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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나눔’의 경영철학으로 글로벌 중견기업 일군 ‘모자 왕’ 백성학 회장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8-04-16

영안모자에서 대우버스, 클라크, OBS까지 사업 확장 3월 28일 연세 발전기금 1억원 쾌척 단일 업종으로 세계 최고의 브랜드를 만든 영안모자의 창업자, 백성학 회장. 그는 ‘모자 왕’으로 불린다. 영안모자는 연간 1억개의 모자를 70여 개 나라에 판매하는 모자 전문회사로, 현재 세계 모자시장의 35%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모자 왕’ 백 회장은 2002, 2003년 모기업인 영안모자보다 훨씬 덩치가 큰 대우버스와 지게차 업체인 미국 클라크를 잇달아 인수하면서 기업 규모를 확장했으며, 또한 올해는 경인TV 대주주로서 OBS를 개국해 미디어 산업에도 진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백 회장을 주목하는 것은 비단 그가 일군 사업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최종학력 초등학교 3학년의 10세 전쟁고아가 일궈낸 성공이라는 점과 그 성공의 바탕에는 일찍이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경영전략과 철저하게 사업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그의 경영철학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백 회장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2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장학금, 발전기금을 기탁하며 우리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기여해왔으며, 지난 3월 28일에도 발전기금 1억원을 쾌척한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을 만났다. 10세의 전쟁고아, 전 세계 ‘모자 왕’되다! 백성학 회장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10세 때인 1950년 원산에서 피난 가는 고향 형들에게 사탕값을 받으러 배를 탔다가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고아가 됐다. 그리고는 미군부대서 잔심부름을 하며 전쟁 북새통 속에서 용하게도 모진 삶을 버텨냈다. 그는 16세에 모자공장에 취직해 일을 배우다 1959년 19살 나이에 청계천에서 70개의 모자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모자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인 백 회장은 1970, 80년대 미국 수출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미국 프로야구단의 팬서비스용 모자를 공급하면서 미국시장을 석권한 그는 미국에 3개 공장을 비롯해 코스타리카, 중국,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전 세계 10개국에 17개 법인과 31개의 지점을 거느린 세계 최대 모자기업으로 키웠다. 또한 2002년 대우버스 인수에 이어 2003년 100년 역사의 지게차 업체인 미국의 클라크사 인수, 2008년에는 OBS 방송을 개국했다. 그렇게 영안모자로 사업을 시작한 지 49년이 지난 지금, 그는 모자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모자 왕’이자 기계산업과 미디어산업을 종횡무진하는 ‘잘나가는 중견기업인’이 되었다. 70억명 소비자를 향해 해외로 눈을 돌리다 그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백성학 회장은 첫 번째로 ‘멀리보기’를 들었다. 1~2년을 위한 계획이 아니라 5~10년 이상을 바라보는 계획을 세우고, 상황이 좋을 때와 나쁠 때의 밸런스를 맞춰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그의 성공 요인은 ‘해외시장 개척’이다. “5천만명을 대상으로 사업을 할 것인가, 70억명을 대상으로 사업을 할 것인가? 더 넓은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중소기업들이 좁은 국내시장에서 대기업과 가진 자들을 상대로 경쟁하며 고전할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아직 갖지 못한 중소기업이더라도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라면 얼마든지 성공의 기회가 있다. 아직 우리나라 60~70년대 경제 수준의 나라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모자를 팔아 번 1만원과 해외에서 모자를 팔아 번 1만원은 똑같다. 어디에서 벌었건 1만원은 그저 1만원인 것이다.” 그는 26살인 1966년부터 해외 수출에 나섰다. 역사와 기록을 통해 배우다 세 번째는 역사와 기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기록에서부터 국가, 사회, 인류 전체의 역사까지 옛 것의 가치를 아끼고 온고지신으로 삼는다. 그래서 백 회장은 영수증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자료를 알뜰히 모은다. 영안모자 역사관에는 1959년 영안모자 최초의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수십 년간 출장을 다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수천 장의 비행기 탑승권까지 백 회장의 꼼꼼한 자료수집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전시물들이 가득하다. “자랑스러운 역사건 잘못한 역사건 모든 기록을 소중히 남겨야 한다. 후대 사람들이 그 기록을 통해 잘한 것은 배우고 못한 것은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은 문화민족의 뿌리다. 역사를 남기는 일을 국가에만 맞길 것이 아니라 개인, 가족, 지역, 학교 등이 모두 함께 애써야 한다. 유대인들이 보존하고 있는 ‘안네의 집’을 보라. 또한 거북선을 부린 이는 역사에 남고, 거북선을 만든 이는 역사에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논밭을 일구는 이도, 시장에서 손수건을 파는 이도, 저마다의 역사와 자료는 소중하다.” 그는 자료를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를 통해 배움을 얻고 현대에 맞춰 응용하는 등 역사를 적극적으로 바라본다. 일례로 사업초기 서양에 수출할 모자의 디자인을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서양의 역사박물관에서 찾은 것을 들 수 있다. “서양에 팔 모자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서양의 역사와 유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옛 자료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수익의 일부는 반드시 사회에 환원한다 마지막 성공 요인으로는 백 회장의 사회공헌에 대한 철저한 철학을 들 수 있다. 그는 수익의 1/3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교만해서 한해라도 봉사를 거르면 나쁜 일이 생긴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계기를 주시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회사업에 힘쓰고 힘든 사람을 외면하면 기업이 잘되지 않는다고 믿는 데는 힘겹게 살아왔던 어린 시절의 아픔과 1904년 조부 때부터 믿어온 기독교 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모자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힘든 시절에도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쪼개 나이든 걸인들에게 찐빵을 사먹였다고 한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그는 자선활동도 글로벌화 했다. 1986년 강원도 홍천에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보호시설, 의료시설이 한데 모인 종합복지타운 ‘백학마을’을 세운 데 이어 중국, 코스타리카, 스리랑카, 베트남에도 백학마을을 만들고 지속적인 사회공헌을 하고 있다. 해당 지역에서 올린 수익의 일부는 그 지역민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지론에 따른 것이었다. 북에 남겨진 어머니가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억압받다 1962년 영양실조로 숨졌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 백 회장은 2000년 어머니를 기리는 교회를 지어 이화여대에 기부하는 등 선교활동에도 힘을 쓰고 있다. 대학시절 자신에게 꼭 맞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백성학 회장은 젊은이들에게 자기평가를 통해 자신이 갈 길을 잘 선택하라고 당부했다. “대학시절 자기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중량을 달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잘 분석하면 자신에게 맞는 길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모, 스승,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라. 세상이 원하는 직업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맞는 직업을 찾길 바란다. 그렇게 했을 때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 잡역부라도 그 사람이 직장을 떠나려 할 때 주인이 잡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직업에서 성공한 것이지만, 아무리 CEO라도 주인이 그 CEO가 떠나가길 바란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것이다.” 자신의 갈 길을 일찌감치 모자사업에서 찾았던 백성학 회장. 그의 기도와 사랑이 닿아있는 연세의 품에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제2의 백성학이 수천, 수만명 다시 태어나길 바래본다.

 

vol.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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