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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받는 기쁨 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8-11-01

104년 동안의 자선,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세브란스 전기 집필한 김학은 교수 “그가 자선활동 중 갑자기 사망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수첩에는 약속하고 미처 이행하지 못한 미지급 자선명세표가 있었다.”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 연세대학교의 교명 연세의 “세”는 그의 이름을 기념한 것이다. 세브란스 병원의 명성 덕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브란스라는 이름을 익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정말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엄청난 선물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록의 복원을 마침내 우리대학교 경제학과 김학은 교수가 해냈다. 세브란스와의 인연, 그 시작 클리블랜드 곳곳에 남아있는 세브란스의 흔적 1977년 김학은 교수가 미국에서 조교수로 부임한 학교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김 교수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와 갖는 인연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신임교수 환영회가 열려 학교 캠퍼스 내에 있는 유명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심포니 홀에 초대됐어요. 근데 심포니 홀 이름이 ‘세브란스 홀’인 거에요. 그리고 한 일주일 쯤 지나서 시내 쇼핑센터를 찾았더니 주위에서 ‘세브란스 쇼핑센터’를 알려주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세브란스 홀의 세브란스가 우리대학교 세브란스병원과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었다. 그 후 우리대학교에 부임한 김 교수는 1985년 우리대학교 설립 100주년을 함께 맞게 된다. 당시 우리대학교 설립자에 기여했던 알렌 박사, 언더우드 박사, 에비슨 박사 그리고 세브란스 씨의 후손이 초청됐었다. 하지만 세브란스 씨의 후손만이 오지 못했다. “이상했죠. 왜 세브란스의 후손만 오지 못했을까. 알아보니까 아무도 세브란스 후손에 대해서 모른다는 거예요. 퍼뜩 미국에 있을 때 갔던 그 세브란스 홀이 떠올랐죠. 그래서 미국에 갈 때마다 조금씩 세브란스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죠. 알고 보니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김 교수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세브란스 이름 넉자만을 갖고 그의 생애를 하나하나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시 소문을 들은 박영식 총장이 김 교수에게 세브란스에 관해 책을 써달라는 권유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브란스에 관한 자료가 너무나 부족했던 터라 김 교수도 처음에는 선뜻 나서질 못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그는 세브란스 씨를 찾기 위한 22년간의 대장정을 걷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김 교수가 저술한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그의 생애와 시대」(연세대학교 출판부)가 우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맞춰 출간됐다. 슈바이처는 치료를 했지만, 세브란스는 의사를 키웠다 세브란스가 준 선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세브란스가 쓴 일기나 편지 등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때문에 김 교수는 미국에 갈 때마다 조각퍼즐을 맞추듯 자료를 수집해야 했다. 그 당시 신문에 났던 그의 이름을 따라 다른 첨부 자료를 찾고, 또 다시 거기에서 찾은 단서로 시골 학교 사물함에 파묻힌 자료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거듭하다 보니 2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런 과정 속에서 김 교수가 찾은 세브란스는 한국에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을 준 사람이었다. “슈바이처 박사는 누군지 다 알죠. 그는 아프리카에 가서 그들의 질병 치료를 위해서 봉사했지만 거기서 아프리카 청년들을 의사로 만들진 못했어요. 그가 죽음으로써 끝났죠. 하지만 세브란스는 의사는 아니었어도, 당시 한국 사람들을 치료할 뿐 아니라 의사로 교육받을 수 있게 양성했죠. 앞날을 내다 본 거에요. 한 가지 더 꼽아볼까요. 당시에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지적 능력을 의심해서 한국에서 초등학교나 중학교 정도의 교육을 실시했어요. 조선에 대학을 세우려는 것을 다 반대했죠. 근데 세브란스 씨는 대학 중에서도 어려운 의과대학을 세운다는 데 앞장선 사람이에요. 대학에서 칠박사가 나오고 훌륭한 의사들이 나오니까 한국 지도층도 우리가 대학교육을 할 수 있구나하고 깨닫게 됐어요. 숭실대학, 배재대학, 이화대학도 다 그때부터 만들자고 한 거죠. 특히 3.1운동 이후에 우리도 ‘민간’대학을 만들자고 한 운동이 다 여기서 시작된 거예요. 우리한테 자신감을 준 겁니다. 이 땅에서 한국 사람들의 지적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거에요.” 최초의 기독교 선교 의료 자선가, 세브란스 백년을 이어온 대를 이은 자선활동 세브란스는 석유사업을 통해 큰 부자가 되었고 또한 기독교 신자이자 자선가가 되었다. 세브란스 자선의 힘은 그가 석유에서 벌어드린 막대한 재산에서 비롯하였으나 그 정신은 기독교 신앙에서 유래한다. 자신이 번 돈으로 한국에 의과교육을 뿌리내리게 해 준 세브란스, 그가 왜 이토록 한국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자선을 베풀게 됐을까. 김 교수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라는 그의 정신은 세브란스 집안의 전통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한국에 와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사람 주위에 훌륭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가 평생 봉사하던 교회에 있던 부목사님과 한국 선교사분이 인연이 닿았었죠. 결정적으로는 세브란스 집안이 그 할머니 때부터 해외 선교를 계속 후원하는 집안이에요. 해외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맞을 때 미국에 쉬러 가는데 그때 세브란스 집안에서 같이 살고 한 거죠. 그걸 세브란스 씨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겁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어릴 때부터 뭐라고 하냐면 “극동에 가야 된다”고 말했다고 해요.” 미국 장로교단의 ‘세브란스 J.L. 기금’은 지금도 매년 우리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기금을 송금한다.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는 작고한 지 95년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우리대학교를 지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주인공은 그의 외아들 존 세브란스이다. 그는 생전에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세브란스에 지속적으로 기부를 했음은 물론이고, 그가 죽기 전에 유산으로 세브란스 J.L. 기금을 만들고 유언을 남겨 오늘날까지도 세브란스병원에 사랑을 전하고 있다. 집안 대대로 자선을 몸소 실천하는 세브란스 가(家)인 셈이다. 104년 후의 광명, 세브란스가 준 또 하나의 선물 실명의 위기에서 새 빛을 되찾아준 세브란스병원 본래 김 교수는 책의 탈고를 칠박사가 배출된 지 100주년이 되는 금년 6월 3일에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일을 맞출 수 없는 시련이 그에게 닥쳤다. 이 책의 초고를 탈고하여 수정, 보완, 삭제를 하기 직전 실명 위기에 처한 것이다. 깊은 실의에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세브란스병원 권오웅 교수의 신속한 결정과 탁월한 수술이 실명에서 건져주었다. 세브란스 씨가 104년 전 지은 병원에서 104년 후 세브란스 전기를 기록한 망막환자가 광명을 얻은 셈이다. “정말 세브란스 씨하고 뭔가의 인연이 있나 보죠. 클리블랜드의 세브란스 홀도 그렇고, 결국 이렇게 그의 생애에 관해 쓰게 됐으니……. 이제야 나의 숙제를 다 했다고 생각해요. 이젠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달린 거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제2의 세브란스가 나타났으면 하는 거예요.” 이제 우리대학교를 설립한 네 사람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세브란스 씨에 관해 김 교수가 저술함으로써 학교 설립자의 전기가 마무리 됐다. 그리고 세브란스의 삶을 찾고 기록한 저자로서 김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후학들에게 꼭 하고픈 말이 남아 있었다. “자선의 중요성, 돈을 벌었으면 어떻게 써야 하는가가 정말 중요한 거죠. 록펠러와 세브란스가 친구이고, 당시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로 제이피 모건(J. P. Morgan) 등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하고 비교했을 때 세브란스 씨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인거죠. 우리 연세 가족들은 그런 훌륭한 사람이 학교를 세웠다는 데 있어서 자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의 아들딸들이 아버지를 본받고 존경해서 또 기금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돈을 기증한다는 것도 드문 일이죠. 자선이 집안의 전통이 된 겁니다. 그와 그의 가족을 통해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자선의 중요성을 배울 귀중한 기회를 얻은 셈입니다.” 그의 말처럼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가 104년 전 심은 자선의 씨앗은 우리대학교에 뿌리를 내렸다. 미래지향적 자선이 교육임을 몸소 보여준 세브란스의 자선을 통해 이제는 수많은 후학들이 제 2의 세브란스가 되기를 바라본다.

 

vol.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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