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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김종배 교수, 장애를 극복하고 꿈을 이루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4-04-01

최근 재활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재활을 치료적 관점에서 보았다. 따라서, 의학적 모델이 재활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재활을 사회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추세로 바뀌었다. 장애는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 사회가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관점이다. 이는 신체적 치료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이 사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모델이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척박한 국내 재활 환경에서 재활공학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 선구자가 있다. 그는 바로 이번 학기에 우리대학교 원주캠퍼스 보건과학대학 작업치료학과 교수로 임용된 김종배 동문(응용통계학 80학번)으로, 본인 스스로 장애를 겪고 있기에 그의 삶의 철학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꿈을 꾸고, 꿈이 꺾이다.

학부 때부터 김종배 교수의 꿈은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본래 이과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적록 색약이라 의대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과로 가서 본인이 좋아하는 수학으로 잘할 수 있는 전공인 응용통계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는 응용통계학을 바탕으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다. 당시 우리대학교는 산업공학 전공이 없었기에 김 동문은 카이스트 산업공학 전공으로 석사과정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입학시험에 대비하여 상경대에서 개설되지 않는 고급수학 과목을 공대와 수학과에 가서 수강했다. 게다가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잘 놀자는 신념하에 산악동아리 활동도 하며 친구들하고 후회 없이 놀기도 했으며, 방학 중에는 절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후 김 교수의 인생에서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1985년, 난간에서 떨어져 목에 골절상을 입게 된 것이다. 목뼈 위에서 다섯 번째 경추 5번 손상으로 가슴 이하가 전신 마비되어 회복할 수 없는 신체장애를 겪게 되었다. 결국, 사지마비 판정을 받은 김 교수는 큰 절망과 좌절을 겪기 시작했다.

사고 이후 5년 동안 김 교수는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겪었다. 사고 후 처음 2년 동안은 여러 병원의 치료를 받으며 고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장애는 결국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 3년 동안은 치료를 포기하고 그냥 집에만 있었다. 대소변은 물론 스스로 휠체어를 밀수도 없었기에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장애인을 위한 교통수단도 없었기에 나갈 상황은 엄두도 못 냈다. 카이스트에서의 학업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 꿈의 날개는 서서히 꺾여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무기수처럼 앞이 캄캄했다.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가족에게 짐만 되고 집안에만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기 자신보다 부모님의 절망감이 더 컸고, 그런 부모님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당시 가족 모두가 힘들어할 때, 누님이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김 교수에게 성경책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이 때 김 교수는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을 읽고 마음속에 큰 울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 구절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연세대 교훈인 줄만 알았지 성경 구절인 줄은 몰랐어요.”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고, 피조 세상에서 진리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부모님을 보면서 느끼는 죄책감과 괴로움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말을 알게 되니까 자유함을 느꼈어요."

5년여 동안 하나님과 교제로 삶의 위로를 받은 김 교수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된다. 건강한 몸으로 살든 장애를 가지고 살든, 하나님이 항상 보고 계시기 때문에 진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부터 김 교수는 친구들에게 먼저 전화하고 도와달라고 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저도 저와 같은 처지를 겪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었는데, 항상 당신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당신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새로운 세상을 여는 환경의 변화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변할 때, 외부의 사회적 환경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1995년에 아래아한글로 XT 286과 20메가 하드디스크가 장착된 AT 286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김 동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전동 휠체어를 이용해 이동이 편리해졌다. 1993년경 최초로 일본 스즈키 전동 휠체어를 수입해 파는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처음 타고 스틱으로 조작하며 움직인 순간 김 교수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감격하였다고 한다.

김 교수를 살린 것은 ‘하나님’과 ‘기술’이었다. “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기술, 전동 휠체어 등이 있었기에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했어요. 재활과 보조기술이 나와 같은 중증 장애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체험하게 되었던 시기였어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김 동문은 인터넷으로 장애인 대상 교육, 최초로 장애인 정보 제공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서버를 구축하였다. 홈페이지에 재활공학 정보를 많이 올리면서 재활에 대한 김 동문의 관심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1990년 말, 김 교수는 나사렛대학 재활공학과로부터 재활에 관한 강의 요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정보만을 공유하고 활동한 수준이었기에 두 학기 강의하면서 학생들 가르치는 데에 한계를 느꼈다. 제대로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낀 김 교수는 나이 40세, 공부를 놓은 지 16년 만에 재활과학을 공부하고자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 재활과학기술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당시에 제가 들어갔을 때 원격 재활과 원격 진료 관련해서 컴퓨터 프로젝트가 있었고, 거기서 이를 담당할 연구원을 구하고 있었어요. 결국, 제가 적임자로 낙점되어 프로젝트를 수행하였고, 관련 논문을 쓰면서 졸업할 수 있었어요.” 피츠버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김 교수는 박사 후 과정, 조교수로 부임한 후, 국내로 돌아와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재활보조기술과 재활로봇중개 연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오랜 역경과 장애를 딛고, 올해 김 교수는 우리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김 교수는 모교에 와서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드디어 나의 다치기 전의 꿈을 이루게 해 주시게 한 것 같다는 소감을 전하였다. “저는 다친 후에 꿈을 잊고 살았어요. 그런데 달려오다 보니까 모교 교수가 되어 있었어요.” 교수가 되고 싶었던 학부시절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김종배 교수는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로 여기는 연세 캠퍼스에서 보조기기를 통해서 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참여를 더욱 많이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아가 연세대가 장애인 접근성 면에서 사회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온 정성을 쏟겠다는 소감을 전하였다.

다른 동료 장애인들에 비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김 교수는 “제가 많이 받은 만큼 학생들에게 많이 나누어 주고, 병원에서 작업치료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이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치료사를 교육하고 싶습니다. 또한, 작업치료의 방향을 선도하는 학과가 되도록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겠습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현재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김 교수의 취미이자 즐거움은 아내와 딸, 그리고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것이라고 한다. 소소하지만 크나큰 행복 속에서 김 교수의 가는 길이 연세와 우리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되길 기원한다.

글: 김진성 기자(yayua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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