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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김성희 동문, 외신의 품격을 높이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9-03-04

김성희 동문, 외신의 품격을 높이다

미 주요언론에서 활약하며 한국의 발전상 알려


1997년 8월 대한항공 801편 괌 추락사고 당시, 단 하나의 기사를 통해 전 세계를 울린 여기연세인이 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에서 외신 기자로 활동하던 김성희 동문(정치외교학과, 80)은 228명의 사망자를 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처절한 스토리를 펜에 담았다. 타임지는 이례적으로 기자의 이름과 사진을 전면에 함께 소개하며 1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보도했다.


“하루아침에 고인이 된 가족들이 떠나기 전 어떤 약속을 했고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사건 속에서 사람들의 스토리를 깊이 있게 다루려고 노력했어요. 23시간이 넘도록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일을 하면서 저 또한 엉엉 울면서 기사를 썼죠. 당시 현장에서 가족을 잃고 제게 야유를 퍼붓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기사를 본 뒤 제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아픈 시간들이지만 결국 기록을 통해 역사와 우리 기억 속에 남게 되니까요.



1987년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딘 김 동문은 외신기자로서 지난 33년간 격동의 대한민국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수행해왔다. 현재 미국 NBC 뉴스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타임지, 워싱턴포스트, CNN 등을 거치며 한국 발 외신 뉴스의 수준과 깊이를 높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변화상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전달함으로써 한국의 발전상에 대한 외국의 이해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우리 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에서 ‘저널리즘 실습’을 강의하며 언론인을 꿈꾸는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외신 보도의 핵심은 문화의 통역”


대학 시절 ‘정치학도’였던 그가 처음부터 언론인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석사 졸업 후 박사를 준비하던 차에 우연히 친구의 제안으로 뉴욕타임스의 현장 취재를 돕다가 제의를 받게 됐다고. 그는 “딱 1년만 같이 일해보자는 심정으로 기자를 하게 됐는데 이게 벌써 33년이 됐다.”며 “골목골목에서 일어나는 민주화의 발자취를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다 보니 취재 자체가 정말 재미있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초반, 명동에서 종로로 이어지는 노조투쟁을 취재 중인 김성희 동문 


“외신이란 저널리즘의 영역 안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발생한 일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을 하면서 한국 밖에 있는 다른 문화와 의식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그 사건을 왜곡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문화의 통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가끔 말도 안 되게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문화에 대한 왜곡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만의 상황을 이해한 뒤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맥락과 연결을 시켜야 하는 거예요. 외신은 단순한 통역이나 번역이 아닙니다. 문화적 맥락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스킬이라고 볼 수 있어요.” 


차별과 편견 …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 


김 동문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촉망 받는 외신기자로 떠올랐지만,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했다. 여성 기자들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당시 앳돼 보이는 20대 외신기자는 많은 현장에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됐다. 


올해 2월 철원 탈북 두루미 취재 현장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 최초 기자회견 후 기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남성 동료 기자들과 함께 가면 저를 비서나 통역이라고 폄하하면서 아예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도 많았어요. 제가 뻔히 있는데 남기자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어떤 이들은 제가 ‘여자’라는 이유로 취재와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을 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기자’였기 때문에 당당함으로 살아내야 했어요. 제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무게를 견뎌내야만 했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고난의 시기였을 거예요.”


그는 언론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여겨지는 취재원들과의 사적인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 동문은 “일부 기자들은 취재원들과의 저녁 식사나 술자리를 통해 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그 행위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사실 그러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정보에 대한 차단도 많이 받았지만 스스로의 능력을 믿었고, 꼭 필요한 정보라면 취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야 


김 동문은 경계선이 무너진 오늘날의 저널리즘 시대에 기자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의 언론인은 한 가지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저 역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지만 아이템을 기획하고 뉴스를 만들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리포팅을 하기도 합니다. 통역도 하고 있고요. 이제 저널리즘에 따로 구분이 없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역할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저 또한 신문과 방송의 융합이 일어나는 것들을 목격하면서 펜기자 시절에 틈나는 대로 방송일에 도전한 덕에 뉴스 프로듀서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평양 남북정상회담 취재 현장에서


그는 “새로운 기계가 나오면 무조건 사서 일단 사용해본다.”며 “생각을 시대에 맞추지 않으면 도태되고 경쟁력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나는 지금 후배들 혹은 제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 호응하고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 변화를 제대로 알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김 동문은 끊임없는 배움 속에서 스스로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충실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남이 세운 잣대에 나를 맞추는 것은 남의 인생을 사는 것과 다름없어요. 자신이 세운 잣대 속에서 과거의 나와 경쟁하세요. 그런 과정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 스스로 하나의 인격으로 설 수 있는 동시에 남에게도 베풀어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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