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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Academia] 창립기념일 단상(斷想) : ‘1957년 연세’를 다시 생각함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6-05-04

창립기념일 단상(斷想) : ‘1957년 연세’를 다시 생각함

 

김도형 교수 (문과대학 사학과)

 

5월 연세 동산에는 산수유, 목련, 벚꽃에서 시작된 봄의 향연이 진달래, 철쭉을 거쳐 청송대의 신록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연전 교수 이양하가 소나무 사이로 보는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과 “신선하고 생기 있는 신록(新綠)”을 예찬(禮讚)했던 시절이다.

 

이 맘 때에 창립기념식을 하게 된 것은 1957년이었다. 연희와 세브란스가 합쳐 연세로 새롭게 출범했으므로, 이를 기념한 ‘창립식’과 백낙준 초대 총장의 취임식이 그날 열렸다. ‘연세’의 새로운 출범과 그 이전에 쌓았던 선배 선교사, 교수, 선배들의 노력과 수고를 다시 이어가겠다는 다짐의 자리였다. 같은 모태에서 시작된 두 학교가 합쳐지면서 기독교 정신을 대학 교육에 맞게 “진리와 자유”로 정립하고, 사회와 국가, 세계를 위한 학문을 지향했다.

 

 

교파를 넘은 연합 정신

 

1880년대 조선 정부는 기독교 전교(傳敎)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의료와 교육’은 인정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의사’와 ‘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 이들의 활동 근거지는 1885년에 만들어진 제중원이었다. 연세의 교육과 의료사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다. 서양 의술의 우수성이 널리 퍼져 찾아오는 환자가 넘쳤다. 제중원에 근무하던 선교 의사들(알렌, 헤론, 에비슨 등)은 신분의 귀천을 돌아보지 않고 환자를 치료했으며, 제중원과 세브란스 의학교를 통해 한국인 의사를 양성했다. 천대받던 백정 출신도 학생으로 받아들였고, 민족과 민중을 위한 의사를 배출했다.

 

제중원은 또한 선교와 교육의 기지이기도 했다. 제중원 개원 직전에 한국에 온 언더우드는 물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제중원을 거쳐 전국으로 흩어졌다. 한국에 온 직후부터 몇몇의 학동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언더우드는 이듬해 1886년에 알렌, 헤론과 더불어 고아학교를 설립했다. “부모 없고 집 없는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학교’였다.

 

제중원의 의료·교육 사업은 모두 선교회의 관할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의료선교사 외에 복음선교사도 ‘교사’로 근무했다. 제중원은 신앙공동체였고 여기에서 이루어진 모든 사업은 줄곧 기독교 교파를 초월한 연합(Union) 정신 아래 이루어졌다. 따라서 제중원에서 비롯된 연희와 세브란스는 당연하게 합쳐질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 시기부터 두 학교를 통합하려던 노력은 기독교 이념의 실현 차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연세대학교 현판식

 

교훈과 교육: 진리와 자유, 인격 도야, 통재 교육

 

연세의 건학정신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는 말씀에 따라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진리와 자유”는 기독교 정신을 일반 고등 교육에 적용한 것이었다.

 

제중원에서 비롯된 ‘기독교 정신’을 ‘진리와 자유’로 정립한 때는 1957년 즈음이었다. 연세 합동 이후에 “본 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기하여 ‘진리와 자유’의 교훈 밑에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광범 정치한 응용 방법을 교수 연구한다”는 교육 방침을 정했다. 기독교 핵심 원리를 대학 생활과 학생들의 인생에 적용했던 것이다. 곧 “진리는 자유의 본질”이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 14:6)고 했듯이 그 진리는 예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하고, “연대 학생들은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학문을 닦은 후에 ‘자유’의 날개가 돋치어” 사회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연세대학교 요람』, 1961년)

 

이에 따라 연세의 인재 교육도 정립되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인재상을 고민했다. 6.25 전쟁 후에는 ‘재건과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사회적 과제에 따라 “민주 사회 발전에 봉사할 수 있는 지도적 인격”(1952), 혹은 “대학의 권위를 높이고 대학의 사회에 있어서의 지도적 지위를 구가하기 위하여 국난 극복의 신념과 부흥 정신을 진작”(1954)하기 위한 교육을 지향했다. 그 후에는 진리와 자유로 정립된 기독교적 인격도야, 즉 “국가와 인류사회에 공헌할 지도적 인격 도야”를 천명했다(1961).

 

백낙준 총장 최임식(1957)

 

이런 목표에 따라 백낙준 총장은 ‘통재(通才) 교육’을 제창했다. ‘통재’는 ‘천지인’ 삼재(三才)를 두루 통하자는 것이었다. 즉 삼재는 “세 가지 재주가 아니라 세 가지 근본”으로, 천도(天道)는 형이상학, 철학, 종교 등 모든 이론적인 학문, 지도(地道)는 자연과학, 인도(人道)는 인류의 역사와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나타내며, 따라서 통재 교육은 ‘천지인’에 해당되는 학문들을 서로 ‘융합’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과목으로 인간과 사상, 인간과 사회, 인간과 우주 등을 개설했으며, 백 총장은 이 교육이 학교의 전통이면서 유업(遺業)이라고 했다.(『백낙준전집』 3, 「연세의 유업」)

 

이와 더불어 기초와 전공의 균형 교육도 지향했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격도야는 다양한 교양 과목을 통한 넓은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그 위에 전공을 쌓아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공에도 다양한 영역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타 학과의 전공과목 두과목을 전공으로 인정했다. 대학과 학과의 장벽을 없애려는 노력으로 지금 생각해도 매우 선진적인 제도였다.

 

‘화충’ 학풍의 재정립: 온고지신, 실사구시, 과학 정신

 

일제 하 연희전문은 ‘민족주의자의 소굴’이었다. 민족문화와 조선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이를 학교의 학문 연구와 교육 방침으로 정했다. “본교는 기독교주의하에 동서 고근(古近) 사상의 화충(和衷)으로 문학, 신학, 상업학, 수학, 물리학 및 화학에 관한 전문교육을 시(施)하야 종교적 정신의 발양으로써 인격의 도야를 기(期)하며 인격의 도야로부터 독실(篤實)한 학구적 성취를 도(圖)하되 학문의 정통(精通)에 반(伴)하야 실용의 능력을 병비(幷備)한 인재의 배출로써 교육 방침을 삼음”이라고 천명했다(『延禧專門學校狀況報告書』, 1932).

 

천지인을 의미하는 대강당 건물 정면의 표상

 

해방을 거쳐 연세 합동 후에 화충의 학풍도 재조정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교양과 전공”의 균형 교육을 포함해 학풍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이 가운데 인문, 사회, 자연 등의 학문 연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논어』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학문 태도를 통해 민족문화 연구를 강조했다. 일제하 연전 시절부터 민족문화를 연구하면서 ‘국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이념적 근거였다. 둘째, 모든 학문의 연구와 진리의 탐구에는 과학적 정신을 강조했다. “피상적, 형식적, 명리적(名利的) 태도를 배제하고 치밀, 정확, 창의적 연구 태도를 치중”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입장을 통해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학문 연구를 천명했다. “참되고 실제적인 일을 위하여 진리를 찾으라 함”으로, 학문이 현실에서 필요한 실제적 응용 학문, 그리고 선진국만을 모방하는 학문이 아니라 주체적인 우리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전 시절부터 추구했던 ‘화충’의 학풍이 다시 정립되면서 지금 연세 학풍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교내의 구석구석에 연세의 정신과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를 담고 있는 오래된 석조 건물, 우리 민족의 상징인 ‘태극’ 문양, 연세 뜰에 만발했던 무궁화 꽃 등이 그러하다. 연세 통합 후에는 통재교육의 상징인 ‘천지인’ 문양을 대강당 정면에 높이 걸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역사의 흔적을 후배인 우리가 잘 가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편리성과 실용성을 내세우며 이를 자꾸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천지인’과 ‘연세’를 상징한 한글탑이 공사 과정 중에 기단부(‘地’)가 없어졌다. 통재교육에서 ‘지’는 자연과학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없어진 채 이공계 건물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참 부끄러울 따름이다.

 

vol.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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