 봉합술 등이다. 무엇보다 손의 힘, 그리고 정교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에겐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의과대학 술기센터 선생님들과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교수님들이 회의를 열어 국가시험관과 접촉하시기도 했죠. 하지만 국시원에서는 자격시험이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어요. 술기센터 선생님들이 조언해 주셨는데, 실기를 하다가 어려운 것이 있으면 조금 움직여 달라는 등, 환자에게 요청을 하면서 진행하면 오히려 환자와 관계를 쌓아가며 진료한다는 점에서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셨어요. 많은 도움이 됐죠. 실기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단번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고시에 합격한 전병건 동문은 지난 2월 꽤나 감격스러운 졸업을 맞았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자랑스러운 어머니 상’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공이 가장 크다는 그. 어린 시절부터 매일 등하교를 함께하고 어학연수까지 동행하신 어머니의 모습에 감사와 함께 안타까움도 겹쳐진다. 


“대학시절에는 장애학생지원센터 체계가 잘 잡혀 있어 문제가 없었지만 고등학교까지는 입학 문제부터 학교생활의 도우미 지원까지 어머니께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어요. 교육청에서는 예산 때문에 도우미 지원도 어렵다고 하고 또 제 입학을 꺼리는 학교도 많아 어머니께서 많이 싸우기도, 울기도 하셨어요. 그게 참 안타까웠습니다.” 


어쩌면 그의 의대 생활은 부모님, 친구들, 교수님, 장애학생지원센터 관계자 등 여러 동행들과 함께해서 좋았고, 또 그것이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환자 가족의 마음까지 치유할 수 있도록 

지난 2월 말부터 세브란스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전병건 동문의 원래 꿈은 ‘재활의학과 의사’였다. 자신과 비슷한 병을 가진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의 꿈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다. 의과대학 공부 과정에서 정신의학 분야가 특히 흥미롭기도 했거니와 결정적으로 실습 때 만난 한 환자 가족의 이야기가 꿈의 방향을 바꿨다.


“2학년 실습 때 외래 진료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어요. 재활의학과 나동욱 교수님의 외래 진료 시간이었죠. 발달장애를 가진 5살쯤 되는 환아가 있었는데 발달장애 때문에 인지 기능도 많이 떨어지는 아이였어요. 그 아이의 어머님이 진료실에서 우시면서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라고 물으셨어요. 그게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저희 가족은 그래도 경제적인 안정이 있으니 어머니께서 전적으로 저를 케어해 주시는 게 가능했고, 또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 주실 수 있었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환우 가족들이 많아요. 그러다 보면 가족 내에서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돌보는 부모님뿐 아니라, 질환을 가진 환우의 형제자매의 심리적인 어려움도 있고요. 아마 제 동생도 부모님께서 저를 더 배려하시니 서운함이나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정신의학과 의사가 돼 단순히 환자뿐 아니라 만성질환 환자나 난치병을 가진 환자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치료를 하고 싶습니다.” 


정신의학과 의사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다거나 크게 각광받는다거나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환자, 그리고 환자 가족까지 돌보고 치료할 수 있는 영역으로 치료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갖는 현재의 사명감이자 열정인 셈이다. 



환자의 입장에서 더욱 가까이 있는 의사로 

전병건 동문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의사들이 환자와 굉장히 가깝게 있지만 한편으로는 환자의 마음을 제대로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만성질환으로 병원에 다니는 환자이기도 하니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양쪽을 모두 고려하고 또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그는 환자의 질병과 함께 마음을 이해하면서 환자 입장에 설 수도 있는 그런 의사가 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큰 문제 없이 인턴 생활을 하며 임상의 기초를 쌓고 레지던트에서 전문의까지 강행군의 과정을 감당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한 사람의 장애인으로서 그가 바라는 또 다른 지점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남들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봐 줬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인터뷰 요청이 올 때마다 고민하곤 합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단지 장애인이 의과대학에 들어가고 또 의사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매우 특별한 일이 돼 버리죠. 언론에 보도될 만큼요.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계를 두는 시선들을 뒤로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는, 어쩌면 현재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고민하는 이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조언자일 것이다. 


“체력적인 한계가 있는 제가 한때는 인턴을 못 하게 될 위기를 맞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그때 오히려 생각한 것, 또 주변에서 들은 조언은 ‘하나만 길이 아니다.’라는 거였죠. 자신의 계획대로 순탄하게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좀 돌아가거나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또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이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병건 동문은 대학시절 장애인권위원회 일을 하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겠다.”라는 마음가짐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언제나 우등생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꼭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인지, 오히려 그것이 장애인들의 삶을 더 평범하지 않은 존재로, 목적이 뒤바뀌어 버린 상황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그는 그저 장애인의 삶이 보다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또 매일 특별한 의사보다는 환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은 ‘꿈꾸는 인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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