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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홍경표 동문(교육학 58년 졸업)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7-07-01

한국어학당 36년간 한국어교사로 봉직 95년 은퇴 후 교회 봉사활동 ‘제2의 인생’ 펼쳐 내년이면 졸업 50년 - 홈커밍데이로 학교방문 지난 6월 18일 오후, 널찍한 연세대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서문 근처의 자택. 푸른 녹음이 가득한 정원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희끗희끗한 머릿결은 어느새 햇살이 투영돼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지난 1959년 우리대학교 한국어학당 창단멤버로 36년간 한국어강사로 왕성하게 활동한 홍경표 동문. 지난 95년 정년퇴임하며 ‘한국어 교육의 과업’을 후배에게 남겨 주고 떠났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36년간 연세교정에서 활동했던 추억들이 또렷이 아로새겨져 있다. 인터뷰 중 대답을 하다 초록빛으로 물든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은 은은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시원시원한 말투에 담긴 삶에 대한 열정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게 강렬하다. 지금은 한국어학당에서 봉직한 ‘한국어 교육자’가 아닌 ‘사회봉사의 교육자’로 명함을 바꿨다. 은퇴 후 세브란스 호스피스 교육을 이수했고 요즘에는 영락교회 봉사활동에 푹 빠져 있다. 그는 ‘섬김의 리더십’을 이어 가는 자랑스러운 연세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인터뷰하기 힘든 인물 중 하나. 이유는 그의 남에 대한 배려와 겸손함 때문이다. “임호빈, 백봉자 선생님 등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훌륭한 한국어 교육자도 많은데 왜 저를……”이라며 처음에는 손을 가로저었지만, ‘연세소식에 반드시 선생님 기사를 실어야 한다’는 끈질긴 설득(?) 끝에 인터뷰에 성공했다. - 우리대학교 한국어학당 초창기 멤버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1954년 이화여고를 졸업할 당시 사회상황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터라 어려운 때였죠. 나라를 세우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농촌계몽’을 하기로 굳게 맘먹었어. 대학교 다닐 때는 교회나 고아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도 가르쳤지. 특히 하계아동학교에서는 여자아이들을 앞에 놓고 ‘가나다라’를 가르쳐 봤어. 그러다 우리대학교 한국어학당 설립과 함께 강사를 모집했고 박창해 교수께서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느냐’며 제의를 했지. 제의를 승낙한 것이 바로 한국어교사로 이어지게 된 거구. ‘농촌계몽’이 한국어 교육으로 바뀐 셈이지. - 그 당시에는 마땅한 한국어 교재도 없었을 텐데요. 박창해 교수님의 도움이 컸지. 음성학, 교수법 등 실제로 강의를 하거나 학생들과 질문, 대답을 한 대화를 메모해 교재로 만들었어. 저를 포함해 초창기 멤버인 7명의 선생님들도 함께 밤을 새우며 교재를 만들었지. 당시에는 힘들고 피곤하다는 생각보다는 자랑스럽게 한국어 교재를 만든다는 생각이 앞서 가슴 뿌듯했어, 이후에 저도 2대 교무과장을 하면서 한국어독본, 한국어발음 등의 교재를 썼지. - 당시 한국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기억나시는지요? 대부분 한국에 온 외국 선교사들이었지. 반은 그리 많지 않았어. 한 반에 2~3명 혹은 7명이 된 반도 있었구. - 당시 우리대학교 한국어학당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선교사를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기관이 있긴 했지만 대학에서 전문 한국어교육 기관을 세워 한국어를 가르친 건 우리대학교가 처음이었지. 이후부터 입소문을 타면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고, 개설된 반도 급격하게 늘었지. 다른 학교도 이를 보고 하나둘씩 한국어학당을 세우기 시작했어. - 연세교정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지요. 캠퍼스 안 사택에서 지냈어. 아버지가 교수이셨거든. 초등학교 때는 연세교정에서 밭고 갈고 그랬는데. 대학교 다닐 때 학비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학비 중 일부인 5,000원이 모자라 전전긍긍한 적이 있었고. 그때 저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최현배 부총장께서 5,000원을 아무 말없이 빌려 주셨어. 대학졸업 후 최현배 교수님께 5,000원을 들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찾아뵈었지만 절대 받으시지 않았지. 대신 이런 말을 전해 주셨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라’구. 덕이 많으신 분이야. 당시 일화를 교훈삼아 지금까지도 선교의 마음을 잊지 않고 살고 있어. - 평화봉사단에서도 활동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1967년인 걸로 기억해. 미국 뉴멕시코주에 평화봉사단 제4기 언어담당책임관으로 4개월 동안 파견돼 한국어를 가르치고 온 적이 있지. 정확히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제가 가르친 여럿 학생들이 후에 외교관이나 대사가 된 걸로 기억해. - 영국 셰필드 대학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요. 88년 셰필드 대학 교환교수로 갔어요.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왔다고 하니 극진하게 환영해 주었어요. 해외에서 ‘연세대 한국어학당’의 유명세가 높다는 걸 새삼 실감하니 소속감도 생기고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그곳에는 일본어학과에 ‘Korean Studies’가 소속돼 있었어요. 지금은 해외대학에 한국어학과가 개설된 곳이 많지만 당시에는 한국어학과가 독립적으로 개설된 곳이 드물었어요.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와 함께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어학과의 위상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죠. - 셰필드 대학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지금 우리대학교 총장이신 정창영 교수께서 학회 일정차 셰필드 대학에 오신 적이 있었지. 학회 일로 오랜기간 해외에 있다 보니 한국음식이 그리웠었나 보더라구. 제가 김치로 대접했더니 무척 좋아하시더라구. 당시 교수로 뵈었던 분이 지금은 총장으로 학교를 잘 이끄는 모습을 보니 흐뭇해. - 36년간 한국어교사로 활동하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해외에서는 한국어교사가 교수대우를 받는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했지. 나름대로 대학원에서 석사과정도 밟았지만 ‘유리벽’의 한계는 넘지 못했어. 한국어교사 위상을 높이는 데 의욕적으로 앞장섰지만 결국에 목적은 이루지 못했네(말하는 도중에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못다한 과업(한국어교사 위상강화)을 후배들이 이뤄 냈으면 하는 바람이야. - 지금도 수많은 제자들과 끈끈한 인연을 이어갈 텐데요.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들과 지금까지도 이메일이나 메일을 주고 받고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지. 2002년 캐나다로 이민간 아들이 다니는 집 근처의 교회를 갔었는데 그곳의 목사가 바로 제가 가르쳤던 학생이었어. 아들이 한국에서 이민왔다고 하니 목사가 혹시 ‘홍경표’라고 아냐고 물었고, 아들이 곧바로 ‘어머님’이라고 대답했다고 해. 이런 데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지(아들 김현진 동문(사학)은 고인이 됐다). - 내년이면 졸업한 지 50년이 되는데요. 대학생으로 연세교정을 함께 드나든 여학생 30여 명 중 해외거주 및 활동자를 빼고 19명은 지금까지도 매달 꾸준히 만나고 있어. 한국어학당 초창기 멤버 7명과도 정기모임을 갖고 있구. 내년이면 졸업한 지 정확히 50년이 되지. 그때에는 30여 명이 다 모일 수 있을 거야. 홈커밍데이에 꼭 초대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는 우리대학교와 한국어학당에 ‘사랑’을 넘어서 ‘애착’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도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vol.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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