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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역사 속 연세] 한국 기독교의 역사 언더우드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6-10-01

1890년대의 언더우드

 

연세대학교의 창립자 명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지금으로부터 100 전인 1916 10 12 향년 58세로 삶을 마감했다

 

1885 4 5 부활절에 한국땅에 도착해 제중원과 의학당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고아원과 장로교회, 성경 번역과 신학교, 진료소와 병원의 운영, 지방선교와 연합운동, YMCA 출판· 언론,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31년의 모든 활동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다

 

<연세소식>에서는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을 맞아 부인인 릴리아스 호튼 여사(Lillias Horton Underwood, 한국명 호돈 好敦, 1851~1921) 전기 Underwood of Korea(1918) 연세 국학총서로 간행된 『언더우드자료집 1~5(2005~2010) 일부를 인용해 조선 사랑과 기독교 선교, ‘조선기독교대’(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그의 각고의 노력을 반추해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 선교 20주년과 25주년을 맞아 언더우드 선교사가 발표한 글과 강연록을 살펴보자.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확신으로 그곳을 위해 특별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안 의학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도 선교 제안도 하지 않았고, 어떤 교회에서도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교회들의 해외선교사업 지도자들조차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글을 쓰고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전갈이 집으로 날아온 것은 바로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 자신이 가지 않느냐 것이었습니다. 나는한국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다. 한국은 어떻게 되는거지?”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선교 25주년 회고, 1909) 

 

우리는 우리가 목숨을 모험을 한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을 들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사명을 시작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외국 것이라면 모든 것을 반대하고, 특히 외국인을 싫어하는 야만인을 만날 것으로 예상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손하고 친절하며 따뜻한 마음씨에 관대하며 후한 민족을 발견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그들은 우리를 곳에서 좋은 손님으로 대접해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어려움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인내심이 많은 민족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당해서 일단 화가 한번 나면 마치 억압된 끓는 물이 폭발하듯이 숨어 있던 야만성이 증가된 힘을 가지고 되돌아온 듯했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관점에서 때는 매우 어리석지만, 동양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받고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가진 민족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기꺼이 열심히 복음서를 사는 민족을 발견했습니다. 본토인들이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책을 사려고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한국 있는 그의 사자들 앞에 마련해 놓으신 활짝 열린 문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선교 20주년 회고, 1904)

 

선교 30주년 기념 연설(1914)

 

한편, 언더우드 부인은 한국에 최초의 여성 의사로서 언더우드보다도 여덟 연상이었는데, 1889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원한경(元漢慶, 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 얻었다. 한국에 파송되어 오던 즈음 이십대 중반 청년 언더우드의 인상착의에 대해 언더우드 부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언더우드 부인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Lillias Horton Underwood)

 

당시 그의 젊은 모습을 한번 그려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그의 키는 170~172 센티미터쯤이었다. 어깨는 넓었고, 보기 드물게 머리에 쌍가마가 있으며 짙은 밤색의 많은 곱슬머리가 이마까지 내리덮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단정하여 섬세하고 세련된 반면, 강인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코는 약간 매부리코였고, 눈에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간 편이었다. 입은 부드러운 말이 흘러나올 같은 생김새였지만 여성적이지는 않았다. 턱은 강하고 단단한 인상을 주었다. 맑은 암갈색의 눈에는 진지함, 목적에 대한 성실성, 열정과 친절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만으로 설명 없는 무엇이 순수하고도 차분한 이마와 맑은 눈에 서려 있었는데, 부드러움과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듯한 인상은 아마도 오래 전에 안식을 취하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으리라.”(언더우드 부인

 

언더우드 사랑채에서 시작된 새문안교회(1887)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해 제중원에서 알렌의 진료를 돕고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성경의 한국어 번역을 시작했다. 언더우드의 정동 사택은 예배뿐만 아니라 교육사업의 출발지가 되었으며, 성경번역 활동과 기독교 서적 출판을 위한 기독교서회가 출범한 선교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국에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한 이후로 성경을 서둘러 번역해야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들과 직접 대화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고 했고 무엇보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국어로 전하고 싶었다. 작업의 어려운 점은 성경을 가감 없이 온전히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원어의 표현을 그에 해당하는 한국어 표현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까 몹시 걱정하면서도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고려해 도착한 해에 개인적으로 번역을 시도했다. 1886 초에 아펜젤러 목사는 필자와 협력하여 마가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는데, 해가 지나가기 전에 번역을 마쳤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를 대신 하여 스코틀랜드성서공회가 1887 봄에 이것을 인쇄했다.”(언더우드, 1911) 

 

언더우드의 사택에서 매주 열리던 예배는 처음에는 외국인들만 참여하는 것이었으나 1886년부터는 한국인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1886 7월에는 최초의 세례식이 열렸고, 1887 9월에는 14명의 세례인으로 장로교 교회를 설립했다

 

초기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1887)

 

지난 화요일 (9.27) 우리는 14명의 수세자로 이뤄진 한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를 조직했으며, 지난 주일에 명의 수세자를 추가했음을 알려드립니 . 한국인들은 꾸준히 한명씩 오고 있으며 우리는 사업이 거의 매일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H. G. Underwood, 1887.9.30.)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한국에 언더우드는 지방전도의 길을 열었으며, 특히 한국인 스스로 선교활동을 펼쳐갈 있도록 지도했다

 

“(1887) 11월에 언더우드는 소래에서의 부름에 응하여 처음으로 지방여행을 떠났다. 물론 그는 말을 타고 떠났지만 일정 구간을 걷기도 했는데, 이로써 그는 조금이라도 서울 바깥의 내륙을 여행한 유럽인이 되었다. 이렇게 언더우드가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여 한국 내륙을 여행한 외국인이 반면, 그의 아내는 한국 고유의 가마를 타고 여행한 외국여성이 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라고 있다. 사실상 여행(1889 3 14일에 결혼 신혼여행이자 선교여행) 서울에서 강계와 의주까지의 길을 이런 식으로 거쳐 유일한 여행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아들은 송도와 해주를 거쳐 소래에 이르기까지 새로 놓은 길을 처음으로 자동차를 타고 달린 사람이 되었다.”(언더우드 부인

 

지방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가족(1889)

 

우리는 처음부터 복음 전파의 짐을 토인의 어깨에 지웠다. 가능하면 모든 곳에서 일을 기꺼이 그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모든 한국인들로 하여금 복음은 자신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전하도록 맡겨졌으며, 하나임의 동역자가 되는 것은 자신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왔다.”(언더우드, 1900) 

 

언더우드와 원한경(1895)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 왕실과도 매우 돈독한 관계를 가졌다. 언더우드 부인은 민비의 시의였으며 민비 시해사건 이후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종을 호위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고종 탄신 축하행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왕실과의 관계에 대해 언더우드 자신은 별로 크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왕실 주변에서는 언더우드가 가장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왕은 공개적으로 그를 형제라고 말했으며, 자신이 어려울 그를 위해 언더우드가 일을 결코 잊을 없다고 했다.”(언더우드 부인

 

언더우드 선교사는 오랜 기간 선교회의 재무를 담당하며 세브란스병원의 건립에도 직접 참여했고 서거하기 전까지 세브란스병원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모임에서 밝혀진 대로 비록 병원이 미국에 있는 기독교 신사의 후의로 제공되었고 그가 장로교 선교부의 관리 하에 두도록 하였지만, 모든 국적, 계급, 신조, 종교의 삶들을 돌볼 것이며, 가슴 속에 동료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진 모든 자들의 마음에 가장 좋은 인상을 것이다.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에게 주변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에 감당해야 책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기관이 우리에게 그러한 일을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닌가?”(언더우드, 1904) 

 

특히 서울에 신학교가 아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교육기관,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의지는 1915조선기독교대학설립으로 결실을 맺었으나,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선교회 내부의 반대에 직면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17 일본 총독부에 의해 연희전문학교로 승인되었다

 

한국인들은 변화된 국내외 여건에 대처 하기 위해서 교육도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열망이 강합니다. 한국인들은 정부(총독부) 제공하는 교육뿐만 아니라, 우리 중고등학교가 제공하는 교육보다도 높은 수준의 교육을 갈망합니다. 기회를 찾아서 많은 수의 학생들이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회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실행한다면 나라의 고등교육분야에서 자유롭게 사역할 있습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마땅한 의무라는 명제에 모두가 분명히 동의하리라고 믿습니다.”(언더우드, 1912.12.23.) 

 

1913 언더우드 선교사는 건강이 위중한 상태가 되어 의사 에비슨이 고국으로 돌아가 치료받기를 권하였으나, 대학의 설립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며 사양했다. 언더우드 부인은 그가 서거하기 직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바로 전날 , 극도로 쇠약하고 말하기도 몹시 힘겨운 상태에서 언더우드는 정도는 나도 여행할 있어, 있어라고 하는 같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의아해하며 내가여보, 어디로요? 한국으로요?”라고 묻자 그는 얼굴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여 응답 했다. 워낙 쇠진하여 침대에서만 지내야 때조차도 그는 한국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다음날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나는예수가 곁에 계신 같아요?” 라고 질문했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빛나면서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님의 은혜가 계속되고 당신을 지켜줄 같아요?”라는 질문에 그는 음의 고통 속에서도 똑같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움직여 앞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확신에 응답을 했다.”(언더우드 부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서거에 대해서 수많은 기관과 개인으로부터 추모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언더우드 선교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던 에비슨의 편지를 살펴보자

 

언더우드 장례식(YMCA), 1916 

 

우리가 얼마나 슬픔을 느끼는지, 특히 개인적으로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24년간 언더우드 박사와 저는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함께 살면서 서로 아주 친밀하고 지속적인 조화 속에서 사역했습니다. 저는 완전한 상실감을 느끼며, 그의 따뜻한 지원과 동역없이 제가 곳에서 계속 사역하는 것을 거의 상상할 없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박사를 한국에서 아니 아마 선교지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가운데 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만큼 한국인의 신뢰를 받은 자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가장 높은 자부터 가장 낮은 자까지 모두가 그를 존경했고 사랑했습니다.”(선교본부에 보낸 편지, 1916.10.16) 

 

조선기독교대학 초대 교장인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거하자 부교장이었던 에비슨이 뒤를 이어 교장이 되었다. 언더우드 추도식에서의 연설문에는 에비슨의 다짐이 담겨 있다

 

그의 동료 사역자들은 그의 위대한 믿음, 왕성한 활동, 넘쳐흐르는 열림, 그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붙잡는 인내가 없었더라면 대학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대학의 완전한 발전이 그에 대한 가장 기념이 되고, 대학이 다가올 미래에 한국 사상과 활동에 미칠 지속적이고 지대한 영향력의 측면에서 그의 풍성한 삶에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증명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에비슨, 추도식 연설, 1916.12) 

 

언더우드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한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가 발표한 공식 추도문은 다음과 같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사람들을 바라고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 앞에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한국 교회의 개척자요 설립자로 기독교 역사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추도문, 1916.10.23.) 

 

마지막으로 언더우드 선교사가 가졌던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선교 20주년의 회고문에서 그가 밝힌 전망이다

 

나는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한국, 완전히 해방된 나라, 정치적, 지적, 영적으로 실정과 무지와 미신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나라, 기독교 한국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미래에 모든 읍과 마을에 세워진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동체 정신을 가진 기독교 교사들을 보며, 모든 대도시에 세워진 중고등학교들, 의과대학과 간호학교, 모든 도시에 자급하는 병원들, 효율적인 본토인 여자 전도인들, 성경 교사들, 고통당하는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에게 빛과 위안을 주는 여자 집사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는 자비의 기관들을 봅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 기독교 마을, 기독교 통치자들, 기독교 정부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됩니다.”(1904)

(자료 사진 제공: 박물관)

 

vol.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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