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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6만 입양아의 대모, 할머니 의사 조병국 박사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2-12-01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시기에, 입양아들 속에서 기적을 만납니다” 발견된 아이들의 주치의로 살아온 50여 년 낙엽이 떨어지던 가을의 끝자락에 일산 탄현동에 위치한 홀트일산복지타운을 찾았다. 50여 년을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어머니로 살아온 한국 입양아의 대모, 조병국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6.25 전쟁 이후 해외입양이 본격화됐을 때부터 입양아들의 건강을 챙겨온 입양 역사의 산증인이다. 소박한 청록색 후드티 차림의 조병국 박사는 홀트일산복지타운 내 ‘말리의 집’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벽난로가 달린 아담한 주택인 말리의 집에는 조 박사와 두 명의 중증장애인, 그리고 이사장 말리 홀트(Molly Holt) 여사가 함께 살고 있었다. 홀트 패밀리의 사진과 더불어 입양을 간 아이들이 감사의 뜻을 담아 보내온 수많은 사진들로 따뜻하게 장식된 작은 거실에서 조 박사는 향기로운 차를 우리며 “생후 3개월 때 독일로 입양 간 아이가 서른이 훌쩍 넘어 모국을 방문하며 선물로 가져온 차”라고 소개했다. 입양을 떠난 아이들이 뿌리를 찾고자할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람, 조병국 박사. 여든이 넘은 할머니 의사가 여전히 청진기를 들며 이야기하는 ‘입양’과 ‘기적’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입양아들과 함께한 평생, 정년을 넘겨도 나는 소아과 의사 조병국 박사는 1958년 우리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래 14년간 서울시립어린이병원에서, 그리고 30년 이상을 홀트아동복지회 부속병원(홀트아동병원)에서 재직했다. 1962년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청진기를 든 이래로 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며 살아 온 것이다. 1993년 정년퇴임을 했지만, 박봉인데다 힘든 일 때문에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아 당초 정년을 15년이나 넘긴 75세까지 홀트아동병원 원장으로 헌신했고, 2년 만인 2010년 다시 홀트일산복지타운으로 돌아왔다. 이 복지타운에는 중증장애로 인해 입양조차 갈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파양되어 돌아온 사람 등 갓난아이에서부터 63세 노인까지 토탈케어가 필요한 270명의 장애인들이 함께 살고 있다. 어린 두 여동생의 죽음과 전쟁을 거치며 의사를 꿈꾸다 조병국 박사가 소아과 의사가 된 건 가족의 죽음과 시대의 아픔 때문이었다. 1남 6녀의 맏딸인 조병국 박사의 여동생 둘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6.25 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죽음과 고통을 목격했다. 어린 시절 제2차 대전, 8.15 해방, 그리고 6.25 전쟁 등 질곡의 세월을 거치며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입학원서를 갈가리 찢어버릴 정도로 아버지는 의대 진학을 반대했다. 당시는 여성이 의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사가 되었고 “독하게 싸우며, 참 억척으로 살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단 있게 유리천장을 부수며 살았다. “여권이 신장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과장이 되지 못했을 때는 속상했죠. 경험은 내가 훨씬 많은데 새로 오는 남자 선생님이 먼저 진급하거나 그럴 때요. 어머니께서 한번은 병원을 찾아오셨는데 일하는 저를 보고 ‘네가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을 하려고 그 어려운 공부를 했냐’며 우셨어요. 그땔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죠.” 내 별명은 ‘국제거지’ 조병국 박사는 의사로서의 능력을 갖춘 이후 곧장 서울시립아동병원에서 가난하고 아픈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1960년대 전후 사회는 비참했고, 전쟁으로 척박해진 한국 땅에서 가난은 굶주린 아이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하루에도 어린 아이들이 수십 명씩 죽어나가는 현실 앞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아이들을 통해 기적을 체험할 때마다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옛날 시립아동보호소에 부랑아, 거지 등 거리에서 잡혀온 아이들이 3천 여명씩 있었어요. 어느 날은 아이 둘이서 문 열고 들어왔다가 막 도망가기에 가서보니까 죽은 아이 시체를 놓고 도망갔더라고.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을 하기 힘들 거예요. 시멘트 바닥에 쌀가마를 잘라서 깔아놓고, 가운데 난로 하나 놓고, 유리창에 비닐을 붙여서 찬바람 들어오는 걸 막은 시설이었는데. 이는 또 얼마나 많았던지.”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르웨이, 독일, 미국, 캐나다 등 세계 각지에서 아이들의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의료 기부를 받아내면서 그는 ‘국제거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조 박사는 오히려 정부의 눈엣가시였다. 자원봉사를 위해 병원을 찾은 주한외교사절 부인들과 잦은 접촉을 했던 조 박사의 행보가 당시 청와대 민정반에게까지 보고되고, 당시 보건사회부에서는 병원 측에 ‘외국인들에게 손 벌리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당시 청와대 민정반 인사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홍옥을 아세요? 홍옥은 겉은 붉지만 속도 그렇습니까? 제가 그저 불평불만이 많은 여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외국인들에게 손 벌리고 다닌다고 문제 삼는데, 저는 울다가 죽으면 버려지는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작은 생명을 긍휼히 여겼고, 국제거지를 자청했고, 지독한 싸움꾼을 마다치 않았으며,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계란 100개를 사서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먹이며 인술(仁術)을 베풀던 그는 시립아동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홀트의 영웅, 입양아 진료 리포트와 맞바꾼 오른팔 환자의 진료 리포트를 너무 많이 써서 오른팔과 어깨가 마비된 의사가 또 있을까? 조병국 박사는 홀트로 거처를 옮긴 이후 ‘발견된 아이(그는 고아를 버려진 아이라 쓰지 않는다)’의 신체검사 리포트를 쓰는 일을 시작했다. 홀트를 통해 입양된 아이들은 모두 조 박사의 청진기를 거쳐 갔다. 아이들의 건강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해 리포트를 작성하고, 차후 입양된 아이들의 상태에 대해 그곳의 주치의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꼼꼼히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쓰고 또 썼다. 이 뿐만 아니라 신체 각 부분에 대한 소견을 국제 소아과 수준에 맞추는 등 한국의 입양 시스템을 체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통 의사들이 이미 정년퇴임을 했을 나이가 지난 이후, 아픈 어깨를 치료할 겸 조 박사도 잠시 일을 쉬고 싶었다. 미국 이민 수속을 밟기도 했고, 개업도 해봤다. 하지만 요청을 받고 곧 다시 홀트로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를 ‘홀트의 스페어타이어’라고 말하지만 입양 부모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홀트에서 조병국 박사의 존재는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입양은 마지막 희망입니다” ‘아이를 돈 받고 판다’, ‘고아수출국’. 입양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이 존재하지만, 조 박사는 그래도 입양은 고아가 된 아이들에게 있어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한다. 부모의 유무가 아이들의 성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고아들이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당시, 입양이 된 아이들이 고등학교, 대학까지 마치는 것을 보고 그는 경탄했다. “1972년에 들어온 4세 미만 기·미아가 2천3백여 명이었고, 그중에 380여 명의 아이가 죽었어요. 그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자라는 것보다 해외입양이라도 가면 잘 먹고 살아남을 수 있고, 잘 자라면 대학도 갈 수 있잖아요.” 그는 ‘고아수출국’의 오명을 피하는 것보다 아이들의 생명을 존중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또 생사의 기로에서 입양을 통해 희망을 찾은 아이들이 또다시 희망의 씨앗이 되는 기적을 늘 접하고 있다고 했다. “기저귀를 차고 입양 갔던 아이들이 멋진 성인이 되어 찾아오면 뿌듯해요. 또 자신이 입양된 아이들이 커서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가 많아요. 심장병을 앓다 입양됐던 아이가 커서 또 다시 심장병 아이를 입양해 수술시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걸 보면 가슴이 뭉클하죠. 저는 한 명도 입양을 못했는데…….” 미션스쿨의 정체성을 잘 이어나가는 연세인이 되길 “나는 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대에 갔을까? 또 어떻게 필요할 때마다 가장 적합한 전문가, 봉사자, 기부자를 만날 수가 있었을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기적을 체험할 때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을 되새긴다고 했다. 조병국 박사의 삶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 대대로 기독교집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감리교 선교사에게 성경을 배운 목사였고, 외할아버지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독립 운동가이자 장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부친, 남편, 동생, 사위들이 모두 우리대학교 동문인 만큼 연세와의 인연이 깊어 학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르다고 했다. 그는 우리대학교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션스쿨로써 그 뜻을 계속 잘 이어나간다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응원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조병국 박사는 옆 건물로 향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아이들을 품어주고, 장애우들을 하나하나 보살피는 모습은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겨울을 앞둔 추운 날씨에도 그곳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조 박사는 7만여 평의 대지에 병원, 교육시설(학교), 생활동, 재활관, 체육관, 농장 등을 갖추고 있는 홀트복지타운 곳곳을 보여주고 취재진을 배웅했다. 얇은 옷차림으로 나온 조 박사에게 “추우실텐데요”하고 건네자, “참아야지요, 뭐”하는 답이 돌아왔다. 조병국 박사의 온화하지만 강직한 모습이 드러나는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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