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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전시관 밖으로 과학을 끌어내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1-01-25

전시관 밖으로 과학을 끌어내다

유쾌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생화학 83)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생화학 83)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가 쓴 글의 첫 문장은 역사적 사건이나 세상 사는 이야기, 때로는 속담이나 농담으로 시작된다. 위트 넘치고 탁월한 그의 언변이 이끄는 대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세계를 유영하다 보면 어느새 그간 외면해 왔던 어렵고 복잡한 과학의 원리와 법칙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과학 거간꾼,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로 구축한 뒤 줄곧 그 방향으로 걸어온 이 관장의 작전이 통하는 순간이다. 


“스토리텔러가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사람들을 과학의 핵심 내용까지 끌고 가는 것이에요. 최대한 재밌고 쉽게 끌고 가지만 결국 마지막 발자국은 독자나 청자 본인이 걸어야 하지요. 저의 역할은 길을 정리하고 내주는 안내자이고요.” 


방송과 강연, 집필활동을 이어가며 나오는 그의 글 한 문장, 말 한마디는 과학과 인생을 잇는 연결고리다.


대학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이 관장이 연세대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청소년이었던 이 관장에게 과학이란 다소 거리가 먼 분야였다. 농업이야말로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던 이 관장은 당시로는 이름도 생소했던 생화학과에 지원했는데 여기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생화학의 뜻을 ‘살 생(生)’, ‘꽃 화(花)’로 착각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생화학과를 둔 학교는 아시아에서 연세대가 유일했다.


“한 달쯤 뒤에 여기가 내가 생각했던 전공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그만두고 싶지 않더라고요. 학교 문화가 참 좋았어요. 학교에 더 머물고 싶고 또 그만두면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고민할 여지가 없었지요.(웃음)”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 관장은 적극적으로 다른 전공 과목들을 수강했다. 그중 철학과 신학 수업은 대학원 진학을 고려할 정도로 진지하고 치열하게 공부했다.


“한번은 오영환 교수님의 과학철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culture’라는 키워드를 주고 발표하라는 과제를 내주셨어요. 저는 이 키워드를 세포배양으로 이해했고 심지어 다른 친구들 대다수는 농경으로 해석했어요. ‘과학철학 수업인데 당연히 문화는 아니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지요. 발표하는데 교수님이 ‘너 뭐하냐’라는 표정이시더라고요.(웃음)”


결과적으로 낮은 학점이 돌아왔지만 이 일을 통해 이 관장은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아, 여기가 대학, university이구나. 같은 단어를 보고도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니, 싶었어요.”


이외에도 한태동 교수와 김찬국 교수, 서남동 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 몸담은 최고의 선생님들과의 만남으로 이 관장은 자칫 폐쇄적일 수 있었던 지식의 틀을 깨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학문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그의 저작들에서 실패, 비판적 사고, 질문, 관찰, 윤리, 도덕과 같은 인문학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이 관장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로 주저 없이 83학번 동기들을 꼽는다.


“이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저의 세계가 넓어졌어요. 동기들이야말로 저를 가장 성장시켜 준 존재였지요. 진실했고 우애가 깊었어요.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진지하게 경청해 주고요. 정말 최고였어요.”


제각기 다른 배경에서 모여든 청년들은 졸업 정원이 제한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경쟁과 견제 대신 서로 자신의 노트를 빌려주는 상생의 길을 택했다.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 또래의 연대생이라면 다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요?”


50명 남짓했던(입학정원 52명, 졸업정원 40명) 작은 학과에서 이 관장은 공생과 공존의 커뮤니티를 경험했다.



유쾌한 스토리텔러에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로

이 관장은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생화학에 흥미를 느꼈다. 집무실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공룡에 대한 관심 역시 서른이 넘은 나이에 생겼다. 


“사실 신학대학원에 가기로 결심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생화학을 적어 내고 말았어요.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학문의 대상이 아닌, 그냥 매달릴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 대상이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원 졸업 이후 독일 유학길에 오르면서 이 관장은 일반 과학자가 아닌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로서의 꿈을 갖게 된다.


“유학 간 첫해 크리스마스에 이제 막 유학 온 사람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그때 제 머릿속에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란 말이 떠올랐어요. 제가 제일 마지막 순서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미 교수니 연구자니 다 말해서 따라하기도 싫었고요(웃음).”


오랜 시간 야학 교사로 활동하면서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훈련했던 이 관장은 연구원 시절에도 자신의 연구보다 남의 연구를 대신 설명해 주는 데 탁월했다. 그런 그에게 시민과 과학을 연결해 주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몸에 딱 붙는 일이었다. 마침 한국 사회에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라는 개념이 막 도입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최초의 비관료 출신 국립과학관장이 되다

이 관장은 안양대학교 교수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서울시립과학관장을 거쳐 지난해 2월, 비관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립과천과학관의 수장으로 부임했다. 과천국립과학관은 수도권에 위치한 30여 개 과학관의 거점 과학관으로서 다양한 계층과 수준의 지역 과학관들의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관장이 그리는 과학관의 모습은 분명하다.


“이제 과학관은 보거나 배우는 곳에서 하는 곳으로 변해 가야 합니다. 미술관에서 미술 작가들과 시민들이 공동 작업을 하고 도서관에서 작가들과 시민들이 책을 중심으로 만나듯 과학관 역시 과학자들과 시민들이 과학활동을 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프로젝트를 정하고 실제 테크닉을 배워서 연구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는 과학관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연결하는 중개소로, 또한 지역의 복지시설로 기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심하고 질문하되 겸손을 읽지 않기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코로나뿐 아니라 코로나를 둘러싼 비과학적 정보와도 싸워야 했다. 이 관장은 우리가 세상을 좀 더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들이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과학적인 지식과 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과학적인 사고란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래? 어디 숫자와 통계를 한번 따져볼까? 질문하고 확인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세 가지의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본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기존에 가졌던 생각을 기꺼이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적 태도입니다.”


털보 관장, 수다쟁이 공룡 바보, 펭귄. 이정모 관장의 별명이 말해주듯 과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때때로 다른 모습으로 전환되더라도 과학을 사랑하는 그의 에너지 총량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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