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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감자꽃 스튜디오 대표 이선철 동문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1-12-01

평창 폐교에서 ‘문화의 꽃’ 피운 문화기획자 문화예술계에서 내로라하는 기획자가 1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서울살림을 정리해 강원도 평창의 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머문 작은 시골마을에는 ‘감자꽃’이 피었다. 강원도를 상징하는 ‘감자’와 문화를 상징하는 ‘꽃’이 어우러진 ‘감자꽃 스튜디오’가 문을 연 것이다. 폐교를 활용한 이 복합문화공간을 중심으로 시골마을에 새 생명력이 만발하고 있다. 한 사람의 문화기획자가 시골마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 걸까? 감자꽃 스튜디오의 성공사례는 평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춘천 낭만시장, 주문진 시장 꽁치극장 등 지역 곳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 문화를 접목해 지역사회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그 유쾌한 변화를 이끌고 있는 감자꽃 스튜디오 대표 이선철 동문(사회학 86학번)을 만났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기획사 ‘난장’ 거친 실력파 감자꽃 스튜디오 대표 이선철 동문은 감자를 닮았다. 둥근 인상과 사람 좋은 미소는 소박한 강원도 감자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이 순박해 보이기만한 사람은 강원도 출신이 아니라 서울 토박이고, 게다가 영국 유학파이며, 자우림 등 잘나가는 가수를 발굴한 기획자라는 세련된 이력의 소유자다. 문화기획자라는 직업 분야의 정체성도 확실치 않았던 시절인 80년대 중반, 대학 재학 시절부터 그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공연판을 쫓아다니며 배우고 익혔다. “제가 대학 2학년이었던 1987년, 교내 백주년기념관이 개관했는데, 그때 개관 기념 축제를 만들기 위해 거의 백주년기념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당시에는 조명, 음향, 무대감독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없었고, 신규 채용된 직원 한 분(최두영 씨)과 단 둘이서 모든 작업을 했었죠.” 공연판을 쫓던 그는 당시 마지막 남은 예인집단이었던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만나 기획실장으로서 10년간 착실하게 내공을 다졌다. 백인여성 한명과 놀이패 네 명, 그리고 이 동문 단 여섯 명으로 시작한 놀이패는 어느새 사단법인으로 발전했다. 이 동문은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이십대 시절을 보내고, 문화기획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자 영국 런던시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예술경영과 문화행정, 문화공간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다. 그리고 유학에서 돌아온 이 동문은 창업을 했다. 대학로에 중형 공연장도 운영하며, 자우림, 이적, 노영심, 긱스, 윤상, 롤러코스터 등의 아티스트가 소속된 대중문화 기획사 ‘난장’과 ‘폴리미디어’를 경영했다. 평창 폐교에서 생태적 문화의 꽃씨를 찾다 이렇게 성공적인 문화기획자의 삶을 살던 그가 2002년 돌연 일을 멈추고 강원도 평창 이곡리로 내려간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었다. “비만으로 건강이 안 좋아진 거예요.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불규칙하게 생활한 탓에 급격히 체중이 늘었어요. 그러다가 뇌경색으로 마비가 왔고. 무슨 지역문화에 엄청난 관심이 있어서 평창에 들어간 게 아니라 살 빼러 간 거예요. 하하하. 당시 스코트 니어링 등 생태친화적인 삶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어린나이에 은퇴해 전원생활을 하거나 요양원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 평창의 폐교를 찾아 들어간 것뿐이죠.” 평창에 자리를 잡고 1년 만에 30kg이 감량됐다. 그러면서 도시민들이 원하는 ‘웰빙적 코드’가 지역의 자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때마침 김진선 당시 강원도지사가 그를 찾아왔다. 시골에 일반인들이 들어와도 환영할 판인데, 유명한 전문 기획자가 연고도 없는 곳에 제 발로 들어왔으니 아마도 횡재한 기분이었나 보다. 도지사는 이 동문에게 지역사회를 위해 자문을 해달라는 제안을 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폐교였던 평창초 노산분교를 활용한 감자꽃 스튜디오의 건립, 지역주민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밴드와 풍물동아리 결성 등의 문화예술 교육이다. 감자꽃 스튜디오는 늘 개방되어 있는 문화공간이지만 도시민들이 생각하는 연수원이나 문화센터처럼 상설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말에는 주민의 동아리 활동 공간이자 공연장으로, 주중에는 외지인들이나 단체가 워크숍을 하는 공간으로 이용한다. “시골의 특성상 복합성을 띠는 문화공간이예요. 동아리방이자 공연장이고, 예술가의 작업장이기도하고, 커뮤니티센터 역할도 하고, 도서관, 박물관, 식당 공간까지도 있죠. 지자체에서 지은 시설이니까 장소사용료나 입장료를 받지는 않아요. 방문자 맞춤형 프로그램이나 강의를 요청하시면 그런 것은 인건비를 받고 전문적으로 해드릴 수는 있지만. 그리고 기본적으로 먹고 자는 것은 마을에서 해결하도록 해요. 주민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숙박을, 부녀회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 식사를. 이런 식으로 저희는 흡입요소와 체험공간이 되고, 돈을 버는 것은 주민들이 할 수 있도록 해요. 지역사회에서 귀여움 받는 문화공간이 될 수 있도록. 우리마을 모토가 ‘문화로 유인하여 관광으로 돈 벌자’거든요. 문화공간이 지역의 영업사원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공공적 역할을 하는 거죠.” “문화로 유인하여 관광으로 돈 벌자!” 또한 이곳이 원래 학교였다는 점에서 생각을 확장해 학교의 이벤트 사이클을 복원한 각종 행사를 기획했다. 봄 소풍, 여름 캠핑, 가을 운동회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사에는 생태코드와 문화코드를 적절히 접목해 외지인, 도시인들을 유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을운동회에서는 지역의 산림자원을 활용해 걷기길, 산악자전거, 패러글라이딩 등 레포츠 축제를 벌였다. 코스 곳곳에는 예술적 장치도 해놓았고, 숲속 광장에서는 마임 아티스트와 인제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아카펠라 공연도 했다. 이렇게 이 동문의 손길이 닿는 곳곳에서 문화와 지역의 가치가 결부되어 마을 전체의 부가가치가 창출되고 있다. “자연에서 많은 희망을 얻었고, (이전의 삶이나 경험과) 분절된 귀촌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공분야를 살려서하는 일과 그것의 부산물들이 지역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면이 생겼고, 그러다보니 그러한 일들을 체계적으로 할 필요가 생겨 결국 회사를 운영하게 된 거죠. 또 고용된 직원들이 청년이니까 그들에게는 지역에서 새로운 직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생긴 선순환이 시작된 거고.” 십년 후를 그려볼 수 있는 입체적 멘토링하고 싶어 유휴시설을 활성화한 감자꽃 스튜디오의 성공사례는 종결된 하나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되고 있다. “어떤 프로젝트를 잘 수행하고 나면 실제수익은 그 이후부터 창출된다고들 해요. 현장 경험의 부산물을 팔아먹는 달까요. 그 결과물을 책으로 내거나, 유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익을 내기도 하죠. 폐교 활용, 지역복지 성격의 문화예술 교육, 재래시장 활성화 프로젝트 등의 경험을 이야기해 달라는 강의나 자문 요청이 많아 스케줄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예요.” 이 동문의 강의는 정부나 지자체, 기업 등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학기에 여덟 곳의 대학에서 강의를 할 정도로 대학에서의 강의요청도 쇄도한다. 문화에 대한 폭발적 관심 증가로 인해 교육수요가 급증한 것에 비해, 현장경험과 학위, 네트워크 등을 두루 갖춘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일종의 부채 의식이 있어요. 정체성도 모호하던 시절,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이렇게라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젠 자원봉사를 해서라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쪽 분야는 커리어가 구조화되어 있지 않잖아요. 자격증이나 입사 시즌이 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니까. 누가 조언을 하느냐에 따라 긍정적 의지를 굳힐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최소한의 방향을 잡아주고, 너무 장밋빛 미래를 꿈꾸거나 처음부터 위축되지 않도록 입체적인 멘토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거창한 성공스토리는 범접하기 힘들어 막막하잖아요. 학생들이 10년 후를 예측해 볼 수 있는 롤모델이나 멘토로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동문은 문화에 대한 열정, 사회에 대한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소통 능력을 갖춘 후배라면 기획자의 길에 도전해 보라고 이야기한다. 흔히 기대하는 명예, 권력, 부를 보장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재미있는 분야이고, 더불어 나름대로 보람과 의미도 있어 ‘재미’와 ‘의미’의 균형을 맞추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십대는 순수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삼십대는 왕성한 대중문화예술 비즈니스 활동으로, 사십대는 공공문화예술에 대한 헌신으로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하며 진화해 온 이선철 동문. “매일 꿈을 실현하며 살고 있다”는 그의 다음 발자취에 또 어떤 꽃이 피어날지 행복한 기대를 해본다.

 

vol.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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