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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연세 뉴스] 언더우드 탄생 150주년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9-07-01

한국을 사랑해서 한국인이 된 언더우드 일가 ㄱㄱㄱㄱㄱㄱ<청년시절의 언더우드> 오는 7월 19일은 한국을 사랑해서 한국인이 된 역사적인 인물 H.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선교사가 탄생한지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언더우드 일가는 4대에 걸쳐 한국인보다 더한 한국 사랑을 실천하며 한국의 발전에 앞장서 왔고, 이 땅에 대학을 설립하여 한국 최고의 명문 사학인 오늘날의 연세대학교를 일구어냈다. 언더우드 일가가 한국의 교육·종교·사회 발전에 대한 기여는 한국 근대사에 길이 보존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것들이다. 원두우 선교사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그와 그 일가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원두우(Horace G. Underwood) 한국 근대 교육과 선교의 초석 ㄱㄱㄱㄱㄱㄱㄱㄱㄱ<언더우드 고아학당>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새문안교회> 원두우 선교사는 미국인 선교사·교육자로 한국에 건너와 평생을 한국을 위해 일했다. 그는 1859년 7월 19일 존 언더우드의 4남으로 런던에서 출생하였고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선교지를 모색하던 중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약혼녀에게 한국 선교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파혼을 선언하고 언더우드는 홀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그때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로 그의 나이 25세였다.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입국한 그는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으며, 1886년 고아원을 겸한 학교를 설립하는데 이는 경신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887년 벽지 전도부터 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 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으며,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기도 했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 한국 근대교육의 기초를 놓다 <원두우 가족 선교여행(1894)>ㄱㄱㄱㄱㄱㄱ<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들과(1905)>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성서번역회> 원두우 선교사가 한국에서 이룬 많은 사역들 중 교육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한국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았다는 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한다면 언더우드야말로 그가 선교하던 시대로부터 100년 후인 오늘 한국 근대화의 근간을 이룬 공로자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개설, 배재학당 대학부와 연합하여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는 1916년 10월 신병으로 영면할 때까지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원한경(Horace H. Underdwood) 대학 교육의 큰 날개를 펴다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한복입은 원한경 가족> 원한경 박사(Horace Horton Underdwood)는 부친이 생명을 바쳐 일궈놓은 교육기관을 더욱 발전시켜 우리대학교를 한국의 대표적인 고등사학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청목의 서울 토박이인 원한경 박사의 한국사랑은 남달랐다. 그의 고향인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이 되기를 원했다. 원한경 박사는 1890년 9월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주로 서울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의 모교인 뉴욕대학에서 교육학 및 심리학을 마치고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언더우드 일가가 큰 성공을 거두고 널리 분포하여 사는 미국에서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한국 선교사가 되어 다시 내한했다. 원한경 박사의 활동은 언더우드 1세의 마지막 꿈이자 필생의 과제였던 대학 교육 부분에서 빛을 발했다.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경신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제3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교육과 행정을 맡아 대학을 발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3.1운동, 제암리 사건을 알리는 등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며 규탄하는 일에 힘쓰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결국 태평양전쟁 때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광복과 함께 다시 한국에 와서 미 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언더우드가 못다 이룬 한국사랑을 실천해 가면서 살다 6.25 전쟁 참전 중인 1951년 과로로 별세하였다. 원일한(Horace G. Underwood) 6.25전쟁 상처를 이겨내고 학원 발전의 중추가 되다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한국전쟁시 활동 중인 언더우드 형제>ㄱㄱㄱㄱㄱㄱㄱ<휴전회담증서를 바라보는 원일한> 원한경 박사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이 중 장남이 원일한 박사(Horace Grant Underwood)이다.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 해밀턴대학과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한 기간을 빼고는 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살며, 우리나라 교육 발전과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39년 미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여 연희대학교에 부임했다. 일제 말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후 1947년 복직하는 등 한국역사와 아픔을 함께 하였다. 한국전쟁 시에는 미 해병사단 정보부에서 한국을 도왔으며 휴전협정 때는 UN군 측 수석통역관을 맡기도 했다. 1951년 휴전과 함께 전역 후, 연희대학 문과대 조교수(교육학)로 취임하여 백낙준, 김윤경을 보좌하여 환도 이후의 학원복구사업에 전력을 기울였고, 총장서리, 재단법인 이사 및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며 우리대학교가 오늘날의 규모로 발전할 수 있게 기초를 닦는 등 연세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내 몸 속에는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말을 즐겨하며 한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실천했던 원일한 박사는 그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이 땅에서 2004년 1월 소천했으며,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원한광(Horace H. Underwood) 끝없는 연세사랑의 약속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원한광 결혼식> 원일한 박사의 장남인 원한광 박사(Horace H. Underwood)는 원일한 박사가 강제 출국되어 미국에 머물던 1943년 미국에서 출생했으며, 세살 때 한국으로 건너왔다. 유년을 한국에서 보냈으며 서울에서 외국인학교를 졸업(1960)하였다. 1964년 미국 해밀턴대학에서 아시아 역사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미국 뉴욕 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우리대학교 초청교수로 온 뒤, 1976년 우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1987년 초대 국제학대학원 교학과장을 역임했고 이후 국제교육부장과 국제학대학원장을 거쳐 2004년까지 근무했다. 현재는 재단이사로 재임 중이다. 대학공부로 11년(1960∼71), 미 해군으로 3년 그리고 터키오 대학 3년을 제외한, 3살 때부터 2004년까지 인생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셈이다. 2004년 가을, 선조들의 꿈이 이루어지고 한 세기가 넘는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고 판단한 그는 주거지를 미국으로 옮기며 큰 사랑을 남겨둔 채 한국을 떠났다. 언더우드 가문 여성들의 한국사랑 언더우드가의 선교와 봉사에 있어 여성들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언더우드 가문의 여인들은 대를 이은 한국 선교사 가문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빛나는 활동을 하는 동안, 그들의 내조자이자 협력자일 뿐만 아니라 의사, 선교사, 교사, 교수로서 독창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들의 일생을 한국에 바쳤다. 최초의 서양 여의사 홀튼 명성황후 비롯한 한국 여성 치료에 헌신 언더우드 1세의 부인 릴리아스 홀튼(Lillias Horton Underwood) 박사는 조선을 찾은 첫 서양 여의사로 명성황후의 전담 의사로 활동하는 등 숨질 때까지 한국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했다. 그녀는 1851년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태어나, 시카고에서 수학했고, 1888년 시카고여자의과대학(현재 노스웨스턴대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됐다. 홀튼 여사는 곧바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한국 파송 여자 의료 선교사로 선발되어 한국에 파송된다. 홀튼은 제중원에서 산부인과를 맡아 명성황후의 시의 역할과 함께 치료의 손길이 미치지 않던 많은 한국 여성들을 치료했다. 또한 진료 활동 이외에도 고아들에게 산수와 영어를 가르치는 등 교육 선교사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1889년 원두우 선교사와 결혼한 이후에도 남편과 힘을 합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교회 설립은 물론 문서 선교와 각종 초교파적인 연합 활동, 고등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일에 큰 기여를 했다. 그녀는「The Korea Mission Field」의 편집 책임자로서 한국 선교 상황을 미국 교회에 알리고 한국의 정치적·문화적 상황을 정리하고 한국학의 각 영역들을 연구하여 집대성하고자 했다. 한국 여성 위한 활동에 앞장선 와그너 백두산 정상에도 오를 정도로 한국의 산을 사랑했고, 연희대학 교수 부인회를 조직해 여성계몽에 앞장섰던 언더우드 2세의 부인 에델 반 와그너(Ethel Van Wagoner Underwood) 여사. 와그너 여사는 언더우드가의 여인들 중 한국에서 가장 큰 비운을 겪었다. 1888년 출생하여 원한경 박사와 결혼한 후 한국 선교사의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줄곧 언더우드 2세를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또한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의 대표적 프로그램인 기독교 여자 절제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한국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9년 3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불만을 품은 좌익들에 의해 사택(현재 언더우드가기념관)에서 피살됐다. 그녀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남편 원한경과 자녀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전체 연희대학교 학생들에게도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숨은 개척자 언더우드가의 여인들 ㄱㄱㄱㄱㄱㄱ<태요한 여사>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원은혜 여사> 시어머니에 이어 구제사업과 교육에 헌신한 3세의 첫 번째 부인 태요한(Joan Vida Davidson Underwood) 여사는 원한광, 한웅, 한석을 낳아 기르며 원일한 박사를 내조했으며 한국전쟁 때는 일본에 머물며 적십자사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또한 1954년 외국인들을 위한 「한영사전」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 원성희(Dorothy Constance Watson Underwood) 여사는 호주 출신의 음악가로서 역시 원일한을 훌륭히 내조하며 자녀들을 양육했다. 그녀는 이화여대 종교음악과 교수, 새문안교회 ‘언더우드 교회음악 연구원’ 원장으로 봉직했다. 원요한 박사의 부인인 원진희(Jean Welch) 여사 역시 미국 연합 장로교 여선교사로 활동하며 교육과 음악 분야에서 한국에 크게 기여했다. 장로교 청주 선교부에 부임한 뒤, 성경학교에서 강의했으며 그 후에는 광주 호남신학교 교수로도 봉직했다. 4세 원한광의 부인 원은혜(Nancy K. Underwood)도 1971년 미 연합 장로교 여선교사로 내한했다. 서강대, 서울외국인학교, 서울여대, 우리대학교 영문과에서 재직하면서 수많은 강의를 하고 한국학 서적을 영역해 해외에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언더우드가의 여성들을 모두 지면에서 다루지는 못하였으나 이처럼 언더우드가의 여인들은 한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진정한 봉사자이며 숨은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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