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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음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8-10-01

변화를 연출하는 최연소 국립오페라단 이소영 단장 “오페라는 제게 놀이터였어요. 목표를 향해 작품을 해가면서 오페라라는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 수 있었어요. 그게 저를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한 거죠.” 국립오페라단 이소영 예술감독(성악 81년 입학)은 국내 첫 여성 오페라 연출가다. 그리고 이제는 비성악가 출신의 최연소 국립 오페라단 단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기존 성악가 출신 원로 오페라단 단장들과 달리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도 새롭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과제를 ‘작품의 질로서 그 권위를 이어가고 세워가야 하며 다양한 무대의 요소들을 함께 발전시킬 일’로 정의 내렸다. 어머니와 연세대학교가 열어준 오페라 세계, 드리머(dreamer) 이소영 그녀가 오페라라는 놀이터에 처음 눈을 뜬 것은 다섯 살 때 어머니(황영금, 우리대학교 성악과 명예교수)의 공연을 보면서부터다. 당시 오페라 ‘춘향’에서 춘향이 역을 맡은 어머니가 변사또에게 고초를 겪는 장면을 보면서 흘린 눈물을 그녀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하는 공연마다 다니고 무대 뒤를 기웃거렸어요. 음악의 세계에서 자라났고 오페라 무대에 관심이 많았죠.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랑 같이 집에 가려고 백양로를 걸었어요. 어머니 레슨이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렸죠. 그러니까 당연히 연세대학교는 제가 다닐 학교였죠.” 그녀가 처음 연출을 경험한 건 서울예고 시절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준비하면서다. 선생님의 권유로 음악극 발표를 맡게 됐고 당시에는 연출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 대본을 보며 상상하는 대로 그려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죠. 근데 공연을 마치고 나서 제 방에 들어왔는데 가슴이 막 두근두근거리는 거예요. 음악과 극이 만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처음 눈을 떴죠.” 그렇게 그녀는 오페라라는 세계를 떠나지 않기 위해 우리대학교 성악과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오페라 ‘연출’에 대해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과정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란 없었다. 그녀는 사진부 동아리 열혈 멤버로 활동하며 앵글 속에 들어오는 구도와 구성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 운명같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정말 운명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음악대학 게시판도 잘 안 보던 제가 게시판 한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공고가 난 걸 본거에요.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볼링그린주립대학교와 교환학생 협정이 맺어져서 지원을 받는 거였어요. 엄한 아버지 덕에 학점관리를 철저히 해서 성적은 좋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제가 교환학생을 가게 됐죠. 거기서 1년간 공부하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오페라 연출가로서 소중한 시발점을 얻었어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졸업 후에 이태리로 7년간 공부를 가게 된 겁니다.” 거대한 코끼리를 만지는 작은 인간, 오페라 연출가 이소영 “저는 오페라 연출가밖에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에요. 서양 오페라인 오페라가 왜 현대까지 명맥을 유지해왔을까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어요.” 그는 연출가로서 1997년 로시니 오페라 ‘결혼청구서’로 데뷔했고, 그 후 만들어온 40여 편의 오페라는 질문에 대한 그녀만의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오페라 연출자는 “작은 장님이 거대한 코끼리를 더듬더듬 해서 그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오페라 연출은 치열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에는 힘든 시기도 있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던 6년 동안 깜깜한 동굴 속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연출을 제대로 하려면 언어, 이론, 실기, 디자인 등 다 중요하기 때문에 힘들었죠. 당시에는 연출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연출의 ‘연’자도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 정도였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질문만 쌓여갔어요.” 하지만 깜깜한 동굴 속에도 한 줄기 빛은 존재했다. 이태리의 ‘씨에나’라는 작은 종교 도시에서 겪었던 한 달간의 세미나를 통해 그녀는 빛을 얻었다.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8시 반까지 하루 종일 훈련하는 세미나는 그녀를 심신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바로 그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그녀가 가졌던 수많은 질문을 풀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오페라 연출을 해야 하는 이유, 오페라 연출이 다른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그녀만의 답이 주어졌다. 그녀가 얻은 답은 ‘오페라 연출은 음악적 호흡’이란 깨달음이다. “최고의 작품은 바로 다음 작품” 변화를 연출하는 오페라단 단장 이소영 오페라 연출자와 경영자를 비교해 본다면 그녀의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다”다. 연출가도 결국 종합적인 요소들을 다 조율해야 하는 일이고 많은 사람들과 치열하게 겨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연소 국립오페라단 단장으로서 부담도 존재했다. 처음에는 많은 이목이 집중된 자리라는 점 때문에 자리를 사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립다운 국립오페라단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감한다. 오전 6시 출근, 밤 10시 퇴근의 하루 일정은 남들이 보기에는 고된 일상이지만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무대 냄새를 맡고 그 순간 나를 휘감는 기운을 느끼는 게 연출가죠. 극장에는 신비로운 기운이란 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일하러 새벽에 홀로 들어올 때 그리고 차가운 밤기운을 맡으며 퇴근할 때 저는 새로운 나만의 시공간을 가져요. 그리고 그걸 즐기죠. 결코 누구랑 나누거나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즐거움이에요.” ‘음악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그녀의 오랜 믿음은 그녀가 오페라를 만드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건 꿈쩍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뚝심 덕분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오페라를 연출하는 순간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동시에 국립오페라단의 바람이기도 하다. 국립 오페라단은 국민들 한명 한명이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면서 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서는 세계인이 행복해지길 원하면서 현재는 국내제작 초연에 도전하는 ‘살로메’를 준비 중이다. “극장을 찾는다는 건, 오페라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온다는 건 무대와 객석이 그 순간에 공유하는 우주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최고의 작품은 항상 다음 작품이라는 그녀는 지금 순간의 마지막 보다 조금 더 나은 작품을 꿈꾸고 있다. “목표를 잊지 않는 한 길은 돌아가도 좋다” 자랑스러운 연세인, 이소영 우리대학교 성악과 출신인 그녀는 최근 우리대학교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다. 신홍순 예술의전당 사장을 비롯해 그녀 주변에 동문들이 많기 때문이다. “저는 연세대를 다니면서 연세의 정신이랄까 제 성장의 공급원을 많이 얻었어요. 세미나가 굉장히 많아서 열심히 들으러 다녔죠. 당시에 오페라 연출가로서 정해진 길이나 선배들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이걸 해야겠다는 데 의심은 없었어요.” 그녀도 처음 오페라 연출자를 꿈꿨을 때 혼란을 겪어야 했다. 어느 학교를 가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쉽게 가지 않은 길을 갈 때 그에 따른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그녀는 꿈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연세인임이 자랑스럽다는 그녀는 후배들에게도 꿈을 잊지 않기를 당부한다. “젊음은 실패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특권을 누리세요. 얼마나 넘어졌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어설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라잖아요. 목표를 잊지 않는 한 길은 돌아가도 좋아요.” 여전히 꿈을 위해 바쁜 그녀에게서 국내 오페라의 세계무대 등단을 기대해본다.

 

vol.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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