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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신촌캠퍼스 소식] 김대중도서관, 미국인이 작성한 김대중에 대한 기록(1974.9~1975.9) 최초 공개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1-11-18

김대중도서관, 미국인이 작성한 김대중에 대한 기록(1974.9~1975.9) 최초 공개

유신정권 시절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과 만나 대화한 내용을 기록


[사진 1. 한석희 김대중도서관장(왼쪽)과 더글라스 리드]


김대중도서관(관장 한석희)은 미국인 더글라스 리드(Douglas Reed)가 유신정권 시절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과 만나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자료를 공개한다.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납치테러 사건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8월 13일 한국으로 강제귀국당한 뒤 장기간 가택연금을 당하다가 10월 26일 연금이 해제됐다. 그 직후 영어회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미국인 영어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수업은 동교동 자택에서 이뤄졌다. 김대중의 첫 번째 영어가정교사가 그만두면서 후임으로 더글라스 리드가 김대중의 두 번째 영어가정교사가 됐다. 더글라스 리드는 1974년 9월부터 1975년 9월까지 약 13개월간 1주일에 세 번 김대중의 동교동 집을 방문해 영어수업을 진행했다.


더글라스 리드는 김대중을 만난 후 김대중을 존경하게 됐으며, 그래서 영어수업을 마치고 난 후에 김대중, 이희호 등과 나눈 대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바로 당일에 작성했기 때문에 내용이 매우 상세하다. 더글라스 리드는 유신 정권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정리한 자료가 훼손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글을 미국에 있는 지인에게 편지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편지가 총 141통이며 분량은 460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매우 방대하다. 더글라스 리드는 이 자료를 지난 9월 김대중도서관에 기증했다.


[사진 2. 수기로 작성한 기록]


이번에 공개한 사료에는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 입장, 장준하 선생 의문사 관련 당시의 기록 등이 담겨 있다. 더글라스 리드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당시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했으며, 이러한 자료는 유신 정권 중반기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 관련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 동교동 자택에서 이뤄진 대화였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하면서도 깊은 대화가 가능했다. 이 시기는 언론의 자유도 없었고 김대중의 대외적인 활동도 크게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적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사료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당시 주요 인사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사 기록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자료를 보면 미국인 더글라스 리드가 김대중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어 김대중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당시 미국인의 시각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미국 사회에 한국은 전쟁과 독재 등 부정적인 측면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더글라스 리드는 김대중을 미국인도 존경할 만한 세계적인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게 됐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 점에서 이 자료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사진 3. 타자기로 작성한 기록]


주요 내용 소개

(1) 인혁당 사건 관련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사건 관계자 8명에 대한 사형선고가 확정됐고 박정희 정권은 확정 판결 후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해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김대중과 이희호의 입장이 이 자료에서 확인된다.


* 1975년 4월 10일 작성한 기록 중에서

She asked me making a sign of a slit across her throat if I knew about the eight. I said that I had learned of it. She said under this government the people are like “flies”, there is no value placed on human life. 


해설: 4월 10일 동교동을 방문한 더글라스 리드는 이희호와 대화를 했다. 이때 이희호는 자신의 손으로 목을 자르는 듯한 흉내를 내면서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한 소식을 아는지 리드에게 물었다. 리드는 알고 있다고 답을 했고 이에 대해 이희호는 ‘유신 정권은 사람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며 유신 정권 하에서 국민들은 마치 파리 목숨과도 같다’라고 하면서 한탄했다. 


* 1975년 4월 11일 작성한 기록 중에서

Mr. Kim said he told his wife when he finished his day in court on Tuesday that he felt Pak would probably act quickly to murder two or three of the eight. (Mr. Kim reported one radio report as having said that one of those being hanged shouted: “I am not a Communist” as he was hung. ) He did not expect that Pak would act so quickly against all of the eight.


해설: 여기서 보면 김대중은 4월 8일 사형선고 확정 직후에 박정희 정권이 2명에서 3명 정도를 신속하게 사형집행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이 8명 전원을 그렇게 빨리(즉, 김대중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사형집행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그만큼 김대중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2) 장준하 선생 의문사 관련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했다. 이 사건 직후 더글라스 리드가 정리한 자료를 보면 장준하 선생 의문사 관련한 내용이 몇 건 있다. 그중에서 다음의 내용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 1975년 8월 27일 기록 중에서

Fall movement. Mr. Kim said he had talked to him & there was to be some democratic organizing in the Fall. 


해설: 김대중은 더글라스 리드에게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을에 장준하 선생과 함께 민주화운동 관련 조직을 만들어서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기로 했다’는 언급을 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전에 장준하와 김대중이 만나 함께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는 내용은 2003년 김대중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증언하면서 확인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 더글라스 리드의 자료는 2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김대중 증언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이다. 리드의 기록은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직후에 작성된 것이므로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해주는 자료이다. 여기서 2003년 김대중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나왔다는 점에서 김대중-장준하 공동투쟁에 대한 합의는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두 번째로는 김대중-장준하 합의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자료에 보면 두 사람은 공동투쟁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고 했고 투쟁의 시점을 가을로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vol.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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