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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언더우드家 4대손 이야기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9-07-01

신촌 원氏, 원한석(Peter A. Underwood) “한국, 서울, 그리고 연희동”. 피터 언더우드(Peter A. Underwood) 씨의 고향이다. 그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최초의 선교사이자 우리학교를 창립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의 증손자로 원일한 박사의 3남이다. 한국이름 원한석의 그는 한국에서나 외국에서 모두 고향을 물어보면 자랑스레 연세대학교가 있는 연희동을 말한다. 150년의 언더우드가를 이어온 원한석 씨는 그만큼 연세대학교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 사랑의 나눔, 언더우드 가문의 역사 “언더우드뿐만 아니라 함께 노력한 많은 분들의 공” “지금 우리에겐 증조할아버지는 정말 ‘할아버지’ 모습으로 느껴지죠.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젊었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증조할아버지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이었으니까, 그 나이에 지금 청년으로선 하기 힘든 일을 한 것 같아요.” 원한석 씨의 말처럼 언더우드 선교사는 의사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광혜원에서는 물리학을 가르치고 기독교청년회인 YMCA를 창립했으며 현재 우리학교의 모태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웠다. 젊은 나이에 그런 많은 일을 해낸 힘은 나눔에 대한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런 희생과 사랑은 단순히 150년 전 언더우드의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증조할아버지가 설립자는 맞죠. 많은 일들을 한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은 없는 법이죠. 그 때 당시 한국에 온 수많은 선교사들과 도와주는 주변 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증조할아버지 얘기를 하며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한편 증조할아버지 한사람의 업적으로만 평가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것 아닐까요?” 원한석 씨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이 돌아가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연세의 고리, 특별한 일상의 관계들 “한국은 특별함이 아닌 일상이고, 평생의 삶일 뿐” “한국에서 특별한 경험이요? 그 질문 자체가 저는 좀 어색해요. 저한테 한국은 특별함이 아닌 일상이고, 고향이고, 평생의 삶일 뿐이죠. 그래서 한국을 사랑해요. 한국에서 숨을 거둘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많은 사람들이 서양인으로서의 그의 외모만 보고 뭔가 특별한 경험담을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생후 3개월 만에 한국으로 와서 자라난 그에게 그런 질문은 오히려 섭섭할 뿐이다. 수십 년 전 연희동 길과 밭에서 동무들과 썰매를 타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원한석 씨는 토종 한국인이다. 미국에는 고향도, 집도, 갈 데도 없다는 그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4대가 대를 이어서 계속 서울에 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아마 생각보다 얼마 안 될 거예요. 그렇게 보면 사실 저야말로 순수한 ‘서울 사람’ 아닐까요?” 물론 그에게 특별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연세대학교 창립자, 언더우드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특별한 사람이다. 그 역시 가문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갖고, 많은 이들이 인정해주는 가문에서 태어나 축복 속에 자라났다고 생각한다. 또한 언더우드가의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에 더 신중을 기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현재 외국기업의 한국 투자유치를 돕는 컨설팅 회사 IRC의 시니어 파트너다. 또 다른 의미의 ‘비즈니스 선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 발 더 나아간 역사, 언더우드 가문의 여성들 “선교사의 2/3를 차지했던 여성의 역할에도 관심을” “대부분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얘기를 하죠. 그런데 참 이상해요. 왜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 얘기를 꺼내지 않을까요? 증조할머니도 세브란스의 여의사로 왔고 할머니도 외국인 학교의 첫 외국인 교사였어요. 어머니도 한국 출생이고 연세대학교 교수였는데 말이죠.” 원한석 씨는 지난 150년 동안 우리가 본 언더우드가의 역사가 반쪽만의 역사만이 아닐지 의문을 던졌다. 실제로 원한석 씨의 딸은 ‘Underwood wome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똑같이 한국에 와서 많은 가르침과 봉사를 행한 언더우드가의 여성에 대한 관심이 필요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3분의 2가 여성이었을 정도. 그의 부인 역시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 “언더우드 일가가 한 일이 많지만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측면들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더도 덜도 말고 다른 많은 선교사들처럼 말이죠. 그리고 단순히 남성위주의 역사가 아닌 성별에 상관없이 헌신한 사람들로.” 교육에 대한 열정, 언더우드 가문의 메시지 “교육과 기독교 정신, 그 핵심 놓치면 소용없어” 원한석 씨는 지금 가업을 전혀 이어받지 않고 개인 사업을 하고 있지만, 연세대학교에 살며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우리대학교에 바라는 점이 있냐는 질문에 그가 강조한 것은 ‘교육’과 ‘기독교 정신’이었다. “교육이예요. 연세대학교가 본래 추구해야 하는 활동이죠. 물론 우리학교가 여러 대외 활동도 하고 국제화하려는 변화는 환영해야겠지만, 본질인 교육에 대한 열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한 기독교 정신이 좀 약해진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하지 않을까요? 국제화, 연구, 시설 확충 모두 좋지만 핵심을 놓치면 소용없어요.” 현재 언더우드가의 4대 손 중 원한석 씨만이 유일하게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2004년 자식들과 가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거주지를 옮긴 원한광 박사를 비롯해 그의 형들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고, 그의 딸 역시 외국에 나가 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묻히는 것이다. “진짜 한국을 사랑해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서양인인 당신들이 한국을 사랑하겠느냐고 생각하죠.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하던지 나고 자라고 일하고 사랑했던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섭섭해요.” 그래서 최근 그의 고민은 은퇴 후 아내의 고향인 호주로 가기로 한 아내와의 약속. “은퇴의 시기는 아직 정해진 게 아니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죠. 평생 한국에서 살아온 제가 호주에서 잘 살 수 있을까요? 전 한국을 너무 사랑하는데 말이죠.” 150년을 이어온 언더우드 가문 그리고 유일하게 한국에서 그 뿌리를 이어가고 있는 원한석 씨. 훌륭한 가문은 만드는 것보다 이어가는 게 더 어려운 일일테다. 우리대학교의 역사와 자긍심을 밝혀주는 언더우드 가문의 또 다른 150년을 기대해 본다.

 

vol.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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