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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대안 찾기의 여정, 한국 사회과학의 지평을 열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1-11-25

대안 찾기의 여정, 한국 사회과학의 지평을 열다 

중도주의적 삶의 철학으로 인생 삼모작을 가꾼 안병영 행정학과 명예교수(정치외교학 59) 



대안을 찾아온 길에서 인생 삼모작을 일구다  

안병영 명예교수는 다섯 살에 해방을, 열 살에 한국전쟁을, 스무 살에 4·19 혁명과 이듬해 5·16 군사정변을 겪었고 청장년기에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경험했다.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에서 격변의 시간과 함께했다. 생애 전반에 걸쳐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목도해온 것은 사회과학자로서 사회와 시대가 요구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출발점이 됐다. 그 스스로를 개혁적 중도주의자로 일컫는 안병영 교수의 삶은 어느 것에도 치우침이 없는 균형과 상생의 삶이다. 많은 이들이 극단의 이념에 치우친 시대에서 그는 꾸준히 주류보다는 비주류, 대안 찾기의 여정을 모색해 왔다. 이를 통해 그는 한국의 사회과학 연구의 새 지평을 열어온 선구적인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은퇴 후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 도시에서의 분주한 삶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삶의 주인으로서 시대를 아우르는 통찰,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 속에 살며 그가 고안한 ‘인생 삼모작’ 방법론과 연결된다. ‘인생 삼모작’이란 같은 땅에 삼모작을 하듯 생애 주기에 따라 세 번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일터에서 30년을 일하고 50대 중반에는 자리를 옮겨 평소에 하고 싶었던 보람 있는 일을 65세까지 하고, 마지막으로 시골로 못자리를 옮겨 텃밭을 일구며 ‘자연 회귀’의 삶으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생계 위주에서 가치 지향으로 삶을 가꿔가는 일.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정책가로서, 그리고 자연인으로서 삶을 관통하며 그가 걸어온 길이다. 



캠퍼스에서 만난 새로운 세계 

안병영 교수는 우리 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그가 우리 대학교를 선택한 것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풍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연세 캠퍼스의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화창한 봄날, 캠퍼스에 첫 발을 디딘 순간,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고교 시절 익숙했던 권위적 질서, 규격화된 생활에서 벗어나 우리 대학교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풍을 느끼며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캠퍼스는 당시 억눌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여유 공간, 여백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특히 숲에서 친구들과 토론하고 자연 속을 산책했던 시간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전공 수업 외에 사학, 경제학 등 타 과의 강의를 수강하고 수많은 서적을 읽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자양분이 된 시간들이었습니다.” 


안병영 교수가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정치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정치평론을 보는 것에 재미를 느꼈고 정치인에 열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정치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을 목도하며 정치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영역이라는 것을 절감했고, 정치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예측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당시는 엄혹한 시기였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캠퍼스에서 그는 비판적 지성인이 되고자 했다. 대학 2학년 때는 ‘연세춘추’ 기자로 활약했다.

 

“글 쓰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자 역할은 즐겁고 의미가 있었어요. 후에 교수로 임용돼 연세춘추 주간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판적인 기사에 대한 압력을 받기도 하는 등 당시 어려운 일들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연세춘추는 가장 끈질기게 부조리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와 시각을 유지했습니다. 당시 가장 결기 있는 매체였지요.”


3, 4학년 시절엔 학술 서클인 ‘시사문제연구반’의 이름으로 연세춘추에 ‘이 주일의 시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열정을 가지고 가장 많은 기고를 했다. 시사문제연구반은 1962년 제1회 연세문화상을 수상했다. 캠퍼스에서의 이러한 경험들이 없었다면, 그는 우리 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메마르고 낭만적 정서도 크게 줄었을 것 같다고 반추한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좌절의 순간을 모두 맛보며 또 다른 세상에 눈을 뜬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학 2학년 때 겪었던 4·19와 이듬해 5·16은 불꽃처럼 치솟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그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을 안겨 줬습니다. 그때 직접 체험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 또 그에 따른 고뇌와 탐색은 이후 제 한국 정치의 ‘대안 찾기’ 여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민주주의 혁명적 쟁취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꿔나가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대학시절 민주화라는 우리 역사의 한고비를 몸소 겪어내는 과정에서 비판적 지성인의 태도를 견지하며 그 암울했던 터널의 끝을 향해 갔다.



인생 일모작, 학자의 길에 들어서다 

졸업 무렵 안병영 교수는 진로에 대한 세 가지 갈림길에 섰다. 글 공부를 곧잘 하는 데다,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을 좋아하다 보니 공적 영역의 일을 통해 ‘공부가 쓰임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기자’, ‘공직자’, ‘학자’의 길로 진로가 좁혀졌다. 그는 평소 관심을 가졌던 행정학 공부와 함께 진로를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정치학이 이론에 집중하는 학문이라면, 행정학은 이론의 실천에 방점이 찍혀 있는 실용 학문이었다. 사회과학이란 공허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학문이 돼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행정학 선택의 동력이 됐다. 행정대학원에서 두 학기를 마칠 무렵에는 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굳혔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미네소타대학교와 자매결연을 하고 있어 미국에서 출판되는 신간 학술 서적들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과학 도서들은 모두 행정대학원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때 저는 행정대학원 도서관장을 맡고 계셨던 교수님의 조교였기에 신간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등의 서적을 누구보다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난생처음 교육과정과 관계없이 스스로 공부거리를 탐색하고 학습하는 방식을 터득했습니다. 밤새워 책을 읽으면서 지적 충만감을 느꼈지요.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학자의 길은 멀고 고단해 보였지만 그가 ‘특히 잘할 수 있고’, ‘제일 좋아하고’,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그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천직이었던 셈이다. 



제3의 시각에 영감을 준 오스트리아에서의 유학 

학자로 성장하는 길에서 그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또 다른 대안 찾기의 여정이었다. 1960년대 외국 유학은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미국은 외국의 동의어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떠났다. 바로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 오스트리아로의 유학이다. 


“미국은 모든 문물에서 월등한 국가지만 역사와 학문적, 지적 전통이 부족하고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자유주의에 편향돼 있었습니다. 제도 실험의 경험이나 정책 사례의 다양성이 떨어지기에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미국 유학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오랜 역사 동안 자연과학에서부터 심리학, 정신분석학, 논리학, 법학, 철학까지 지성 문화에서 세계적으로 앞서가던 나라였기에 흥미로웠고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유학 시절은 그의 역사와 학문에 대한 관점, 삶의 철학을 정립하고 원숙하게 했다. 좌절을 맛보았던 민주화의 열망, 첨예한 우리나라의 이념 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했던 시간이다. 그의 ‘개혁적 중도주의’ 철학 정립에 영향을 준 의미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1930년대 좌우 간의 갈등이 첨예해 한때 시민전쟁까지 일어난 나라입니다. 이후 나치의 침공으로 독일과 합병됐고 세계 2차 대전에 휩쓸리게 됐습니다. 전후에는 전승 4개국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지만, 좌우가 협력해 제3의 대안인 중립화를 이뤄냈고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이후에도 ‘대연정’을 통해 합의와 상생 지향의 중도주의적 노선으로 안정적 민주주의, 비약적인 경제, 사회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5년간의 유학 생활은 제 사유의 틀과 제3의 관점, 그리고 갖가지 대안 찾기 방식에 큰 영감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에 기반한 사회과학 연구 선도 

유학에서 돌아온 안병영 교수는 학자이자 교수로서 단단히 자리매김하며 인생 이모작의 싹을 틔웠다. 학생이 아닌 교수로 다시 연세에 돌아와 30년 이상 교단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고 개척 연구에도 몰입했다. ‘개혁적 중도주의’를 통해 어느 극단에 치우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과 상생, 합의로써 보다 건강하게 시대와 사회의 과제들과 마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그는 이념의 과잉 시대에 하나의 이념을 온전히 수용하거나 일방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양 극단의 틈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여정도 지속했다. 


그는 그 과정 속에서 사회과학은 그 사회에 뿌리를 두고 그 문화와 토양을 반영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운명, 현실과 연관되는 연구에 관심을 두고 학자로서 소명을 가졌다. 그는 이를 ‘자아 준거성’으로 설명한다. 


“사회과학자들은 그 사회의 시대적 소명과 필요를 바르게 인식하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맞춰 학문 체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이 땅에서 외국의 학문을 하면서 첨단, 선구적이라고 자부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회과학의 자아 준거성을 강조하고 이 사회와 시대가 필요로 하는 분야의 과제를 발굴하며 관련한 개척적 연구에 주력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 사회과학의 ‘한국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1970년대는 아직 산업화에만 온 사회가 몰두하고 있던 시대였지만 복지국가 이론과 복지 행정 분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우리 대학교 행정학과에서 사회복지정책 강의를 처음 개설한 것도 안 교수다. 많은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신청했고 학계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후학들도 배출했다. 이는 현재 우리 대학교 행정학과의 복지국가센터 설립의 기초가 됐다. 우리 사회가 곧 필요로 할 연구라 판단했고 미래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학자로서 큰 보람을 느꼈던 나날들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의 대안 찾기는 한 분야에만 고착된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사회를 단편적인 지식으로 해석해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때문에 그는 다양한 학문 간의 융합 연구를 통해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들며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는 그의 학문을 더욱 풍요롭게 했고 보다 입체적인 연구와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사회의 주류와 갇힌 틀에서 빈틈을 찾고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관점을 모색할 수 있게 했다.


“저는 행정학자이자 정치학자이고, 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을 다른 영역이라고 느껴보지 않았습니다. 몰입했던 분야가 다양하고 꽤 넓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우물만 파는 것보다 힘겹기는 했지만 융합과 통섭의 연구 방식은 학문하는 재미와 희열, 의미를 배가시켰습니다.”



인생 이모작, 이론과 실천을 접목한 정책가로서의 길 

정치 참여에 대해서 뜻이 없었던 안병영 교수에게 어느 날 놀라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문민정부 시절, 대통령이 직접 그에게 교육부 장관 자리를 권하는 전화였다. 10여 분의 통화, 그 짧은 시간에 주저함도 밀려왔지만 결국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익혀온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 보고자 하는 실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보다 ‘살아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훗날 그는 참여정부에서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다시 역임하며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우리 교육의 근간이라 평가받는 교육의 틀을 마련했다. 무엇보다 그의 개혁적 중도주의 철학을 통해 교육의 경쟁력 강화와 복지 두 가지 추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처음 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했을 때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의 파고가 높았습니다.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기존 권위적 관계에 기초한 위계적, 획일적, 공급자 위주의 교육체계를 자율과 경쟁, 다양화와 특성화에 기초한 열린 교육체계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학교 운영위원회 도입을 통해 민주화를, 초등영어 실시를 통해 세계화를, 교육 정보화 프로그램을 통해 정보화를 추진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동시에 ‘교육복지’라는 개념을 도입해 교육의 형평성에도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마련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교육복지종합 대책’을 발표해 대안학교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함으로써 중도탈락하거나 소외된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다. 또한 EBS 수능방송을 도입하고 인터넷 서비스로 전환을 이끌어 내며 소외된 지역의 학생들을 배려했다. 행정가로서 실천했던 정책 중 가장 뜻깊었던 정책들이다. 이후 추진했던 ‘교원 평가’ 시행이나 뛰어난 학생들에 대한 ‘맞춤식 개별화 교육’은 교육복지에만 치우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균형 잡기였다.


많은 정책들을 고민하고 실현하기 위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뇌하는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국민의 삶에 와닿고 실질적인 효용을 주는 정책 실현을 위해 확고한 의지로 과감하게 결단한 시도들이 낳은 결실이었다.





인생 삼모작, 자연 속에서 전성기를 맞다 

30여 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한 안병영 교수는 귀촌해 그가 꿈꾸던 삼모작을 가꾸고 있다. 속초를 거쳐 현재 고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흔히 귀촌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업에 대한 완전한 은퇴는 아니다. 그에게 학자로서의 은퇴는 없다. 글쓰기를 통해 그간 축적해 온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간 매진해온 연구를 완성해 가는 시간이다. 자연은 그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선사한다.


“지나치게 번잡하고 세속적인 ‘관계의 망’ 속에 얽혀있는 대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제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자연 속에 살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이는 자아성찰로 이어지곤 합니다. 농사하는 분주한 일상에서 육체노동 끝에 얻는 고도의 집중력과 사고력은 글의 생산성을 높여줍니다. 자연의 힘 속에서 30~40년간 축적해 온 연구를 정리하며 2~3년마다 한 권씩 책을 내고 있지요. 자연은 영감과 통찰력, 삶의 활력을 선사하는 최상의 화수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자로서의 전성기는 65세 이후부터라고 강조하는 안 교수는 퇴직 후 절필하는 많은 학자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은퇴 후는 갖가지 공적 의무에서 벗어나 축적해 온 학문적 역량과 다양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 여기기 때문이다.


“큰 학자들의 대작들은 노년기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고위직, 엘리트들 사이에서 노년에 글을 쓰지 않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오랜 세월 삶에서 경험하며 축적한 지식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퇴 이후는 각주를 달며 논문을 쓰는 시기를 넘어 이제 후학들에게 영감을 주고 통찰을 나누는 역할을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안병영 교수는 올해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그가 견지해온 삶의 철학, 학자, 교수, 행정가로서의 삶, 그 여정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을 통해 그는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글을 쓰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2년여 후에는 지금 연구하고 있는 주제로 연구서 발간을 계획하고 있다. 그동안 정년 후 75세가 사회과학자의 전성기라고 주장해 왔지만 “이제 80이 훌쩍 넘고 보니 전성기는 개인차가 크고 잘 관리하면 죽을 때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것 같다”는 그는 앞으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지난날을 돌아보면 20대에 마음을 담았던 학자, 언론인, 공직자의 세 가지 길에서 평생을 맴돌았던 것 같다고 반추하는 안병영 교수.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보람을 느끼는 일’을 찾았던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고 또 삶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 바탕에는 ‘모든 순간을 열심히 피워내고자 한’ 노력이 있었다. 치열하게 연구에 매진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이었다. 


불확실성의 시대,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안병영 교수는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자신이 처한 구체적 상황과 자신의 능력, 성향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세 가지 관점을 다양하게 조화, 배합하고 시간적으로 배열하고, 때로는 정도를 조절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포뮬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든 세상이지만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할 것을 권합니다.” 


현시대는 수많은 이해관계와 정치적 이념이 충돌하면서 첨예한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세 개의 못자리를 거두며 중도주의적 삶을 살아온 그는 이분법적 구분이 아닌, ‘함께 사는 삶’을 지향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했다. 중도주의적 철학은 학자의 바람직한 삶과도 맞닿아 있다고 그는 말한다. 결코 단편적인 삶의 조각, 겉핥기와 같은 얕은 지식으로는 이르지 못하는 길.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닌 비판적 지성의 삶은 그가 걸어온 실천적 여정에 고스란히 녹아 깊은 울림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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