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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이달의 연세역사] 연희 문학을 꽃피운 「문우 文友」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12-01

- 1932년 12월 창간 - 연세 문학의 연원은 1922년 5월에 창간된 「연희」지에서부터 비롯됐다고 봐야할 것이다. 1932년 제8호를 끝으로 종간된 이 「연희」지의 지면을 통해 학생들은 제한된 여건에서나마 문학활동을 펴 왔다. 당시 「연희」지를 통한 연세인들의 문학할동은 위당 정인보의 지도에 큰 힘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위당의 관심과 지도는 비단 교내의 문학활동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교외 활동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던 듯 하다. - 윤세걸<연세대학교 사람들>, 「학원」 통권 294호, 1984년 5월 그리고 잇달아 김윤경 김영희 박영준 염형우 박용철 최광범 유근석(유진) 이경열 이은상 등의 작품활동까지 소개해 주고 있다. 이뿐 아니라 1977년 11·12합병호로 간행된 「문우」에서 조차 연세 문학의 출발은 1922년 5월에 창간된 「연희」에서부터라 하였다. 이렇듯 연희 문학의 연원과 출발이 되는 「延禧」는 진작부터 창간을 준비해 오다가 출판 직전에 좌절된 적이 있다. 1921년 4월호 「청년」 1권 2호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연희 학생기독청년회 지육부에서 문장과 학술 또는 연구를 자유로 발표하고 장려하기 위하여 기관지 「延禧」도 경영중인 바 이는 본래 1919년 봄에 창간호를 발행하려고 제반 준비가 다 완성되었는데 사정에 의하여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이를 열심 추진하여 숙지宿志를 달성하고자 하는 바 매우 빨리 진척중인즉 불원不遠에 「延禧」가 출판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봄에 창간호를 발행하려고 편집까지 마치고 제반 준비가 완성되었던 것이 주위의 사정으로 인하여 수포에 돌아가고 원고마저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중에 서실 失 산일散逸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1922년 5월에 드디어 창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학생기독청년회에서 주관하였으나 1923년 2월 4일 연희전문 학생회가 창립되자 「연희」의 출판사업은 학생회 지육부 소관이 되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로 위당 정인보교수가 맡게 되어 학생들의 저술활동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렵스리 창간된 「연희」가 날로 발전을 거듭하지 못하고 검열과 검열의 시련속에서 누더기가 되더니 결국 1932년에 제8호를 끝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따라서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학생 문예활동도 잠시 주춤거리는 듯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생회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 이념이 조직을 장악하려는 일이 어제 오늘만의 일을 아닌 모양이었다. 결국 학생회는 정회라는 조치로 활동이 정지되고 따라서 「연희」의 발간 업무를 관장하던 지육부 활동도 중지되었다. 이때 다행스럽게도 문과에 문우회, 상과에 경제연구회, 수물과에 수리연구회가 각과에 분립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지식열은 물리적으로 억제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학생회 대신 문과의 문우회가 팔을 걷고 나섰다. 1932년 12월 18일 문과의 문우회에 의해 「文友」가 태어났다. 꺼질 뻔한 연희 문학에 새롭게 불을 지핀 것이다. 「延禧」에 비해 훨씬 문예지 색깔이 나는 잡지로 태어났다. 「文友」라는 제호는 「논어論語」 <顔淵篇안연편> 끝에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우고, 벗으로써 인덕을 서로 북돋우는 것이다 / 君子군자 以文會友이문회우 以友輔仁이우보인에서 따왔다. 창간호 목차를 보면 16편의 학생 문예작품이 수록된 중 후일 문원文苑에 이름을 날린 이시우(1934년 문과 졸업) 설정식(1937년 문과 졸업) 외에 박영준(1934년 문과 졸업)은 본명으로, 또 이화생二火生 목흑랑目黑狼 등 필명으로 시와 꽁트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혹독한 검열의 굴레 때문에 이시우의 시 <하나님의 하나님>과 김대균의 희곡 <부역賦役의 끝>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무슨 까닭으로인지 박영준의 시 한편과 배요한의 소설도 실리지 못했다. 일제시대의 잡지 경영에는 이른 바 3난三難이 있었다. 첫째가 자금난, 둘째가 원고난, 그러나 마지막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이 검열난이었다하였다(김병익, 「한국문단사」 p. 103. 문학과 지성사, 2001년) 일제시대에 조금이라도 출판에 몸 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 검열에 넌더리를 냈다. 사정이 이러하니 「文友」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창간호를 편집했던 한태수(1934년 문과 졸업)는 그때의 고충을 이렇게 남겨 놓았다. 내가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으로 있을 때 문과에서 문우(文友)라는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내가 편집한 기억이 난다. 그때 작품이 많이 모이지 않아 몹시 걱정했다는 것과 학교 당국에서 사전 검열한 결과 몇 편의 작품은 게재금지 당하여 불쾌했다는 기억이 있다. 나는 당시 유물사상에 동정하는 편이어서 좌익적인 작품을 좋아했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쾌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네들의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동급생에 신대성申大成, 하급생에 김대균金大鈞 한일대韓一大군이 말하자면 좌익적인 글을 쓰는 학생이었다. 그중에도 한군은 시에 능했고, 김군은 단편소설을 썼다. 김군은 이름이 대균大鈞인 것을 음만 따서 대균大菌이라는 호를 쓰면서 그것으로 자못 혁명가 티를 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 소설계의 거성인 박영준군도 그러한 색채의 글을 썼다. 하급반에 설정식군은 시에 이름이 있었다. 동급반의 배요한군은 희곡을 쓰려고 노력했고, 또 이시우군은 영시 번역에 능하였다. 나는 시조를 짓느라고 했는데 어떤 작품을 냈는지 기억에 없다. 여하튼 이러한 학생들의 작품을 모아서 한권의 잡지를 만드는데 뚜렷한 편집 방침도 없이 그저 우수한 작품을 모아서 책을 만든다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먼저 학교 당국의 검열을 거친 다음에 또 총독부 검열을 거치느라 몹시 마음 상했던 것 같으며 또 한가지는 비용 염출이 곤란한 문제였다. 그래서 광고료를 받으러 큰 상점을 찾아다닌 생각이 난다.(한태수, 내가 편집하던 「文友」, 「연세춘추 제165호, 1959년 5월 9일) 이렇듯 문우회에서 원고난 자금난 그리고 검열난이라는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文友」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뒤 몇 호를 출판한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막연하다. 그 옛날 해마다 한해동안 학교의 변동사항을 적어 소책자로 내던 「연희전문학교 상황보고서」의 교내 발행 간행물편에 매년 「文友」가 계속 출판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文友」 창간호 외에는 오늘날 책이 전해지지 못하고 있어 그 전모를 알 길이 없다. 왜 전해지지 못하는지 그 까닭조차 알 길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연전 타임스」마저 전해지지 못하고 있어 참으로 아타깝고도, 그리고 불가사의하다 할 일이다. 그런데 연희 문학사를 소개하는 「문우」 11·12호 합병호(1977 5월 발행) 중에 뜬금없이 (「文友」는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하였다. 1941년 「文友」는 5호를 마직막으로 종간되는데 마지막호 전체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일문日文으로 쓰여져 있을 정도였다하였다. 그러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文友」에는 아무런 호수 매김도 없이 1941년 6월 5일 발행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어느 구안자具眼者가 틀림없이 「文友」5호임을 증명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1941년에 나온 「文友」가 종간호임에는 틀임없는 것 같다. 그 까닭인즉슨 곧이어 「조선일보」「동아일보」등 우리 손으로 나오는 신문과 잡지는 깡그리 폐간되었는데 총독부에서 연희전문만 어여삐 여겨 그냥 두었을리 만무한 때문이다. 종간호로 믿어지는 1941년판 「文友」를 보면 편집 겸 발행인에 강처중, 편집후기는 문예부 송몽규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수록 작품 중에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 우물속의 자화상 두 편과 김삼불의 시 산가山家의 밤, 그리고 송몽규는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라는 시 한편이 실려있다. 넷 모두가 문과 4학년 동급생으로 금란金蘭의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리고 이는 최소한 1941년 6월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새삼 안타깝게 여겨지는 일은 더 많은 「文友」가 우리에게 전해졌다면 꿈별과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를 더 많이 암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이다. 시인 윤동주는 이역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사라졌지만 연희문학 「文友」는 어디에서 사라졌단 말인가?

글 - 김상기 (전 연세기록보존소장)
자료제공 - 연세기록보존소

 

vol.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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