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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역사 속 연세] 알렌과 한국 근대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6-12-05

 
알렌과 한국 근대사
 
여인석 교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장)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 및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1881년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안대학교(Wesleyan University)에서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받았다. 이어 1년간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과대학(Miami Medical College)을 졸업했다.
 
조선땅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설립하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1886년)-등록문화재 제447호
 
알렌은 졸업 직전인 1883년 3월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선교사가 되겠다고 자원했고, 의사가 되자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883년 10월 11일 중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알렌이 도착한 중국은 그가 처음 생각하던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고, 그쪽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약 1년 동안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하이에서 알고 지내던 다른 선교의사로부터 중국의 옆에 있으며 막 개항한 조선이라는 나라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알렌은 숙고한 끝에 조선에서 외국인 의사가 필요하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는 1884년 6월 8일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조선의 선교사로 갈 것을 자원했고, 같은 해 7월 22일 선교부로부터 허락을 받은 뒤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은 개항이 되었으나 아직 선교가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그는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활동하며 외국 거류민들의 건강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2월 4일 갑신정변 중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1885년 4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고종의 어의로, 나아가 각국 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임명되었다.
 
알렌의 검안경-등록문화재 제446호-1
 
알렌의 진단서(1885년 9월 13일)-등록문화재 제445호
 
외교관으로서 독립국가 조선의 위신을 지켜내다
 
한편, 1887년 8월 조선정부는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 알렌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렇게 해서 알렌의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조선정부는 박정양을 초대 전권대신으로 임명하면서 알렌을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알렌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의 관리들을 대동하고 1887년 10월 초 제물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이 같은 독자적인 외교행위를 청나라는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 갖은 시도를 다했다. 예컨대, 외교사절단 자체를 소환시키려 시도하거나 미국에 가서는 청국공사관에 먼저 출두해 미국에서의 모든 외교활동을 청국의 지시에 따라 하도록 요구했다. 박정양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알렌은 이는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며 청국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도록 하여 독립국가로의 위신을 지키도록 했다.
 
1889년 6월 참찬관을 사임하고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알렌은 미국 선교부로부터 부산에 선교 기지를 개척할 임무를 받고 다시 선교사로 임명되어, 10월에는 재한 미국 북장로회 미션과 빅토리아 미션 연합공의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1890년 7월 9일 미국 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되면서 알렌은 선교사를 완전히 사임하게 된다. 그렇지만 헤론이 병에 걸리자 선교부와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8월부터 거의 반 년 동안 제중 원의 책임을 다시 맡았다. 1890년 11월 12일 부총영사로 승진했으며, 1897년 7월 27일에는 주한 미국 공사 겸 총영사로 임명받았다. 알렌은 이처럼 외교관으로 전직했으나 자신이 선교사였던만큼 가끔 현지 사정에 어두운 선교사들이 일으킨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알렌의 명함
 
격동의 한국 근대사에 알렌이 남긴 유산
 
알렌은 1901년 6월 21일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받았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소위 카쓰라-테프트 밀약이 맺어져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미국이 인정해주기로 되었다. 미국의 이러한 대조선정책에 크게 반발한 알렌은 1903년 9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조선에 대한 정책을 두고 격론을 벌였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될 즈음인 1905년 3월 29일 결국 미국 공사에서 해임 당했다. 그의 해임 이후 주한 미국공사관은 폐쇄되었다.
 
1905년 일본공사관에서 열린 알렌의 환송 오찬에 참석한 주한외교사절들(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알렌)
 
알렌은 1905년 6월 9일 오랫동안 정들었던 조선을 떠나 9월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정착하지만 1909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식에 축사를 보내기도 했다. 1930년 알렌은 건강이 악화되어 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1932년 12월 11일 향년 74세로 타계했다.
 
알렌은 이처럼 격동의 한국 근대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누구보다도 한국에 애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vol. 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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