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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역사 속 연세] 연세 통합의 두 주역, 백낙준과 김명선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6-12-30

 
연세 통합의 두 주역, 백낙준과 김명선
 
신촌캠퍼스 1960년대 초반
 
신촌캠퍼스 마스터플랜, 1917
 
1915년 연희전문학교는 아직 캠퍼스를 갖추지 못한 채 개교했다. 1917년 당시 국유지였던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 일대의 약 19만 평을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구입하면서 신촌 교정의 역사도 함께 시작됐다. “언더우드의 꿈”이라 불리는 신촌캠퍼스 최초의 마스터플랜이 마련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후 스팀슨관, 핀슨관, 언더우드관, 아펜젤러관 등 주요 건물을 준공하면서 첨단 고등교육 기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동시에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학전문을 통합하여 종합대학으로 개편하자는 논의도 활발히 개진되었다. 비록 한국인이 주도하는 대학을 허락하지 않는 일제의 정책으로 종합대학의 꿈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두 학교의 지도자들과 이를 지원하는 선교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오늘의 연세를 꿈꿔왔던 것이다.
 
해방이 되어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승격되자 통합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48년 두 학교의 교수회에서 합동 찬성의 의결이 있었고, 1949년에는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예과가 연희대학교 안에 설치되었다. 곧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양교의 통합 논의는 일시 중단되었지만, 전후 학교와 병원의 재건에 힘을 쏟는 과정에서 통합의 필요성은 더욱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촌캠퍼스 40주년을 맞은 1957년 연희와 세브란스가 마침내 통합을 이루고 그로부터 5년 뒤 병원과 의과대학을 포함하는 연세의료원이 준공됨에 따라 연세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나아가 그 역사의 이면에는 연세의 교육이념과 통합의 정신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던 백낙준 연희대학교 총장과 김명선 세브란스의과대학 학장이 있었다.
 
백낙준, 명문 연세를 설계하고 키워내다
 
초대 총장 백낙준
 
백낙준 총장 취임서명, 1957
 
백낙준(1895~1985) 초대총장은 미국 파크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동안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목사가 되고자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다시 프린스턴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문학 석사를 받은 후, 예일대학으로 진학하여 192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가을에 귀국해 연희전문의 교수가 되어 문과 과장이 되었다. 연희전문의 문과가 조선어, 조선문학, 조선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국학’의 산실, ‘민족의 대학’으로서 성장해갈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신념과 안목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면서 계속해서 연희에 헌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1942년 9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면서 결국 해직 당하게 된다.
 
6.25 전쟁의 피해를 복구해 간 연희대학교, 1956
 
백낙준 서양사 강의, 1934
 
해방 후 유억겸의 뒤를 이어 교장이 되었고, 마침내 종합대학 연희대학교의 초대총장이 되었다. 그는 오늘날 종합대학으로서 연세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일제하에서 연희전문이 견지해온 민족정신의 고양과 민족학문의 발전이라는 정신을 계승해 1948년 한국 최초의 대학연구소인 ‘동방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직접 소장직을 겸했다. 오늘날의 국학연구원의 모태로서 연세의 학문이 국학에서 비롯되었음을 다시 한 번 공표한 것이다.
 
그의 교육 철학은 1950년 5월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꽃을 피웠다. 한국의 교육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표방하고, 초등학교 의무교육과 교육자치제, 교과서 무상 공급을 위한 국정교과서 인쇄소 설립, 지방 국립대학 설립, 학술원 설치 등 교육의 근간이 되는 제도들을 수립 및 실시했다. 6.25 전쟁 발발 후에도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노천학교, 전시연합대학 등을 추진했다. 그는 장관 퇴임 후에는 다시 연희대학교의 총장으로 복귀하여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교육을 재개하고 학교시설을 복구하는 등 연희의 재건에 앞장섰다. 이후 1957년 백낙준은 연희와 세브란스를 통합한 연세의 초대 총장이 됐다.
 
김명선, 연세 통합과 새 병원 건설을 이끌어내다
 
김명선 부총장
 
김명선(1897~1982)이 자란 황해도 장연 솔내 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진 역사적인 곳이었다. 평양 숭실학교를 마치고 그는 에비슨과 원한경의 권고로 1920년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했으며, 1년 만에 다시 세브란스의학전문에 입학했다. 생리학을 전공한 그는 미국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유학해 3년 반 만에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명실상부한 한국 생리학자 제1세대로 한국의 생리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김명선은 학문적인 면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큰 공적을 남겼다. 학문적으로는 “공명선병(恐鳴善病)”이라는 말이 따라 붙을 정도로 엄격했지만 평소 제자들이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해주었던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김명선 생리학실습, 1932
 
신촌캠퍼스의 의료원 기공식에서 축사하는 김명선 선생(1955.04.23)
 
해방 후 그는 새로운 한국의 의료, 교육의 체계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미군정 시절 세브란스의 선배였던 이용설이 보건후생부장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경기도 후생국장으로 일했다. 또 군정청 문교부장이 된 유억겸의 부탁으로 고등교육국 의학교육담당관도 맡았다. 당시 새로운 한국 인재가 필요했던 의과대학과 병원에 교수진을 확보해주고 운영이 정상화되도록 돕는 일을 맡았다. 최초의 의학 잡지인 『조선의사시보』를 창간하여 학술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세브란스의과대학과 병원 건물은 포화와 폭격으로 건물의 85% 이상이 파괴되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거제도와 청도 등에 세브란스 분원을 만들어 전쟁으로 상한 동포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했는데, 김명선은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의 부학장으로 일하면서 거제도의 병원에서도 근무했다. 전쟁의 포성이 완전히 멎지 않은 1952년 그는 세브란스 제6대학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학장으로서 전후 복구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미군의 지원을 받아 연세 통합을 전제로 한 새 병원 건설을 이끌어내었다. 물론 합동에 반대하는 동창들과 교수들도 적지 않았지만 세브란스의 장래를 생각할 때 단과대학으로 남아있는 것보다는 종합대학에 속하는 것이 장래의 발전을 위해 유리하다는 것이 김명선의 신념이었다. 그 자신이 연희와 세브란스를 모두 다닌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 신념과 열정으로 임할 수 있었다.
 
1961년까지 통합된 연세의 부총장으로 봉직한 그는 명예교수로서 대한가족계획협회장, 원자력원 원장, 사회복지법인 꽃동산애육원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1982년 자신의 시신까지 의학연구와 교육의 발전을 위해 기증했다.
(자료 및 사진 제공: 박물관)

 

vol.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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