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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Academia] 우리 안의 미얀마/난민과 시민 불복종 운동의 과제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1-04-22

우리 안의 미얀마/난민과 시민 불복종 운동의 과제

문화인류학과 이상국 교수



캠퍼스 이곳저곳 피어 있는 꽃들에 마음 뺏겨 넋 놓고 걷다가도 꽃다운 나이에 저버린 사람들이 떠올라 영산홍 붉은 꽃에 가슴이 아려오는 4월이다. 꽃이 찬란하여 슬픈 건 미얀마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얀마 시민들이 이맘때 동네 어귀마다 피는 노란 바다욱(Padauk) 꽃을 머리에 꽂고 군부가 2월 1일 일으킨 쿠데타에 맞서 시민 불복종 운동에 나서다 목숨을 잃고 있다. 지금(4월 중순)까지 700여 명이 희생을 당했고, 그중에는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체포되거나 쫓겨서 난민이 되어 국경을 넘고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5·18을 떠올리며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지지와 연대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그렇듯이 두 나라의 근현대사 궤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미얀마, 한국의 지경을 넓히다

1945년 8월, 식민지였던 한국과 미얀마 모두 2차대전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1948년에는 모두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민주주의 시행착오를 겪던 중 한국에서는 1961년에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미얀마에서는 1962년에 발생했다. 1987년 한국에서는 군부통치에 맞서서 대대적인 6월 시민항쟁이 벌어졌고, 1988년 미얀마에서는 이른바 ‘8888’(88년 8월 8일) 시민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가 분기점이었다. 한국에서는 시민항쟁이 성공을 거두고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면서 군부의 개입은 과거의 유산이 되었지만, 미얀마에서는 그 항쟁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군부통치가 이어졌다.



(사진 출처 https://www.dreamstime.com)



탄압과 빈곤에 시달린 미얀마인들이 노동자로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 초였다. 그 무렵 한국은 1991년 유엔가입을 계기로 1992년에는 유엔난민기구의 협약서와 의정서에 가입했고, 이에 따라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면서 1994년 난민지위 인정 절차를 도입했다. 그 절차를 도입했지만, 2000년까지 96명의 난민지위 신청자 중 어느 누구에게도 그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그 절차를 형식적으로만 운영한 것이다. 난민지위 인정 절차를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계기는 미얀마 활동가들을 마주하면서부터였다. 2000년에 미얀마 활동 지도자가 출입국관리 당국의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그대로 두면 본국에 송환되어 신변을 보호할 수 없을 처지에 놓이자, 그 송환을 막으려는 방편으로 21명의 미얀마 활동가들이 한국인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집단적으로 난민지위 신청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우리 안의 난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후 한국 정부의 난민 정책은 더디지만 조금씩 난민(지위 신청자)의 권리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개선돼 나갔다. 그간 국내 민주화운동에 몰두하던 한국 시민사회도 미얀마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아시아를 적극 끌어안고 보편적 인권 운동에 나섰다. 미얀마는 우리가 아시아와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자 방법이었다.


한국 정부의 난민 정책은 2012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별도의 난민법을 개정하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이 법에는 난민지위 신청자들의 처우까지도 명시됐고, 무엇보다도 이른바 선진국형 난민 정책이라는 재정착난민(refugee resettlement) 제도의 시행도 담겨 있다. 이 제도는 말 그대로 해외에 머물고 있는 난민들을 우리나라에 재정착시킨다는 정책이다. 그 대상자를 물색하던 중 한국정부는 태국-미얀마 국경지역 난민촌에 거주하는 미얀마 카렌족 난민을 선정했다. 그리하여 2015년 12월 23일에 우리나라에 최초로 22명의 재정착 난민이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왔다. 이렇듯 한국 정부의 난민 정책은 미얀마 정치 활동가 및 소수민족과 맞물리며 운영되어 왔다. 이 맞물리는 고리를 좀 들여다보면 미얀마는 물론이고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난민 사태에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나는 민주주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체성(종족/인종/종교) 문제이다. 미얀마 사태는 탈식민주의 국민국가 건설의 난산과 파국을 드러낸다. 그 파국은 인간을 벌거숭이 난민으로 만들어버린다. 





벌거숭이 난민과 국민국가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미얀마에서 벌어졌던 벌거숭이 난민 사태인 로힝자(Rohingyas) 위기를 마주했다. 벵골 지역에 거주하던 이슬람교도인 로힝자족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규모를 달리하며 미얀마 여카잉주에 이주해왔고 영국은 19세기에 미얀마 식민지를 건설하며 대규모로 로힝자족을 들여왔다. 1948년 미얀마가 독립한 이후에도 그 이주의 물결은 이어졌고 주류 불교도들은 자기들의 영역과 이익을 침해하는 로힝자에 맞서서 종종 집단행동을 해왔던 터였다. 2015년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생존의 위협을 느낀 수십만 명의 로힝자가 방글라데시로 난민이 되어 피신하거나 바다를 떠돌았다. 미얀마 군부는 2016년 10월 로힝자 무력세력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라 낙인찍으며 이를 뿌리뽑는 토벌작전을 자행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국제사회는 충격을 받았다. 국제사회를 더 아연실색케 한 것은 미얀마 국민 대다수는 물론 당시 정부의 수반이었던 아웅산 수찌조차도 군부가 자행하는 학살을 방조하거나 동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체성 정치에 바탕을 둔 국민국가 건설의 배타성과 (의사)민주주의의 부조리를 확인하게 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설립된 국민국가는 자연권으로서 인권 개념에 바탕을 두고 경계 안에 사는 사람이라면 인종이나 종교 등 개인의 출신을 따지지 않고 시민으로서의 성원권을 부여하는 평등과 공화의 원리를 모델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당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었다. 경계가 없는 보편성으로서의 인권과 경계가 확실한 성원권으로서 국민의 조합은 모순이었다. 17-18세기에 자라나던 인권 개념이 19세기 이후 국민국가에 의해 가로채기를 당한 것이다. 더군다나 주류 집단이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국민의 자격을 결정하고 국가를 주도해 나가면서 이에 끼지 못하는 비주류 집단은 오래 거주하면서도 인간 실격자가 되어버렸다. 버마족 중심의 미얀마에서 로힝자가 바로 그런 인간 실격자들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소위 국가 공인 소수민족이라는 카렌족, 카친족 등도 온전한 국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분리주의 운동은 인정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의사 민주주의의 부조리와 잔인함

국제사회가 아웅산 수찌에게 실망한 것은 그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아이콘으로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그 이후로도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참된 인간성의 상징이었기에, 당연히 그가 로힝자 사태를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볼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웅산 수찌가 군부와 한 패거리가 될 수 있다니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여기에서 앞서 말한 (의사)민주주의의 부조리와 잔인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지난 2월 1일 발생한 쿠데타와도 관련되기에 그 전후사정을 살펴보자.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얀마 군부는 과감하게 민주화 조치를 취한다. 민주 인사들은 석방되거나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어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선거도 다시 실시됐다. 2015년에는 드디어 아웅산 수찌의 정당인 NLD가 친군부 정당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승리는 한계가 있었다. 군부 주도로 제정된 2008년 헌법에 의거하여 군부가 의석 25%를 자동으로 차지했고, 내무부 등 주요 부처도 군부가 맡았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의석의 75%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하니, 헌법 개정을 아예 못하도록 군부가 틀어막아버린 것이다. 


이런 한계 속에서 아웅산 수찌는 외국인과 결혼한 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을 뛰어넘어 국가고문직을 만들어 스스로 그 직위에 올라 외교장관도 겸직하는 등 대통령을 거의 유명무실하게 둔 채 국가수반으로서 국정을 주도해나갔다. 그가 정권 재탈취를 노리는 군부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이렇게 군부와 아웅산 수찌가 (의사)민주주의 아래 국민의 지지를 받아내는 경쟁 구도에서 로힝자 사태가 터졌다. 로힝자에 대한 탄압을 거세게 하면 할수록 주류 국민들에게 지지를 더 받게 된 것이다. (의사)민주주의는 군부는 물론 아웅산 수찌까지 삼켜버리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 구도 속에서 다시 정권을 잡으려는 군부와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웅산 수찌가 2020년 11월 선거에서 다시 맞붙었다. 이미 25%의 의석을 확보한 상태에서 25%의 의석만 더 확보하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군부는 이번 선거에 기대를 걸었으나, NLD의 압도적인 승리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군부는 선거 이전부터 코로나 사태로 불참 인원이 많아져 선거인 명부의 조작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고, 로힝자 사태로 치안이 불안한 여카잉주에서는 선거가 취소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웅산 수찌의 독단적 리더십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의 빌미를 찾고자 했던 군부는 선거에 패배하자 불법 선거라는 이유로 지난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연대와 시민 불복종 운동의 미래

한국 정부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강하게 비판하며 군수품 수출을 중단하는 등 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다. 사람 중심의 신남방정책이 말로만 그치지 않은 것 같아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한국 시민사회는 모금 활동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연대가 미얀마 시민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이 단순히 반군부 시위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고 로힝자 사태 등 기존의 소수민족 문제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진행되기를 바란다. 마침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미얀마 활동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성찰이 확산되어 배타적 민족주의에 쉽게 빠지지 않고 공존과 연대의 장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어렵지만 이것이 리바이어던 괴물에게 먹히지 않고 인간성을 유지하는 길일 것이고 꽃다운 나이에 저버린 미얀마 청춘들의 희생을 승화하는 길일 것이다.



이상국 교수는 사회과학대학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난민, 국경, 동남아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vol.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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