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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Academia] 새 시대를 일으킨 ‘루터의 종교개혁’을 돌아보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8-12-13

새 시대를 일으킨 ‘루터의 종교개혁’을 돌아보다
『루터의 종교개혁』 발간과 그 의미 


김균진 (연합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약 4년에 걸친 저술 작업이 이제 끝났습니다. 밤에 자다가 잠이 깨면, 전등을 켜고 루터의 책을 다시 펴서 읽던 일도 이제 끝났습니다. 작업 과정 중에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인간의 죄성과 구원의 길에 대한 루터의 깊은 통찰,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습니다. 거짓 앞에서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그의 고집스러운 삶의 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500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은 근대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아울러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죄용서(칭의)와 구원에 대한 루터의 깊은 통찰이 전제되어 있다. 필자가 약 4년에 걸쳐 저술한 『루터의 종교개혁』(새물결플러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둘러싼 신학적·사회적·역사적 차원을 루터의 원전들을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기술하여 종교개혁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고자 집필하게 됐다. 종교개혁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오랜 역사적 배경과 구체적 상황 속에서 이 사건을 기술하고, 가능한 루터 자신의 문헌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주목할 만하다. 


종교개혁의 시작 


종교개혁의 발단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장사 문제에 있었다. 수도사요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성경교수였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출입문에 95개조를 발표하고 면죄부 장사의 중지와 교회개혁을 요구한다. 이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면죄부 장사 배면에는 교황 레오(Leo) 10세와 선제후(황제 선출권을 가진 제후) 알브레히트(Albrecht)의 돈 거래가 숨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는 1513년 막데부르크 대주교 직을 중임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마인츠 대주교가 되어 신성 로마제국의 선임총리(Erzkanzler)가 되고자 했다. 이 같은 중임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에 알브레히트는 교황에게 총 24,000 굴덴(1Gulden운 순금 3.537그람, 당시 사제 월 보수가 6, 8굴덴이었음)을 바침으로 중임에 대한 면제를 받고자 했다. 


이 돈을 알브레히트는 아욱스부르크 푸거(Fugger) 가 은행에서 빌리고자 했다. 푸거 가 은행은 보증을 요구했다. 이에 교황은 알브레히트에게 면죄부를 팔아 절반씩 나누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을 알브레히트는 보증으로 제시하고 돈을 빌린다. 이 돈 외에 그는 면죄부 판매권에 대해 금화 10,000 두카텐(1 Dukaten은 순금 3.44그람)을 교황에게 바친다. 판매 대금의 50%가 이자 및 원금 상환을 위해 푸거 가 은행에 즉시 입금되었다고 한다.


면죄부, 그것은 돈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팔아먹는 행위였다. 종류도 다양했다. 50년, 100년, 500년 단위의 면죄부도 있고, 모든 죄벌을 영원히 면제받고 연옥에서 즉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완전면죄부도 있었다. 종류에 따라 값이 달랐다. 가장 비싼 것은 완전면죄부였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이 같은 부패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매일 드리는 공적 미사, 신자들의 사적 요청에 따른 사적 미사(예배실 좌우편의 작은 제단 구석에서 사제 혼자 중얼거리며 드리는 미사라 하여 ‘구석미사(Winkelmesse)’라 불리기도 함), 죄용서를 받기 위한 보상(satisfactio), 성상숭배, 성유물숭배, 로마순례 등 교회의 거의 모든 행사들이 ‘돈을 건져 올리는 그물’이었다. 



당시 교회의 타락과 루터의 교회개혁


이 돈으로 성직자들은 첩과 사생아를 유지했다. 당시 성직자들의 첩 생활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었다. 교회법은 이를 금지했지만 상위 성직자에게 돈을 주고 면제(Dispens)를 받을 수 있었다. 교황부터 첩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아래 사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같은 타락상을 보면서 루터는 교회개혁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종교재판과 화형의 위협이었다. 이에 루터는 사제들을 가리켜, 사람의 피를 아무리 빨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거머리들’이라 비판하며, 가톨릭 체제 전반을 부인하게 된다. 교황제도, 성직자 제도는 성서에 근거가 없는 인간이 만든 인간적 질서에 불과하며,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결국 교황은 1521년 1월 3일 루터를 출교시키고, 스페인 출신으로 20살에 불과한 신임 황제 카를 5세(Karl V)를 설득하여, 1521년 5월 25일 ‘제국파문(Reichsbann)’을 선언케 한다. 이로써 루터는 누가 그를 죽여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법외자의 신분이 된다. 다행히 그를 지지하는 제후들의 도움으로 루터는 개혁운동을 추진한다. 생명이 달린 38년의 투쟁 끝에 1555년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를 통해 최초의 개혁파의 교회(루터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독립된다(양편의 통합을 포기한 황제는 황제직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고향 스페인의 한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낸다).


종교개혁, 근대의 새 역사를 시작한 세계사적 사건


이 독립은 교황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자유와 다양성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종교, 정치, 경제, 사회, 학문, 교육, 예술 등, 사회 모든 영역이 교회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 그것은 단지 종교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중세 암흑기를 끝내고 근대의 새 역사를 시작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 있는 중세 말기의 ‘모든 것을 밝히는 태양’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은 ‘자유의 정신’이었다. 이 정신을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자유로운 주인이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Christianus homo, omnium dominus est liberrimus, nulli subiectus)” 


루터가 외치는 자유정신의 뿌리는 각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직접성에 있다. 모든 신자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죄용서와 구원을 직접 받는다. 성직자의 중재는 불필요하다.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시오, 교회의 머리다. 모든 신자들이 영적 신분에 속한 사제들이다(만인사제직). 이로써 성직자 계급과 교황 독재체제에서의 해방과 자유가 일어난다. 바로 여기에 자유의 정신의 뿌리가 있다. 이 자유의 정신은 근대 ‘자유의 역사’의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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