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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연세 뉴스] 연세가 기록한 1960년 4월혁명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0-04-16

연세가 기록한 1960년 4월혁명

박물관 특별전시 “청년 학생의 힘!”



올해는 4·19혁명 60주년을 맞는 해다. 그해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진행되자, 전국의 수많은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이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로써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지속되던 12년간의 제1공화국이 붕괴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오늘날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할 정도로 4월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 중의 하나다. 



정오 대강당 앞에 전교생 집결



1960년 4월 19일의 연세


60년 전 4월 19일 우리 연세인들은 과연 어떤 시절을 보내고 있었을까? 당일 정오 화요일 채플 수업을 마친 뒤 새로 봉헌한 대강당 앞에 전교생 3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발작적 방종이 아닌 민주주의라는 것, 그것은 각인의 의사를 자유로이 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집회, 언론, 결사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되어야 함은 물론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정부와 입법부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며 전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와 자손의 건전한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보다 나은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헌법 전문에 기록된바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비상계엄 선포 포고문 제2호



결의문을 낭독한 연세 시위대는 스크럼을 형성하여 백양로를 내달려, 신촌사거리를 지나고 아현동 고개를 넘어 다시 서울역, 남대문, 시청 앞으로 행진해갔다. 


“오늘 우리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다시 한 번 선언하노라. 오늘 우리는 진리와 자유를 탐구하는 대연세인임을 자랑하노라. 이로써 우리는 양심과 학문의 결과에 의하여 부정과 부패를 타파하고자, 과감히 평화적 시위를 행함을 선언하노라.”


“오늘 이 시위는 우리들 자손만대의 번영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라. 우리들은 동물이 아니다. 경찰의 발포행위를 사절한다. 또한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우리들에게 부여한 권리와 의무를 정당하게 행사하게끔 보장하라.”

 

시청 앞 연좌농성에서 발표된 것으로 보이는 선언문에서 연세 시위대는 정부 및 여당과 법원의 양심을 재차 추궁하면서, 이 시위가 평화적이면서도 미래의 번영과 민주주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아현동 고개를 넘는 시위대



이미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몰려 있어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진입할 수 없게 되자 연세 시위대는 종로를 거쳐 원남동, 안국동을 지나 중앙청 광장으로 향했다. 중앙청 앞에서 불시에 경찰의 사격 세례를 받아 의예과 최정규 학생이 희생되고 두어 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결국 연세 시위대는 불가피하게 학교로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을지로를 거쳐 다시 서울역, 서대문을 지나 평화롭고 안전하게 오후 5시 15분 즈음 학교에 도착했다. 

조우현 학생처장과 최현배 부총장, 백낙준 총장 등을 비롯해 모든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맞았다. 대강당 앞에서 가진 마무리 집회에서 연세인들은 다함께 국가의 부강과 평화, 자유를 기원하는 뜻에서 만세삼창을 부른 뒤 해산했다. 



덕수궁 지나 시청앞으로 진행



연세가 기록한 그날의 발자취 … 국가등록문화재 추진 


60년 전 연세의 4·19혁명 활동이 이처럼 상세하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은 당시 정수철이라는 학생의 명의로 작성된 「데모사항조사서」에 시위 준비사항과 시간대별 시위활동 내용이 매우 상세히 기록된 덕이다. 


이 기록은 4·19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정치외교학과 4학년생이던 김달중·안병준 두 동문이 전국을 돌며 3월과 4월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186명과 접촉하여 작성한 면담조사록의 일부다. 두 동문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엄청난 일들이 훗날 대한민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이 상황을 기록해 역사자료로서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손인 원득한(Richard F. Underwood) 선생이 초기에 이들의 생각을 적극 후원했다. 당시 대학원장 김하태 교수, 문과대 홍이섭 교수, 정외과 조순승 교수 등이 지도를 맡아, 대학원 명의의 학교 연구프로젝트로 발전시켜 ‘연세대학교 4월혁명연구반’이라는 명칭도 얻게 됐다. 


4월혁명연구반이 수집해 박물관에 남긴 자료는 면담조사록, 계엄사령부 포고문, 시위대의 플래카드와 완장, 주요 보도자료, 시위대 사진 등 무려 2,688점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186명분의 면담조사록과 19건의 계염사령부 포고문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예고되어 있는 상태다. 민주화 문화유산으로는 최초다. 문화재청은 “해당 유물은 4‧19 혁명 당대에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과 시민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질문하여 작성한 설문지로 현장의 실증적인 기록물”이라며 4‧19 혁명을 이해하는 역사적 가치가 큰 자료라고 평가했다. 



박물관 전시, 코로나 사태 이후 정규 개관 예정 


우리 대학교 박물관은 4월혁명연구반이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특별전시 ‘청년학생의 힘!’을 준비했다. 2·28 대구의 학생시위부터 3·15 부정선거과 김주열 학생의 시신 유기로 인한 마산시위, 4·18 고려대 시위와 4·19 서울과 지방의 대규모 시위, 4·25 전국 대학교수단 시위, 4·26 서울 시위와 대통령 하야 선언에 이르기까지, 60년을 거슬러 올라가 청년 학생들과 온 국민이 함께했던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갈망, 참된 공화국의 희망을 담아내고 있다. 장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사명을 찾아 실천하려 늘 깨어있어 온 연세인들에게 “학도여 깨여라”라는 플래카드가 주는 울림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이유다. 






본 전시는 4월에 개관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정규개관일이 잠정 연기됐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지난 4월 1일 열린 비공개 개관식에 본 전시 기록의 주인공인 김달중·안병준 동문과 당시 현장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김병철 동문(정치외교학 58)이 방문해 그날의 기억을 한마음으로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전시장을 둘러본 안병준 동문은 “4월 혁명 당시 김달중 교수와 같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했는데, 다시 보니까 너무 감개무량하다.”며 “민주주의라는 것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잘 가꿔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달중 동문은 “한국에 올바르게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 잡도록, 잘못되었을 때 옳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분연히 일어나서 문제를 제기하는 시대정신이 아주 중요하다.”며 “역사적 의식을 좀 더 가질 수 있도록 깊은 성찰과 연구가 필요하고 젊은 사람의 패기를 더해 행동하는 지식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후배들에게 당부의 인사를 전했다. 





한편, 본 전시는 코로나 사태 이후 정규 개관을 기다리고 있으나 연세대학교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 현장을 미리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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